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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세계사 (남경태)

동양사-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4

191211일 쑨원은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쑨원은 임시 대총통을 맡았다. 청조정에서는 위안스카이에게 사태해결을 맡겼다. 쑨원은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자리를 양보하겠다고 제의했다. 위안스카이 압력으로 어린황제 선통제는 4년만에 퇴위했다. 그가 마지막 황제 푸이다. 청제국은 297년의 사직을 끝으로 멸망했으며 동시에 진시황이 대륙을 통일한 이래 2133년 동안 지속된 중국의 제국시대도 종말을 고했다. 쑨원과 위안스카이는 우리 현대사에서 김구와 이승만 관계를 연상시킨다. 쑨원은 권력을 장악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때 마다 분쟁을 피하기 위해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했다. 위안스카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재나 제정 복고를 꾀했다.

 

시행착오를 거듭한 중국의 근대화 노력은 결국 공화정 체제로 개혁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결론으로 모아졌다. 외세침략이라는 바깥요인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무능과 부패에도 큰 책임이 있었다. 서구의 공화정 역사는 로마시대까지 무려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며 영국의 의회주의만 해도 700년의 역사에 이른다. 근대 서구 공화정만 해도 수백년 동안 중세와 절대주의 거쳐 완성되었고, 그 과정에서 무수한 혁명과 전쟁을 치렀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였다. 공화정을 제대로 하려면 공화정을 할 정치세력이 필요하지만 중국 역사에서는그 정치세력이 성장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꾸준히 세력을 키우면서 각 지방에서 활거하고 있던 군벌과 관료출신 어중이 떠중이가 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 정당을 조직했다. 상당수는 여당인 공화당을 결성하고 위안스카이지지 세력이 되었으며, 난징세력도 야당인 국민당을 창당했다.

 

국민당은 1913년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위안스카이는 독제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열강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 차관을 얻었다. 그는 반대하는 국민당 의원들을 파면하고 끝내는 국민당을 해산시켜버렸다. 다수당이 없어졌으니 국회 기능이 정지된 것이다. 그는 국민대표회의라는 기구를 만들어 공화제와 입헌군주제를 놓고 투표하게 했다. 투표 결과 전원 입헌군주제 찬성이었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쑨원은 타도 위안스카이를 부르짖으며 군사를 일으켰다. 위안스카이는 황제즉위를 강행하려 했으나 심복 부하마저 반대하자 포기하고 얼마 후 병사로 죽었다, 독재자가 죽으면 분열기가 온다. 위안스카이가 죽자 그의 지배 아래 있던 북양군벌들은 일제히 각지에서 독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들은 세력 확장을 위해 각 방면으로 열강과 결탁하고 있었으니 제국주의 하수인이자 매국노였다. 군벌들은 서로 무력을 동원해 치고받으며 정권을 주고받는 무정부상태를 연출했다. 강북에는 북양군벌들이 중심이 된 베이징 정부, 강남에는 서남 군벌들이 중심이 된 난징정부가 들어섰다. 이 기묘한 남북조의 분열기를 맞아 바야흐로 중국은 혼돈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10월 러시아에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터졌다. 유럽 최후의 전제군주국이었던 러시아가 볼세비키혁명으로 타도된 것이다. 러시아는 인류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회주의공화국이 들어섰다. 제국주의 침탈로 인해 식민지, 반식민지 상태에서 신음하던 세계 각지의 피억압 민중에게 그 소식은 해방의 빛줄기였다. 1919년 소련은 반제국주의 운동을 담당하는 국제기구로서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을 조직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제정러시아가 그전까지 중국에서 얻어냈던 모든 이권을 조건 없이 포기하고 중국민중에게 반환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 지식인들은 소련의 이 같은 조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차 세계대전에서 중국은 군벌들의 주장에 따라 연합국 측으로 참전해 승전국 협상 테이블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했다. 패전국 독일이 중국내 가지고 있던 각종 이권은 당연히 반환되어야 했다. 하지만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에서 중국의 요구는 묵살되었다. 독일 가진 중국에 대한 권리를 일본이 승계하고 나아가 만주지역 개발권까지 차지했다. 중국민중이 191954일 강력한 반일 대중운동을 벌였다. 러시아혁명과 중국민중의 지지로 중국에서 전혀 새로운 정치 세력인 공산당이 탄생했다. 당시 마오쩌 둥도 있었다.

 

코민테른은 쑨원과도 접촉해 혁명당과 혁명군을 조직하라고 권고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19241차국공합작을 이루었다. 그러나 노선과 이념이 크게 다른 두 세력이 하나의 조직에 속해 있다는 것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쑨원을 구심점으로 합작에 충실했다. 남북으로 분열된 상태에서 광동의 국민당 정부로서는 무엇보다 북벌이 최우선과제였던 것이다. 중국혁명의 아버지라고 추앙받던 쑨원이 사망했다. 양측을 조정하고 중재하던 지도자가 없어지자 국민당 내에서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더욱 노골화 되었다. 장제스는 스승인 쑨원의 명으로 소련에 군사유학도 갔다 왔지만 타고난 반공주의자였다. 권력획득에 혈안이 되었던 장제스는 공산주의 이념을 혐오하기보다 공산당과 권력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일본 5개국이 공동성명을 통해 공산당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자 장제스는 날개를 달았다.

 

공산당이 당을 떠나자 장제스는 국민당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그는 중국북부를 지배했던 북양군을 무찌르고 베이징을 점령했다. 통일을 이룬 장제스는 새 중앙정부를 수립했다. 난징을 수도로 했기 때문에 난징정부라 부른다. 지하로 들어간 공산당은 정부의 노골적인 탄압을 받았다. 당중앙에서 쫓겨난 참담한 신세로 마오쩌뚱은 1000명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징강산으로 들어갔다. 마오쩌둥은 징강산에 장시 소비에트를 건설하고 사회주의 토지역명을 실시했다. 모든 토지를 몰수한 다음 농민 가족 수에 따라 재분배 한 것이다.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따라 소비하는 공산주의 원칙의 구현이었다. 중요한 것은 중국혁명의 주력군이 될 홍군을 창설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 이론과 중국적 현 상황이 다른 만큼 공산당의 노선도 두 가지였다. 처음에는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아 공산당이 탄생했으나 중국의 현실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촌을 근거지로 삼은 마오쩌둥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인 이이싼 李立三이 이끄는 당 지도부에 불만을 품었다. 1931년 제1차 전국공농병대표회의에서 마오쩌둥은 공산당 주석자리에 올랐다. 홍군에 위협을 느낀 장제스는 공산당을 토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대대적인 공산당 토벌이 전개되었다. 정부군의 공격이 계속될수록 홍군은 병력과 무기가 증가했다. 홍군은 정부군과 전면전을 피하고 기습적인 작전으로 적의 무기를 노획하고 투항자를 받아 홍군에 받아들였다. 장제스는 단숨에 홍군을 섬멸해버리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경제를 봉쇄하는 조치를 내렸다. 겨울을 눈앞에 둔 마오쩌둥은 근거지를 버리고 탈출했다. 86000명의 홍군은 포위망을 뚫고 대장정에 나섰다. 온갖 역경을 헤치면서 홍군은 더욱 정예화 되고 사기가 높아졌으며 장정 중 곳곳에 혁명의 씨앗을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