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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세계사 (남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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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7 정조가 죽자 규장각은 본래 기능인 도서관을 돌아갔고 장용영도 해체되었다. 그보다 더 명백한 과거로의 회귀는 노론 벽파가 권력의 일선에 등장한 것이다. 벽파가 권좌에 복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나 인물이 영조계비 정순왕후이다. 정조의 열 살짜리 둘째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으며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맡게 된다. 시파 인물을 숙청하고 노론의 세상을 만들었다. 그들은 조정에 남아있는 시파 등의 세력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전국이 그리스도교를 색출해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린다. 그렇게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집권사대부들은 사상 처음으로 당쟁에서 벗어나 단일한 색깔을 띠게 되었다. 그렇게 최후에 남은 사대부 세력은 결국 성리학적 이념의 농도가 짙은 노론의 일색이었다. 이것은 한반도에 내려진 저주였다. 이상적인 사대부체..
한국사6 영조는 왕세자 시절 자신이 겪은 경험과 중종이래로 200여 년간 역사를 바탕으로 사대부 정치폐해를 익히 알고 있었다. 왕국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왕당파를 육성하는 길이다. 하지만 그것은 측권들이 훈구파를 형성해 권세를 휘두르는 폐해를 가져왔다. 다른 방법은 측근을 키우지 않으면서 당쟁을 막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대부들의 당파를 현실적으로 인정해 주되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영조의 탕평책은 여기서 나왔다. 오늘날 양당 중심의 대통령제와 닮아있다. 영조의 치세에 서로 대립하는 두 당파는 노론과 소론이었다. 이들 간의 세력균형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인사를 고르게 하면 된다. 영조의 즉위를 가장 반대한 세력은 소론이었다. 영조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탕평책 덕분이었다..
한국사 5 동북아시아의 패자는 중화세계에서 비중화세계로 바뀌고 있었다. 삼국시대에 겪은 침략은 중국의 한족 왕조가 한반도를 공략해 중화세계로 끌어들이는 과정이었다. 이것이 성공하면 한반도는 중화세계로 편입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거란의 침략을 당하고 중기에 여진 금을 사대하고, 후기에 몽골 속국이 되는 것이 그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화세계의 일원이 되고자 노력했다. 조선은 유교왕국을 지향했으므로 때 마침 부활한 명과 죽이 맞았다. 하지만 시대적 조류는 중화세계가 질서의 중심축이 되가 어려운 방향을 가고 있었다. 만주족 왕조가 대륙을 정복한 상황으로 볼 때 조선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명백했다. 그러나 조선이 사대부들이 택한 노선은 시대적 요구와 정반대였다. 그들은 중화질서가 깨졌다는 사실에 분개할 따름이었다..
한국사 4 영원히 지속될 줄 알았던 윤원형의 권세는 문정왕후가 죽으면서 끝났다. 권신들도 죽고 왕도 죽자 오랜만에 사림파는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장성한 왕족을 국왕으로 옹립하는 것은 사대부들에게 불안의 요소였다. 국왕을 자신들의 손으로 정할 수 있었으니 왕권을 강화할 생각은 없었다. 반정으로 왕이 교체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골치 아픈 공신세력도 없었다. 그들이 꿈 꾸어온 유교정치를 화려하게 펼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정치 이데올로기로 괜찮지만 철학적 수준으로 보잘 것 없는 성리학이 다소 업그레이드된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다. 국왕을 선택할 만큼 권력을 확고히 장악했고 숙적인 훈구파와 외척도 사라졌다. 그렇다면 사대부들간의 권력다툼은 없어져야 할 것이다. 실제로 역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권력의 정점..
한국사 3 반정이라는 이름의 쿠데타로 즉위한 왕답게 중종의 치세는 대대적인 개혁의 바람으로 출발했다. 태종과 세조도 그랬듯이 정변으로 즉위한 왕은 개혁의 기치를 높이 치세우기 마련이다. 그러나 중중의 경우는 달랐다. 국왕의 임명권자가 사대부인 만큼 왕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중종은 형과 달리 성품이 유약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니 사대부의 입맛에 꼭 맞는 군주였다. 이로써 또다시 공신이 생겨났는데 이 추세라면 얼마 안가 반정공신들이 종래의 훈구파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게 뻔하다. 세조 집권 과정에서도 그랬듯이 비정통적인 왕위계승이 있을 때는 새로운 공신세력이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따라서 새로운 비기득권층 사대부 세력이 생겨나 대립하는 것도 필연이다. 이것이 나중에 당쟁의 뿌리가 된다. 만일 정상적인 욍..
한국사2 이성계는 조선의 건국이 최종목표였지만 정도전은 그렇지 않았다. 이성계가 조선의 시공자라면 정도전은 건축가다. 이성계는 건물이 다 올리는 것에 만족하지만, 정도전은 실내장식이 끝나야 완공으로 보았다. 건국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개국공신,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들이었다. 그들은 새 왕조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사대부 국가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유교왕국이다. 유교왕국은 국왕이 상징적으로 존재로 군림하고 사데부가 실제 정치와 행정을 담당하는 체제다. 피라미드 정점에 있는 국왕의 권위가 언제까지나 권력이 바꾸지 않은 채 사대부들이 원하는 것처럼 상징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가능할까? 그래서 유교왕국은 이상적 왕국일 뿐이다.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앙권력의 불안정에 시달렸다. ..
한국사 1 우리 역사만이 아니라 동양사 전체에서 지성이란 유학이다. 중국에서 주나라가 탄생한 기원전 12세기에 유학의 초보이념인 禮가 생겨났고 여기에 공자의 仁의 개념이 보태 유학이 성립되었다. 예는 조상에게 제사에서 나온 개념이고 인은 국가 경영원리이므로 유학은 종교와 정치가 합일된 개념이다. 동양사회가 제정祭政일치적이고 정치적 지향이 강한 역사를 전개해온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이처럼 지배 이데올로기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동양의 역사와 우리 역사는 유학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유학이라고 하면 동양철학의 한 분야로 여기지만 수천년 동안 유학은 우리 사회의 정치와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강력한 이데올러기이자 생활윤리였으며, 학문적으로 단지 철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문 일반을 가리키는 의미였다. 특히 유..
한국사-요약 요약 고조선은 우리 역사의 시작이다. 역사라기보다 신화라고 해야겠지만 5천년전쯤에 단군이라는 외래집단이 한반도 원주민을 복속시키고, 고조선을 세우면서 우리 역사의 문이 열린다. 이후 2천년동안 한반도 문명권은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거쳐 조금씩 신화에서 탈피하는 한편 중국사와의 접촉을 계기로 알려진 역사가 시작된다. 중화문명권의 변방으로 출발한 한반도는 중국 한漢의 힘이 약해지는 시기를 맞아 도약의 기회를 만난다. 그것이 삼국 시대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문명의 빛은 밝은데서 어두운 데로 퍼진다. 중국과 가까운 고구려는 가장 먼저 중국의 문명을 전해 받아 고대국가 기틀을 다진다. 때마침 중국이 분열기로 접어들면서 중국의 정치적 지배에서 벗어난 고구려는 북조의 왕조들로부터 랴오둥의 소유권을 인정받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