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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세계사 (남경태)

동양사- 외부에서 온 인도의 통일

 

중국과 달리 인도의 역사는 통일 제국이 아니라 늘 분권화된 상태가 중심이었다. 과거분열은 기본적으로 인도 토착왕조들이나 인근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국가들이 새력 다툼을 벌인 결과이지만, 이번에는 서구 열강이라는 외세가 활개를 쳤던 것이다. 인도의 역사를 세계사에 합류시키는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외세였다. 무굴제국시대에도 남인도에는 유럽의 상인들이 새운 무역도시들이 번영을 누렸으나, 그때는 무굴의 힘이 강성했으므로 외세는 별다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무굴은 쇠약해졌고 유럽에서는 영국, 포르투갈, 에스파냐, 네덜란드의 뒤를 이어 영국과 프랑스가 중심세력으로 떠오르면서 본격적인 제국주의 시대가 출범했다. 18세기 중반까지 인도에서 진출한 영국과 프랑스는 함이 비슷했다. 인도 경영을 놓고 두 나라의 승부가 불가피했다. 두 나라는 10여년에 걸쳐 차례 접전을 벌였다.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 동인도회사의 로봇 클라이브가 이끄는 영국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카르나타카 전쟁에서는 수많은 인도인이 영국과 프랑스 양국에 고용되어 용병으로 참전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카르나타카와 하이데라바드를 돕는 것이 곧 자기 세력의 확장이었으므로, 전쟁의 일환으로 두 나라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남인도 대부분의 나라들도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에 의존하게 되었다. 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자 영국의 지원을 받은 나라들은 물론이고 프랑스 측에 붙은 나라들도 전부 영국의 괴뢰정권으로 전락해버렸다.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한 것은 30대 초반의 병참장교에 불과한 클라이브의 공적만이 아니었다. 벵골장군이었던 미르 자파르는 벵골의 태수자리를 노리고 영국을 적극 지원하였다.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자 자연히 미르 자파르는 벵골의 새 태수가 되었다. 그러나 벵골의 실제 새 주인은 영국이었다. 벵골은 이제 영국의 괴뢰정권이 아니라 아예 식민지가 되어버렸다. 벵골을 먹었다고 해도 동인도회사는 어디까지나 회사일 뿐이었다. 1773년 영국 의회는 정부가 인도 지배에 직접 나서는 노스 규제법(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에 두었던 식민지를 영국 정부가 직접 통치하도록 함)을 제정해 동인도회사로부터 인도 통치권을 박탈했다. 이때부터 인도 통치권은 영국정부로 귀속되었다. 어쨌든 동인도회사와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북인도는 통일을 이루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무굴제국이 쇠약해진 18세기 중반이후 분열상태에 빠진 북인도를 영국이 다시 통일해준 셈이다.

 

인도 전체를 통틀어 아직 영국의 지배를 받지 않은 최후의 세력을 꼽자면 마라타가 있다. 강력한 중심이 없었던 마라타는 영토가 늘어나면서 통일은커녕 오히려 분열되는 양상으로 치달았다. 정복전쟁에 참여한 지휘관들이 새로 병합한 지역의 독립군주처럼 행세하였다. 그들은 마라타 본국에는 적극 협조하였다. 마라타는 일종의 연합 형태가 되어 마라타 동맹이라 불리게 된다. 마라타와 영국 사이 완충역할을 한 것이 오우드다. 영국은 북사르 전투 이후 오우드를 정치적으로 지배하려 하지 않고 영국이 영향력 아래 놔두었던 것이다. 영국은 오우드는 정복하는 것보다 벵골의 내정을 안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굳이 오우드를 병합해 대내외적으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마라타동맹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하자 균형이 무너졌다. 1775년 마라타 권력 다툼에서 밀린 세력이 봄베이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드디어 전쟁이 시작되었다.

 

3대 벵골 총독인 웰즐리 때부터 영국은 본격적인 영토 확장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관심의 초점은 마라타였는데 이번에도 마라타 내분으로 실각한 세력이 영국의 보호를 요청하면서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마라타가 지원하는 핀다리라는 도적떼가 영국령까지 진출하자 1817년 영국은 이들의 소탕한다는 구실로 3차전을 일으켰다. 전쟁이 재개된 지 몇 개월 만에 마라타 동맹은 해체 되었다. 중부 인도전역의 모든 왕국은 멸망하거나 영국의 군사보호를 받는 식민지로 전락했고 독립국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로써 아프가니스탄의 세력권인 인더스 강 유역을 제외한 인도대륙 전체가 영국의 지배하에 들었다. 인도에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지 200여년 만에 영국은 드디어 인도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인도가 우리의 식민지 역사와 다른 점은 영국에서 부임해온 인도 총독들이 일본의 조선총독들에 비해 훨씬 우호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조선을 병합해 대륙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으려 한 데 비해, 영국은 인도에서 경제적 이득을 보는데 만족했기 때문이다.

