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횡무진세계사 (남경태)

(39)
동양사-인도1 인도의 서쪽 경계부근을 흐르는 인더스강 유역은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다. 영국 고고학자 마셜은 인더스 강 일대의 모헨조다로에서 인류 초기문명을 찾아냈다. 인도의 역사는 인더스 문명이후 1000여 년 동안은 후대에 알려지지 않았다. 인도의 역사가 다시 진행되는 것은 기원전 1500년경 아리아인이 인도에 침입하면서부터이다. 아리아인은 원래 언어학상 용어로 인도유럽어족이다. 아리아인은 중앙아시아 일대에 살고 있는 유목민족인데 기원전 16-17세기부터 대 이동을 시작했다. 아리아인은 두 갈래 나뉘어 한 무리는 인도방면으로 다른 무리는 서아시아와 터키를 거처 유럽으로 이동했다. 유럽으로 간 아리아인은 오늘날 유럽인의 조상이 되었다. 유럽 백인의 인종적 조상은 중앙아시아의 캅카스인이며, 로마제국의 공용어인 라틴어는 ..
동양사-중국1 중국인들만큼 정통성을 따지는 민족도 없다. 중국의 역대 한족漢族 왕조들은 언제나 개국 초기부터 이전 정권의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전통을 강조하는 이유는 중국이 원래 농경사회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농경민족은 유목민들처럼 떠돌아다니며 생활하지 않고 정착해 살아간다. 중국 민족이 최초의 조상으로 받드는 인물이 황제黃帝다. 직위로서 皇帝가 아니라 특정 사람 이름이다. 그는 동이족의 치우와 싸워 이겨 중원의 비옥한 평원지대를 정복했는가 하면 안으로는 문자와 역법, 화폐, 수레 등을 발명하고 보급했다. 추측하자면 황제는 어느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그 당시 존재했던 지배 집단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건국 신화에 해당하는 三皇전설이 있다. 삼황이란 신농씨神農氏 복희씨伏犧氏 ..
종횡무진 동양사 프롤로그 황허문명을 계승한 중원문명은 발상지를 중심으로 점차 문명의 빛을 밝힌다. 주나라는 중국왕조의 기틀을 만들고 춘추전국시대에는 중국사상의 토대가 만들었다. 종교의 나라답게 인도의 역사는 처음부터 종교와 밀접하게 맞물린다. 일본은 대륙에서 문명을 전해받지만 중국과 다른 작은 천하를 이루면서 특유의 고립된 역사를 전개한다. 나라와 민족의 꼴이 제법 갖추어지면서 중국, 인도, 일본은 독자적 발전시대를 맞는다. 제국 체제로 접어든 중국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중심이자 국제 질서의 핵으로 자리 잡는다. 중국과 달리 인도는 내내 분권화된 역사를 전개하다가 결국에는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는다. 일본은 대륙과 교류를 끊고 치열한 내전의 역사로 접어드는데 그 결과 무사정권이 탄생하게 된다. 몽골제국 시절부터 중국은 세계화의 ..
한국사 에필로그 “ 1948년 남북한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한반도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제부터 한국사는 하나가 아닌 둘의 역사다. 더욱이 이 현대사는 아직 진행 중이므로 역사라기보다는 시사에 가깝다. 남한에 관한한 1948년부터 지금까지의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유사 이래 최대의 비극이라 할 소모적인 내전이 있었고 이승만 문민독재와 박정희 군부독재를 겪었고, 그 뒤에 다시 군부독재가 계속 되기도 했다. 1997년의 외환위기, 2008년의 금융위기는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영역에서도 향후 넘어야 할 고비가 많음을 시사한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이후 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과 소련에 의한 세계의 분할의 일환으로 일어났다. 이 전쟁은 기본적으로 민족해방이란 슬로건 아래 김일성 정권이 도발하였고, 그에 대해 ..
한국사 11 1941년 진주만의기습으로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전까지 모집이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이제는 노골적으로 강제징발로 대체되었다. 싸울 수 있는 자는 전장으로 징병되었고 일할 수 있는 자는 광산으로 징용되었고, 젊은 여성들마저 위안부로 만들어 전장으로 광산으로 보내면서 일본은 한반도 전쟁 수행을 위한 전면적 수탈체제로 편제했다. 일본제국주의의 광기로 한반도는 식민지를 넘어 캄캄한 암흑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때 항일운동 맥이 끊겨버린 것이었다. 멀리 유럽에서 독일이 강점한 프랑스, 네덜란드 덴마크, 유고 같은 나라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이 치열하게 전게되고 있을 때 한반도에서는 깊은 침묵으로 대응했다. 유일하게 항일투쟁을 지속한 사람들은 중국홍군에 속한 조선유격대 뿐이..
한국사10 러일전쟁 중에도 일본의 공사 하야시는 조선의 외부대신 이지용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해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조선으로부터 징발할 근거를 마련했다. 그리고 일본총리와 미국 대통령 특사와 밀약을 맺고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교차 승인해 주기로 약속했다. 한일의정서는 일본이 조선을 소유한다는 뜻이었고, 가쓰라데프트 밀약은 그 소유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이때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셈이다. 일본은 고종에게 회유와 협박을 가했고 여덟 명의 대신들 가운 다섯 명이 찬성함으로써 을사보호조약이 통과되었다. 을사오적은 고종을 포함시켜 을사육적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아버지에 휘둘리고 아내 치마폭에서 지내고 국가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자주국권을 수호하려는 애국단체를 탄압하는 행동을..
한국사 9 조선 왕국 초기 100년을 제외하면 조선의 사대부들은 늘 두 파로 나누어 싸워야 했다. 때로는 다른 왕위 계승권 자를 끼고서 다투었고 때로는 철학적 논쟁으로 갈라서기도 했고, 대외변화를 어떻게 볼 것이냐를 두고 싸우기도 했다. 국내의 문제를 서로 머리를 맞대고 대화로 해결하지 못하고 언제나 외부세력을 끌어들이는 것이 이 나라의 해결법이었다. 개화를 주장하고 집권한 민씨 정권은 대원군을 물리쳐준 청나라에 붙어 사대당의 주력이 되었다. 대원군이 역사를 거스르려 한 것도 문제지만 민씨 세력이 내부반란을 진압하기위해 청나라를 끌어들인 것은 더욱 큰 잘못이었다.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청은 조선에 통상조약을 강요했다. 조약문에 조선을 청의 속국이라고 정식으로 명문화되어 있었다. 수구로 돌아선 민씨 정권은 청의 그런 ..
한국사8 풍양조씨 우두머리인 조만영의 딸이므로 후대 조대비로 잘 알려진 신정왕후는 가문을 부활시키려 했다. 순정왕후가 장헌세자 서자인 은언군 후손에서 철종을 발견했다면, 조대비가 찾은 인물은 은언군의 동생인 은신군의 손자 이하응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흔이 넘은 나이였기 때문에 너무 늙은 나이다. 그에게 명복이란 열한살 짜리 둘째 아들이 있었다. 아들을 왕위를 올리려는 이하응과 조대비가 의기투합하여 조선이 26개 왕인 고종을 즉위하게 한다. 조대비가 수렴청정 하는 것으로 고종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몰락한 풍양조씨는 조대비 소망과 달리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권력은 이하응에게로 옮겨왔다. 대원군은 권좌에 오르자마자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조선 역사상 가장 주체적인 종교이념인 동학 출현했기 때문이다.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