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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세계사 (남경태)

동양사-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5

장제스가 토벌에 여념 없던 1931년에 일본의 관동군이 만주의 중국군을 기습했다. 9.18사건이 만주사변의 시작이었다. 청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서구열강이 상대적으로 소홀한 만주를 중점적으로 개발했다. 1932년 만주를 손에 넣은 일본은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웠다. 한창 뻗어가던 일본경제는 1929년 대공황으로 제동이 걸렸다. 당시 만주는 청년군벌 장쉐량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관동군은 손쉽게 만주전체를 장악했다.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에게 적은 공산당과 일본이었다. 장제스는 먼저 국내를 안정시킨 뒤 외세를 몰아낸다는 것을 기본노선으로 삼았다. 일차 목표는 공산당과 홍군이었다. 장쉐량도 일본에 저항하지 않았다.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해 항일운동 중심지인 상하이를 공격했다. 장제스는 공산당만 공격했다. 그는 일본과 탕구정전협정을 맺고 일본의 만주점령을 사실상 양해했다.

 

국민당과 달리 공산당은 항일을 최우선으로 들고 나왔다. 봉건지주층을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과 이념적으로 다르고 피착취계급을 대변한다는 명분으로도 당연히 항일에 몰두해야만 했다. 대장정 중이던 193581일 마오쩌둥은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구국에 매진하자고 외쳤다. 국민당 지도부도 거국적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전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장제스은 혼자였다. 19365월 장쉐량은 공산당과 항일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장제스는 장쉐량에 압력을 가하고 내전을 독려하기 위해 시안에 왔다. 하지만 장쉐량은 장제스를 체포했다. 이 쿠데타를 시안사건이라고 한다. 장제스를 살리는 게 통일전선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장쉐량은 장제스를 설득하여 국민당과 공산당은 결별한지 9년만에 2차국공합작을 이루었다.

 

193777일 베이징 외곽에서 일본군과 중국군의 충돌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7.7사건이라고 한다. 16세기 임진왜란, 19세기 청일전쟁에 이어 일본은 또다시 중국과 3차전을 벌였다. 일본은 낙관했으나 국공의 합작으로 강력한 대일항전에 나섰다. 전쟁 개시 5개월만에 간신히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그 분풀이로 30만 명의 양민을 학살하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잔인한 난징대학살을 일으켰다. 일본군의 병력으로 베이징에서 광저우까지 남북으로 무려 2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중국 동해안 일대를 통제하기란 불가능했다. 일본은 장기태세를 취해야 했다. 그리고 베이징과 몽골, 상하이, 난징 등 주요 점령지마다 괴뢰정권을 세웠다. 장제스는 비록 상황에 밀려 어쩔 수 없이 합작을 하게 되었지만 공산당 근절이라는 신념은 결코 굽히지 않아다. 전선의 교착이 길어지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불화의 골은 깊어져만 갔다. 장제스는 8만 명의 군대를 동원해 홍군을 습격했다. 완난사변으로 2차국공합작은 사실상 결렬되었다. 중국을 점령하는 게 여의치 않자 일본은 19409월 유럽의 독일, 이탈리아와 3국 군사동맹을 맺었다. 그러자 일본이 에너지를 의존했던 미국이 석유수출을 중단해버렸다. 일본은 중국에서 기수를 돌려 동남아시아를 먼저 정복하기로 했다. 여기서 등장한 게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구호이다. 모든 아시아를 일본 지배하에 두겠다는 것이다. 1941년 일본은 미국에 본 떼를 보이기 위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일본과 싸우는 중국은 자연히 연합국의 반파시즘 국제통일전선 일부가 되었고, 중일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가 되었다. 그 덕분에 중국은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연합국 측의 직접적인 군사원조를 받기 시작했다. 미국의 주선으로 중국이 연합국 4대강국에 포함되어 장제스 194312월 카이로 선언에서 루스벨트, 처칠과 함께 하는 영광을 누렸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길고 긴 전쟁이 끝났다. 종전 일주일 전에 참전을 선언하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만주로 들어온 소련군이 일본군에게서 압수한 무기와 장비를 홍군에게 넘겨주었다. 전쟁 중에도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전쟁 이후를 준비하는 방식은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마오쩌둥은 곳곳에 해방구를 건설하면서 후방의 농촌지역을 장악하는데 주력한 반면, 장제스는 휘하의 군 조직을 철저히 유지하면서 서구 열강과의 외교에 주력했다. 그 결과 미국으로부터 국민당 정부를 지원한다는 확고한 약속을 얻어냈다.

 

공산당은 장제스의 계획과 상관없이 제 갈 길을 갔다. 농민들을 사회주의 이념을 이끌고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토지혁명을 활발히 전개했다. 19466월 장제스는 공산당의 근거지인 해방구들의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이 그랬듯이 점령지마다 장제스 특유의 독재와 억압으로 일관하는 바람에 지역 민중의 지지를 전혀 얻지 못했다. 홍군은 점령지마다 농민을 고무하고 입대시켜 병력이 증가했다. 마오쩌둥은 홍군을 인민해방군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1949101일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19494월 인민해방군은 양쯔강을 넘어 별다른 전투 없이 난징, 항저우, 상하이, 우한 등을 차례로 점령했다. 81일 장제스는 대만으로 도망갔고 인민해방군은 중국본토를 모조리 손에 넣었다. 청이 멸망한 이후 40년 가까이 분열되었던 중국대륙이 다시 통일되었고 오랜 왕조시대가 끝났다. 한족과 이민족이 번갈아 지배했던 역사도 끝났고 이제야 비로소 완전히 통일이 이루어졌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혁명을 주도하는 세력은 노동계급이다. 노동자를 배출하는 자본주의를 거쳐야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위해서는 경제적 생산력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가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도 자본주의 단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본주의 단계에 들지도 않은 국가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났다. 러시아는 정치적으로 제정이었고 경제적으로는 봉건체제였다. 마르크스가 말한 경제적 조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난 혁명이 아니라 인위적인 혁명이었다. 1949년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출범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여러 가지 이론적, 현실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기존의 사회주의이론을 수정해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 사회주의혁명을 주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농민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인민해방군도 거의 농민으로 구성되었다. 농민에 대한 착취를 일삼은 부농과 봉건지주는 재판으로 다스리고 그들의 토지를 몰수해 경작자인 농민에게 재분배했다.

 

공산당 정부는 기업을 몰수해 국영기업으로 바꾸고 제국주의 자본과 관료 자본을 국유화했다. 그것이 바로 1985년에 설립한 인민공사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지만, 사회주의 중국에서는 인민공사가 인민을 착취한 것이다. 의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정치적 표현이다. 그러나 중국은 제국시대를 끝내고 수십 년간 분열기를 겪은 뒤 곧바로 사회주의로 이행했기 때문에 의회민주주의가 성립할 토양이 없었다. 중국은 수천 년의 역사에 걸쳐 천자 한 명이 천하를 지배하는 방식에 익숙했다. 중국의 지배층만이 아니라 피지배층인 인민들도 그랬다. 중국의 공산당은 서구의 정당이라기보다 사실상 의회와 같은 기능을 하며,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 걸맞지 않게 주식시장이 존재한다. 중국에 수천 년의 역사적 전통이 반영된 새로운 체계가 등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