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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세계사 (남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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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문명의 뒤섞임, 차이와 통합을 아우르는 시대로 세계가 하나로 묶인 20세기에만 지구촌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지역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세계사의 일부였다. 고대사에서 보았듯이 아득한 옛날에도 민족이동은 끊이지 않았으며 민족과 지역 간의 교류와 교섭, 전쟁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오늘날보다 시간이 훨씬 오래 결렸고 장구한 세월에 걸쳐 조금씩 진행되었을 뿐이다. 중국과 일본은 역사의 탄생과 시작에서 또 독자적인 역사의 전개과정에서도 서로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인도는 동북아시아의 두 나라와 별로 관계가 없었다. 인도는 사실 지리적만으로 동양에 포함될 뿐 문명적으로는 서양에 가깝다. 흔히 4대 문명의 발상지를 말하자면 실상 인류문명의 발상지는 네 곳이 아니라 두 곳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
동양사- 한결 같이 도발하는 일본3 영국은 1902년 드디어 동양에서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오로지 러시아의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뤼순과 인천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기습하고 다음 날에야 선전포고를 했다. 영국만이 아니라 프랑스와 미국도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 측에 전쟁 비용을 지원했다. 졸지에 유럽열강을 대표해 러시아와 싸우게 된 일본은 예상외로 선전했다. 서구 열강의 지원까지 받았으나 개전 후 1년이 지나자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일본을 사지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준 것은 러시아의 내부 사정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활발해진 러시아의 혁명운동은 러일전쟁으로 더욱 고조되었다. 사태가 급변하자 전쟁을 바라보는 열강의 태도도 변했다. 이제는 군국주의 일본의 성장보다 러시아의 혁명운동이 더 큰 위협이..
동양사- 한결 같이 도발하는 일본2 일본 바쿠후가 쇄국을 하던 18세기 후반 무렵 유럽은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자본주의의 새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 영국은 18세기 중반 프랑스를 꺾고 단독으로 인도를 식민지화 하는데 성공했다. 영국에 패한 프랑스는 엄청난 변화의 회오리를 맞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이다. 이 혁명과 뒤이어 나폴레옹전쟁은 전 유럽의 지각을 뒤흔들어 근대적 국민국가의 성립을 촉진시켰다. 러시아는 18세기 초반 표트르 대제의 개혁을 바탕으로 착실하게 근대화를 추진해 유럽의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유럽의 식민지로 시작한 미국도 1776년 혁명으로 독립해 성공해 열강의 막내로 당당히 끼어들었다.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은 중국과의 통상에 최대한 주력했다. 향료 산지인 동남아시아는 이미 에스파..
동양사- 한결 같이 도발하는 일본1 100년에 걸친 센고쿠 시대를 끝낸 오다 노부나가는 장수로서의 용맹과 정치지도자로서의 지략이 두루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 자신도 센고쿠 시대를 특징지은 하극상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노부나가의 죽음에 기민하게 대처해 사태를 진정시킨 당시의 합수부장 히데요시는 비상태책회의를 열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2살짜리 손자를 후계자로 내세우면서 자연스럽게 권력을 장악했다. 히데요시는 소년시절부터 노부나가 밑에서 마구간 일부터 시작했다. 12세기 바쿠후 시대를 처음으로 연 미나모토 요리모토는 전통의 귀족인 후지와라 가문휘하의 무사집안이었고, 노부나가 역시 센고쿠 다이묘 출신이었다. 히데요시는 시코쿠와 규슈의 유력가문을 평정하고 1590년 마침내 꿈에 그리던 전국 통일을 달성..
동양사- 외부에서 온 인도의 통일 중국과 달리 인도의 역사는 통일 제국이 아니라 늘 분권화된 상태가 중심이었다. 과거분열은 기본적으로 인도 토착왕조들이나 인근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국가들이 새력 다툼을 벌인 결과이지만, 이번에는 서구 열강이라는 외세가 활개를 쳤던 것이다. 인도의 역사를 세계사에 합류시키는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외세였다. 무굴제국시대에도 남인도에는 유럽의 상인들이 새운 무역도시들이 번영을 누렸으나, 그때는 무굴의 힘이 강성했으므로 외세는 별다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무굴은 쇠약해졌고 유럽에서는 영국, 포르투갈, 에스파냐, 네덜란드의 뒤를 이어 영국과 프랑스가 중심세력으로 떠오르면서 본격적인 제국주의 시대가 출범했다. 18세기 중반까지 인도에서 진출한 영국과 프랑스는 함이 비슷했다. 인도 경영을 놓고 두 나라의 ..
동양사-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5 장제스가 토벌에 여념 없던 1931년에 일본의 관동군이 만주의 중국군을 기습했다. 이 9.18사건이 만주사변의 시작이었다. 청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서구열강이 상대적으로 소홀한 만주를 중점적으로 개발했다. 1932년 만주를 손에 넣은 일본은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웠다. 한창 뻗어가던 일본경제는 1929년 대공황으로 제동이 걸렸다. 당시 만주는 청년군벌 장쉐량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관동군은 손쉽게 만주전체를 장악했다.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에게 적은 공산당과 일본이었다. 장제스는 먼저 국내를 안정시킨 뒤 외세를 몰아낸다는 것을 기본노선으로 삼았다. 일차 목표는 공산당과 홍군이었다. 장쉐량도 일본에 저항하지 않았다.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해 항일운동 중심지인 상하이를 공격했다. 장제스는 공산..
동양사-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4 1912년 1월1일 쑨원은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쑨원은 임시 대총통을 맡았다. 청조정에서는 위안스카이에게 사태해결을 맡겼다. 쑨원은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자리를 양보하겠다고 제의했다. 위안스카이 압력으로 어린황제 선통제는 4년만에 퇴위했다. 그가 마지막 황제 푸이다. 청제국은 297년의 사직을 끝으로 멸망했으며 동시에 진시황이 대륙을 통일한 이래 2133년 동안 지속된 중국의 제국시대도 종말을 고했다. 쑨원과 위안스카이는 우리 현대사에서 김구와 이승만 관계를 연상시킨다. 쑨원은 권력을 장악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때 마다 분쟁을 피하기 위해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했다. 위안스카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재나 제정 복고를 꾀했다. 시행착오를 거듭한 중국의 근대화 노력은 결국 공화정 체제로 개혁하..
동양사-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3 당시 만주의 주인인 만주족(여진족)에게 명은 관직도 주고 조공무역도 허락하는 등 북변을 침범하지 않도록 무마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1588년 누루하치는 만주일대를 통일했다. 후금이 랴오둥에서 랴오허를 건너 랴오시까지 진출하자 명은 군대를 파견했다. 그래서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했을 때 명의 주력군은 만주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칸위를 물려받은 홍타이지는 후금을 본격적인 수권정당으로 탈바꿈 시킨 인물이다. 이자성이 베이징을 장악하는 바람에 만주로 파견된 명의 군대를 갈 곳이 없어졌다. 총 사령관 오삼계는 청에 항복하고 이자성의 반란군을 진압하기로 마음먹었다. 1644년 이자성을 물리치고 꿈에도 그리던 베이징에 입성했다. 베이징을 점령한 뒤에 청은 한동안 통일제국을 갖추지 못했다. 청淸은 오삼계를 비롯한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