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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트런드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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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유롭게 게으를 수 있는 세상을 위하여 (하워드 우드하우 교수) 1935년 첫 발표된 그의 수필에 무용한 지식 이야기가 나온다. 러셀은 소위 무용한 지식이 우리가 그것을 몰랐더라면 놓쳐버렸을 환희의 감각으로, 우리이 경험을 고양 시키고 풍부하게 만듦으로써 과일의 맛을 더 달콤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살구 예를 들고 있다. 정원에 앉아 읽으면서 맛 보았던 정신적 쾌감은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너무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과일의 간략한 역사와 어원을 아는 것만으로 살구맛은 더 달콤해지고, 햇살은 더 밝게 빛나고, 내 이해는 더 높아졌다. 무용한 지식은 살구의 역사처럼 사소한 부분에서까지 개인들에게 커다란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러한 지식의 추구를 가능케 해주는 것은 바로 사색하는 습관인데, 여기에는 게으름이 요구된다. 사람은 게으를 수 있을 ..
영혼이란 무엇인가? 내가 어렸을 때는 사람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육체는 시공에 존재하지만 영혼은 시간에만 존재한다고 알고있었다. 오늘날에는 이같이 멋진 옛날의 소박함들이 사라졌다. 물리학자들은 물질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하고, 심리학자들은 정신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심리학자 얘기부터 해보자면, 정신활동으로 생각이 되는 모든 것을 육체활동으로 격하시키려는 이들이 있다. 우리가 물리학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육체라고 불어왔던 것이 사실은 어떤 물리적 실체에도 대응하지 않는 정교한 과학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얘기 정도이다. 스스로 정신활동을 육체활동으로 격하시키는 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반면, 육체 자체는 정신이 만들어낸 편리한 개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기..
금욕주의에 대하여 이제는 금욕적 극기는 더 이상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일단 금욕주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중에서도 가장 어렵고도 본질적인 것은 죽음이다. 죽음의 공포에 맞서기 위해서는 먼저 무시하거나, 생각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 애쓴다. 혹은 반대로 인간생명의 덧없음에 대해 끊임없이 사색하기도 한다. 그리고 죽음은 죽는 게 아니라, 새롭고 더 좋은 인생으로 가는 관문일 뿐이라고 자타를 설득하는 것이다. 전혀 준비가 안된 사람이 죽음을 접하게 되면, 심각한 균형감 상실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죽음을 무시해 버리기보다, 그에 대한 어떤 태도를 확립 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죽음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것 역시 해로운 방법이다. 어느 한 주제를 너무 배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특히..
서구의 문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자신이 속한 문명을 올바르게 바라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가지의 확실한 수단이 있다. 바로 여행, 역사, 그리고 인류학이다. 여행자는 자기가 관심있는 것만 본다.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관심사에 따라 역사적 사건들을 정리한다. 인류학자는 그 시대의 지배적인 편견에 따라 사실들을 선정하고 해석한다. 문명이란 무엇인가? 나는 문명의 제1본질적 성격으로 예견을 꼽고 싶다. 우리는 국가나 시대를 그들이 발휘하는 예견에 따라 많이 문명화 되었다. 개인적 예견과 집단적 예견에는 차이가 있다. 산업주의적 특징을 가진 모든 작업들은 높은 수준의 집단적 예견을 보인다. 나는 문명에 필수적인 또 하나의 요소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지식이다. 우리는 문명을 '지식과 예견의 결합'에서 나오는 생활..
사회주의를 위한 변명(2) * 일하지 않는 부자들 임금 노동자들의 실업이 주는 해악에 대해선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본인들의 고통, 사회의 노동력 손실,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데서 오는 사기 저하 등등. 너무도 잘 아는 얘기들이어서 더 이상 상술할 필요도 없다. 부자들의 실업은 또다른 종류의 해악이다. 세상엔 놀고 먹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대개는 여자들인데 그들은 별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돈은 많아서 자만심이 강하다. 또한 돈이 많기 때문에 자신들의 안락을 위해 타인들의 노동력을 바치게 만들 수 있다. 자신은 아무데도 쓸모없다는 사실이 그들을 비현실적인 감상주의로 만들기 때문이다. 보다 심각한 해악은 다수 사람들의 생계가 무익한 것에 묶여지게 된다는 것이다. 부자들의 소비는 그에 기생하는 인구들을 다수 양산하게 된다. 그들..
사회주의를 위한 변명(1) 파시즘은 공산주의에 대한 역습, 그것도 대단히 만만찮은 역습이다. 이렇듯 사회주의가 막시스트의 용어로 설파되는 한 강력한 반감을 불러일으키게 되므로, 서구 선진국에서 사회주의의 가능성은 날이 갈수록 희박해진다. 나 자신, 사회주의자 임을 어느 열렬한 막시스트 못지않게 확신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회주의가 무산계급의 복수를 위한 복음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먼저 사회주의의 정의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이 정의는 경제와 정치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경제면으로 볼 때 적어도 토지와 광물, 자본, 은행, 신용, 무역을 포함한 기본 경제권을 국가가 소유해야 한다. 정치면에서는 기본 정치권력이 민주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사회주의의 정의에 대해선 마르크스 자신이나 1918년 이전의 모든 사회주의들도 당연히 동의할 것이..
내가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반대하는 이유 요즘엔 공산주의와 파시즘이 정치의 유일한 실제적인 대안이라고 한다. 내가 '공산주의'라고 할 때의 의미는 제3인터내셔널의 교의를 수용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초기 기독교인들도 공산주의자들 이었고 중세에도 그런 부문들이 많았지만, 그런 의미의 공산주의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 나는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에 깔린 철학은 물론이고, 마르크스의 철학에 동의할 수 없다. * 나는 마르크스의 가치론은 물론 그의 변형된 잉여가치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대부분이 자본가들에 대항 하는 입장을 세우고자 하는 그의 편의에 따라 이루어진 취사선택이었다. * 어느 한 사람을 두고 무오류자로 간주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 공산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소위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것은 사실, 과두지배계급이..
이성의 몰락, 니체와 히틀러(2) 파시즘은 쾌락과 지식을 목적으로 여기는 것은 그들이 보기에 지나치게 소극적이다. 그들은 쾌락의 자리에 영광을, 지식의 자리에 자신들이 바라는 바가 진실이라는 독단적인 주장을 대신 들어 앉힌다. 피히테는 이 엄청난 움직임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추상적 형이상학자로 출발한 그는 처음부터 자의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성향을 보였다. 그의 철학 전체가 ‘나는 나다’라는 명제로부터 전개된다. 루이14세는 '국가가 곧 짐이다'라고 말했지만, 피히테는 ‘우주가 곧 나다’라고 말했다. 1807년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저 유명한 ‘독일 국민에 고함’이란 일장 연설을 했는데, 여기에서 처음으로 국가주의의 완결된 강령을 선보였다. 이 연설문은 독일국민이 우수하다는 설명으로 시작되고, 독일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