 

벵골에서 정해진 행정의 기본방침은 영국이 인도 전역을 통일한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만 벵골제독은 인도총독으로 격상되었으며 각 지방마다 영국식 입법부와 사법부가 설치되었다. 이리하여 인도는 식민지지배를 받는 입장이기는 해도 서서히 근대국가의 기틀을 갖추어갔다. 영국화가 자연스럽게 추진되었다. 인도인들은 사고와 행동방식에서 영국인처럼 변했고 영국의 자유주의 사상을 동경하게 되었다. 영국은 인도를 정신적으로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근대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수천년 동안 끊임없이 지속된 분열기, 그리고 분열기마다 되풀이 된 전란과 약탈은 사라졌고 국내의 치안과 질서도 안정되었다.

 

인도는 역사적으로 통일기보다 분열기가 압도적으로 길고 많았다. 중국의 역사에서는 분열이 비정상적이었으나 인도의 역사에서는 통일이 오히려 비정상이었다. 3500여 년 전에 인도로 들어온 아리아 인, 2000년 전의 쿠산족, 11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인도를 장악한 델리 술탄, 아프가니스탄과 터키의 이슬람세력, 그리고 무굴제국에 이르기까지 인도를 지배했던 역대 왕조들은 대부분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민족들이었다. 인도의 역사는 중앙아시아의 수많은 민족이 번갈아 주인공으로 출연한 변화무쌍한 이민족의 드라마였다. 그 과정에서 인도 모습은 힌두교라는 종교만 남았다. 통일된 중심이 없으므로 인도에서 분열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영국의 지배가 순조로이 먹혀든 것이었다. 인도는 오랫동안 이민족의 침탈을 겪었으나 서양세력의 지배는 처음이었다. 서방의 이민족은 새로운 경험이었지만 어차피 인도의 역사는 이민족을 수용하는 역사였다. 강력한 중심을 향해 주변세력이 결집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약소왕국들이 동인도회사에 접근했고, 자신들 간의 내분에도 영국을 끌어들인 것이다. 영국은 단지 과거 인도 역사에 등장했던 큰 제국들이 수행한 역할을 했을 뿐이며, 당시 인도인들로서도 거의 그렇게 받아들었다.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공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중대한 상태였다. 이 무렵 인도는 식민지의 1단계와 2단계를 거쳐 3단계인 자본주의적 시장으로서 역할하게 되었다. 근대화의 그늘이 깊어지면서 비로소 인도에도 근대적인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어쩌면 영국이 인도에 베푼 가장 큰 공헌은 근대화의 빛이 아니라 그늘에서 자란 민족의식일 것이다. 그로인해 19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반란이 잦아졌다. 그 정점은 1857년에 터진 세포이의 반란이다. 세포이란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기 위해 고용한 인도인 용병을 가리키는 말인데 벵골군의 절반가량이나 차지했다. 세포이들은 그때까지 명맥이 붙어있던 무굴제국의 황제를 내세우고 제국의 부활을 선언했다. 상징에 불과한 무굴황제가 세력결집의 실제 우두머리가 될 수는 없었다. 반란이 일어난 후 1년간 세포이들은 영국군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제법 세력을 떨쳤으나, 그 뒤로부터 지리멸렬한 끝에 진압되고 말았다. 세포이 반란을 계기로 영국은 말썽이었던 동인도회사를 없애고 인도를 직접 지배하기 시작했다. 세포이 반란으로 싹튼 민족의식의 불씨는 괴뢰제국을 세운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영국군의 대량학살과 잔혹행위는 인도인들이 마음속에 씻을 수 없는 증오의 씨앗을 남겼다.

