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횡무진세계사 (남경태)

동양사- 한결 같이 도발하는 일본1

 

 

100년에 걸친 센고쿠 시대를 끝낸 오다 노부나가는 장수로서의 용맹과 정치지도자로서의 지략이 두루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 자신도 센고쿠 시대를 특징지은 하극상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노부나가의 죽음에 기민하게 대처해 사태를 진정시킨 당시의 합수부장 히데요시는 비상태책회의를 열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2살짜리 손자를 후계자로 내세우면서 자연스럽게 권력을 장악했다. 히데요시는 소년시절부터 노부나가 밑에서 마구간 일부터 시작했다. 12세기 바쿠후 시대를 처음으로 연 미나모토 요리모토는 전통의 귀족인 후지와라 가문휘하의 무사집안이었고, 노부나가 역시 센고쿠 다이묘 출신이었다. 히데요시는 시코쿠와 규슈의 유력가문을 평정하고 1590년 마침내 꿈에 그리던 전국 통일을 달성했다. 3년 뒤에 홋카이도마저 복속시켜 처음으로 오늘날의 일본 영토를 조성했다.

 

20년 동안 노부나가를 보좌하면서 빛나는 전공을 세운 이에야스는 사실 어느 면으로 보나 히데요시에게 꿀릴게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그는 1584년 히데요시와 벌인 전투에서 형세를 유리하게 이끌고서도 강화를 맺었다. 히데요시는 하극상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백성들에게서 무기를 압수하고 무장을 금지했다. 히데요시의 통일로 일본은 사상 처음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제국이 되었다. 고대 율령국가도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나 국가라기보다 권력구조에 불과할뿐더러 일본 전역을 지배한 것도 아니었다. 바쿠후정권도 마찬가지였다. 히데요시의 일본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중앙집권제국이라 할 수 있다. 천황이라는 상징적 권위는 여전히 남아있었으나 사실상 히데요시는 일본 황제였다. 정치체제를 중심으로 볼 때 동서양의 역사는 대체로 다음 단계를 거친다. 도시국가( 일본 야마토 정권)- 고대 전제국가( 일본 고대 천황제)- 중세적 봉건제 국가(일본의 귀족 지배체제)- 근대적 전제국가(일본 바쿠후와 근대 천황제) 어느 나라 역사든 고대 전제 군주시대를 거친 다음 한 바퀴 돌고 나서 다시 전제군주제시대가 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히데요시 집권은 근대적 전제 체제의 완성에 해당한다. 일본 천하의 통일로 기고만장해진 히데요시는 또하나의 천하인 중국의 명제국을 넘겨보았다. 오랜 전란이 끝난 직후이므로 아직 군대의 사기가 드높고 군비도 충실하다. 할 일이 없어진 무사들의 심정을 헤아려주지 않으면 무슨 일이라도 날판이다. 무사집단이 주체가 되어 추진한 구제화의 결론은 대외전쟁이었다.

 

1592413일 새벽 일본은 16만명의 대군으로 조선침략을 개시했다. 개전 초기 일본군은 승승장구 하면서 부산에 상륙한 지 한 달이 채 못 되어 한성을 점령했다. 육지에서 연전연승하던 일본군은 바다에 나타난 의외의 강적에게 연전연패하면서 크게 기세가 꺾여다. 이순신의 등장이다. 육지에서는 조선관군이 하지 못한 몫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 대신했다. 전쟁의 당사자가 되어야 할 중국이 참전한 것은 이렇게 전황을 어느 정도 복구해 놓은 다음이다. 이여송이 4만 명의 병력을 주어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이후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강화교섭이 진행되기 시작한다. 히데요시가 강화조약 조건으로 제시한 것을 보면 도무지 강화하자는 의도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명의 황녀를 일본 천황비로 달라, 감합무역을 허용해라. 조선8도중 4도를 일본에 할양하라. 조선 왕족을 인질로 달라. 또 다시 전쟁이 재개될 것을 겁낸 중국 측 협상자 심유경의 대응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협상을 마친 심유경은 명조정에 히데요시가 자신을 일본 왕으로 책봉해줄 것과 중국에 조공을 바칠 테니 허락해 달라고 요구를 했다고 보고한다. 명은 전쟁을 피하려 했지만 그게 오히려 전쟁을 불렀다. 명의 일개 무관에 불과한 심유경의 어처구니없는 농간 때문에 조선은 정유재란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명의 지원군 출동했고 조선관군도 전열을 가다듬어 적극 대처했으며 이순신도 건재했다. 결국 히데요시가 병사하자 일본군은 철수했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를 섬기면서 무려 40년 동안이나 2인자의 역할을 고수한 이에야스에게 기회가 왔다. 그는 은밀하게 독재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 심복 이시다 미쓰나리는 이에야스를 제거하려 했다. 전국의 다이묘들은 일제히 이에야스의 동군과 미쓰나리의 서군으로 나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승리를 거두고 일인자의 자리에 올랐다. 1603년 그는 교토의 천황에게서 모든 무장이 동경하는 세이이다이쇼군을 제수 받았다. 센고쿠 시대 이래로 맥이 끊겼던 쇼군이 부활했으니 바쿠후도 부활했다. 이것이 일본의 마지막 바쿠후 이에야스의 에도 바쿠후다. 에도 바쿠후 시대 전국이 통일되었다. 예전 바쿠후들이 전제 권력을 행사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던 교토천황과 전통적인 귀족세력은 에도시대에서는 상징적 지위만 남았다. 바쿠후가 사실상 일본 황실이 되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정치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을 유지했으면서도 드넓은 중국대륙을 수비하기 위해 군사적인 면에서는 지방분권을 실시했다. 그것이 당의 번진이며 명, 청의 번국이었다. 번국들이 강성해져 중앙정부를 위협하는 일도 있었지만, 국경수비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제도였다. 번국을 거느렸기 때문에 제국이라고 불릴 수 있었다. 일본도 작은 제국체제를 취했다. 중국이 경우는 북방 이민족이라는 대외 적을 수비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일본은 변방의 다이묘와 유력가문이라는 적을 수비한다는 점이 달랐다. 다이묘를 정기적으로 불러들이고 그들의 처자를 인질처럼 에도에 거주시켜 변방을 제어하는 방식이었는데, 이것이 점차 제도화되면서 에도 바쿠후는 변방에 번을 설치했다. 이 번들은 지방 수비는 물론 행정까지 담당했다. 이것이 바쿠한 체제였다. 중앙집권과 동시에 지방분권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에도시대 일본 천황은 춘추시대 주나라 왕실에 비교할 수 있다. 동천이후 주나라 왕은 실권도 없고 이름만 왕에 불과했다. 강성한 제후국들은 주나라는 멸망시키지 않고 상징적인 권위를 인정했다. 에도 시대 천황도 직할지 외에는 별다른 영토도 실권도 가지지 못했지만 에도 바쿠후는 천황의 상징을 무시하지 않았다.

 

중국이 수비형 제국이라면 히데요시의 야망에서 보았듯이 일본은 기회가 닿으면 밖으로 눈을 돌리는 공격형 제국이다. 어느 바쿠후보다도 경제에 관심이 많았던 에도 바쿠후는 노부나가 시절부터 맛들이기 시작한 해외무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다만 조선은 쓰시마 島主가 사적으로 무역선을 부산에 보냈을 뿐 조선의 상선이 일본에 오는 일은 없었다. 당시 조선은 중국을 사대로 받들고 여진과 일본을 교란으로 무마한다는 이른바 사대교린무역이 행해졌는데, 사실상 일본이 통일하면서 일본과의 관계도 교린이 아니었다. 민간무역은 금지되었지만 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의 동남아시아 진출도 크게 늘어났다.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대만과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섬들 그리고 월남과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등 인도차이나 반도 일대에는 많은 일본인 자치구역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바쿠후는 황금알을 낳아주던 해외무역을 스스로의 손으로 금지하게 된다. 그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교 때문이었다.

 

중국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종교개혁이후 유럽에서 세력이 크게 위축된 구교의 선교사들은 먼 동방에서 활로를 찾고 있었다. 백성들은 물론 다이묘나 무사들에게서도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생겨나고 늘어났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바로 해외무역의 활성화였다. 처음에는 무역의 매력에 이끌려 그리스도교를 관대하게 봐주던 이에야스는 측근 중에 신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위험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는 죽기 전에 그리스도교 금지령을 내렸는데 그의 사후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1639년부터 바쿠후는 쇄국을 공식정책으로 채택하고 모든 서양인의 출입을 금지했다. 네덜란드만는 제한적으로 무역을 계속할 수 있었다. 센고쿠 시대를 끝으로 일본은 다시 전란으로 얼룩지는 사태 없이 300년에 가까운 번영과 평화의 시대를 누리게 된다. 이 기간에 일본은 쇄국으로 일관했다.

 

바쿠후라는 전국적 중심과 번이라는 지역적인 중심이 생기면서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근대적인 의미의 도시는 센고쿠 시대 초기부터 생겨났지만, 당시 상업과 무역을 중심으로 한 자유도시 성격이었던 데 비해, 바쿠후 체제 도시는 사회적 분업과 상품경제의 발달을 바탕으로 하는 전형적인 소비도시였다. 서양의 봉건제가 무너지면서 상겨난 신흥 시민계급이 사회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하면서 자본주의의 발생과 발전에 큰 몫을 담당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바쿠후라는 강력한 권력의 중심체가 지배하는 가운데 도시가 발달했기 때문에 사정이 크게 달랐다. 바쿠후 자체가 봉건제의 주체였으므로 반란 같은 사건을 통하지 않고서는 서양에서처럼 봉건제가 자연스럽게 붕괴하기 어려웠고, 시민들이 곧 무사였으므로 사회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어려웠다. 대내적 안정과 대외적 쇄국이 지속되면서 에도 바쿠후도 초기와 같은 강력한 경제 주체 노릇을 계속하기 어려웠다. 바쿠후 일을 대신해주면서 바쿠후와 거래로 재산을 쌓는 상인들이 생겨났다. 상인들 등장으로 바쿠후의 재정은 악화되었다. 번은 농민들에게 그 부담을 전가했다. 17세기 중반부터 농민들은 전국각지에서 대대적 폭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위기에서 1716년 요시무네가 8대 쇼군에 올랐다. 그는 쓸데없는 행사비용 같은 것을 과감히 줄여 바쿠후 재정의 거품을 뺐다. 그리고 사상을 통제했다. 모든 학문과 출판에서 이단적인 것, 외설적인 것을 금지한다. 진취적인 것을 거부하고 낡은 전통에만 집착하는 수구적인 자세였다. 결국 위기를 타파하기위해 단행된 요시무네의 개혁은 정신적으로 보수와 수구를 강조하고 경제적으로는 하층 농민들을 억압하는데 그쳤으므로 오히려 위기의 악화를 초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