 

1903년 영국은 행정을 개선한다는 명복으로 벵골을 동 과 서의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서벵골은 캘커타가 중심이고 동벵골은 아삼지방, 그러니까 지금의 방글라데시가 중심이었다. 서벵골은 힌두교권이었고 동벵골은 이슬람교권이었다는 점을 알면 영국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영국은 종교를 핑계로 벵골을 분리함으로써, 인도인의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고 분쇄하겠다는 의도였다. 인도인들은 이미 인도국민회의라는 민족적단체를 결성한 터였다. 국민회의는 1885년에 영국의 관변단체로 출범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민족운동을 이끄는 조직으로 변모했다. 벵골분리계획은 즉각 국민회의를 비롯한 인도인 전체의 국민적 반발을 샀다. 인도인들은 스와데시운동을 맞섰다. 국산품을 애용하고 영국 상품을 배척하는 운동이었다. 영국은 국왕 조지5세가 인도를 방문한 자리에서 벵골분리계획을 정식을 취소함으로써 사태를 무마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전쟁이 터지자 영국은 인도에 지원과 지지를 요청했다. 영국이 제시한 대가는 인도의 자치였다. 종전 직후인 1919년에 공포된 인도통치법에는 도저히 자치라고 부를서 없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영국은 납세자만이 선거권을 가진다는 원리를 악용해 인도인의 10%만 참정권을 허용한 것이다.

 

1920년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는 영국에 대해 대대적인 불복종운동을 선언했다. 흔히 비폭력운동이라 알려져 있어 마치 소극적인 저항처럼 여겨지지만, 실상 이 운동은 영국의 법률을 준수하지 말고 납세마저도 거부하자는 적극적인 운동이다. 인도인의 저항은 종교를 넘어선 거국적인 규모였던 것이다. 오히려 이슬람세력과 간디는 그 일을 계기로 서로 협력을 취하기로 약속했는데 이것이 힐라파트 운동이다. 인도판 국공합작이라고 할만한 힐라파트 운동이 끝까지 지속되었다면 파키스탄은 없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 중국의 국공합작을 가로막은 불리할 때는 쉽게 단결하지만, 유리할 때는 쉽게 분열하는 현상은 인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37년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국민회의는 혼자만의 힘으로 단독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이슬람과의 합작을 거부해버렸다. 힐라파트 운동에서 힌두세력이 배신했다면 이번에는 이슬람세력이 배신할 차례다. 이슬람연맹 지도자는 파키스탄이라는 새 국가를 수립하고 영국에 파키스탄을 승인해준다면 협조하겠다고 제안했다. 영국으로서는 인도의 독립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 인도로서는 파키스탄의 분리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1944년 간디는 이슬람연방 지도자 진나와 회담을 갖고 독립이 먼저라고 주장했으나, 진나는 분리가 먼저라고 맞섰다. 협상이 결렬되면서 국민회의에서 간디의 영향력은 현저하게 줄었고, 새 지도자 네루는 분리에 천성하는 입장을 취했다. 1947815일 독립을 쟁취했다. 독립과 동시에 파키스탄이 분리되어 나갔다. 1948년 인도 통일의 마지막 보루였던 간디가 암살됨으로써 인도와 파키스탄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종교의 자유가 완전히 허용된 사회에서 오히려 종교를 편협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종교가 단순히 신앙이라기보다 생활방식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도 많다. 수천 년에 달하는 역사를 통해 그 점을 증명해주는 나라가 인도다. 고대 인도에는 아소카와 카니슈카 등 불교를 기반으로 통치한 군주들이 많았고 중세에는 외래 종교인 이슬람교의 지배를 받았으며, 영국의 식민지배가 끝난 뒤에는 결국 종교 때문에 파키스탄이 분리되었다. 인도에서 종교는 정치나 경제보다 중요한 역사적 요소라고 볼 수 있다. 힌두교는 사실 하나의 종교가 아니다. 힌두라는 말은 산스크리스트어로 신두(큰 강, 인더스강)에서 나왔는데 인도 자체를 의미한다. 힌두교는 인도의 종교라는 의미다. 인도인이 가진 거의 모든 종교라는 의미다. 불교나 자이나교 등이 힌두교에서 갈라져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힌두교는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와 달리 강력한 교리도 없고 위계적인 교회조직도 없다. 수억 명이 가진 세계적인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포교적 성격도 없으며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도 않는다. 힌두교는 종교라기보다 관습이나 생활방식 인도의 전통과 역사, 문화다. 힌두교는 인도의 종교를 넘어 인도의 사고방식이다. 인도에서 종교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인도는 몇 가지 요소로 환원할 수 없는 나라다. 국토면적이 한반도 15배에 가깝고 인구는 중국에 이어 세계 2위인 12억 명에 달한다. 인도는 하나의 나라라기보다 하나의 문명권이며 다양한 요소가 공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