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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생활사 (차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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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아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기새등등하던 억새의 칼잎들이 가을볕에 물기가 빠져버리고, 불어오는 가을 바람에 우수수 소리내어 운다. 가을 바람에 울어대는 억새풀은 더 없이 낭만적이다. 억새는 황폐한 땅에서 숲을 준비한다. 억새는 자라는데 그리 많은 양분이 필요하지 않다. 산불로 인한 토양의 성분이 다 타버린 척박한 땅에서 비교적 잘 자라는 억새는 빠르게 세력을 키울 수 있다. 늦 가을에 손끝이 시린 것은 서리꽃의 날카로움 때문이다. 아침이면 붉은 단품 낙엽의 가장자리에 하얀 서릿발이 피어난다. 가장 치명적인 독이 가장 극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서리맞은 잎이 더 붉다고 했던가? 서리에 쭈글쭈글해진 열매는 가장 진하고 달다. 누렇게 말라버린 지푸라기에, 떨어져 딩구는 낙엽에, 바위의 이끼 위에..
마감 우우- 가을 바람이 불어대면 나뭇잎은 가다렸다는 듯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빛깔도 모양도 힘도 잃은 나뭇잎들은, 빈 가슴으로 마음껏 바람을 맞이한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나뭇잎은 하늘을 빙그르르 땅으로 우수수 떨어진다. 비바람 몰아치는 숲에서 낙엽들이 그려내는 군무는 참으로 서럽다. 가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정리다. 미련과 집착은 불행이다. 모든 장치들이 떨구어 내고, 떨어버리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겨우겨우 달려있는 나뭇잎은 이미 물기가 빠져 푸석거리고, 숲바닥도 푸시럭거리며 약간의 바람에도 움찔댄다. 나무 줄기들도 건조해지고 갈라진다. 낙엽은 식물이 한해동안 성장하면서 이룬 생산물이다. 바람에 떨어진 낙엽은 이리저리 뒹굴면서 낮은 곳이나 물가로 모여든다. 낙엽속에는 식물들의 노폐물이 저장되어 있..
새로운 시작 분명 가을은 여름보다 빛이 여유롭다. 새로운 봄이 온 것이다. 옅은 빛이기는 하나 느슨한 숲의 상층을 통과한 빛이 도달한 바닥에는 느닷없는 설레임이 있다. 모든 것이 마감되는 시간인줄 알았는데 은근한 빛의 유혹이 느껴진다. 빛의 성질이 약간 바뀌었을 뿐 모든 것이 봄과 같다. 느슨한 나뭇잎 , 바람, 물, 사그라드는 약한 빛에도 숨을 죽이고 있던 싹들이 지상으로 돋아난다.텅빈 숲의 덮개가 적당히 바람을 막아주고, 낙엽은 따스한 지기를 아직 가두고 있어 땅바닥에 생을 일구는데 부족함이 없다. 나무의 뿌리들은 물에 대한 탐식이 줄어 흙은 여유로운 미소를 보낸다. 풀은 여름보다 더욱 싱싱하며 더 많은 꽃을 달수 있다. 조릿대는 더욱 새파란 잎으로 얼마후 강풍이 햇빛을 얼릴 때까지 부지런히 삶을 꾸민다. 어차피..
소멸과 부활의 노래 숲에서 여름이 사라지는 것은 썰물이 빠져 나가는 것처럼 빠르다. 삶의 치열함이 물러간 숲은 당혹스럽기 까지 한다. 가을은 다가올 겨울에 대비하기 위한 조정 기간이다. 나무는 잎을 정리하고 짐승들은 먹이를 준비한다. 헐거워진 숲을 통과한 빛은 짧은 가을 동안 새로운 희망이 된다. 여름 끝에 가을이 없다면 자연은 훨씬 혹독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가을이 오는 첫번째 징조는 헐거워짐이다. 무게로 출렁이던 숲의 덮게가 갑자기 하늘로 오르듯 가볍다. 물이 빠진 것이다. 치열한 여름이 끝나고 신선한 바람이 불때면, 생명들은 마감 준비를 해야한다. 왕성한 성장을 도모했던 세포속의 물질들은 분해되고 정리된다. 살이 녹아버린 나뭇잎은 얇고 투명해진다. 빛은 서서히 숲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가을 빛은 지구가 얼마나 ..
풍경 모든 생명들을 꽁꽁 얼어버렸던 빙하기가 몇차례 지나갔지만 숲은 매번 되살아나, 풍성한 지구의 외투를 만들었다. 숲은 과거 공룡들을 포함한 동물들이 활동하던 무대였으며, 현재는 인간이 무대이고 미래에도 여전히 인간이 아닌 새로운 종이 뛰노는 무대가 될 것인가? 물기가 튀어 오른 곳이나 빗물이 흘러내리는 나무에 깔려 있는 초록의 이끼는, 숲의 물을 가늠하게 하는 지표다. 이끼는 오랜 지구 역사 속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지켜온 생명이다. 이끼는 과거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는다. 연방 맑은 물이 튀어 오르고 서늘한 물안개가 걸리는 가운데, 우거진 나무는 하늘을 가리고 이파리는 물기로 충만하여 빛을 반사시킨다. 물기로 축축한 줄기는, 물속에 녹아 내리는 양분과 ..
투쟁 어찌 살아있는 것들만의 숲이든가?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법, 죽음은 삶으로 연결되는 고리다. 식물이 생산활동을 하는데는 이산화탄소가 주원료가 되지만, 이 과정을 이끌어 가는데는 17가지 원소들이 필요하다. 식물에게 필요한 탄소는 공기 중에서 기체로 공급받는다. 탄소이외의 모든 영양소는 흙 속의 물에 녹아있는 이온상태로 공급받는다.식물은 왜 유기물 덩어리를 직접 섭취하지 않을까? 생물이 유기물덩어리를 그대로 섭취하려면 매우 복잡한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유기물의 분해와 섭취와 이동을 위해 특별한 조직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전체 시스템을 관장하는 뇌와 같은 조직이 필요하다. 다른 생물이나 환경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식물의 몸은, 일부가 손상되더라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도록 되어 있다. 이런 구조야 말로..
여름 숲 여름은 숲에게 필요한 것들이 풍성한 계절이다. 도시를 뜨겁게 달구는 태양빛은 식물이 갈구하는 동력자원이며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물은 물품을 조달하는 통로를 마련해 준다. 풍부한 빛과 물과 온도와 낮의 길이, 식물에게 최상의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여름 한철이다.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여름 숲은 축축하다. 밤이 되어 온도가 낮아지면 대기중의 포화 수증기량이 낮아지고, 갈 곳이 없어진 물 분자들은 나뭇잎에 풀섶에 가지에 줄기에 매달린다. 밤새 모아진 물 분자들이 방울이 되고 빗물이 되어 아침 숲에 뚝뚝 떨어진다. 숲이 깊고 울창할수록 물의 이동은 큰 힘을 받는다. 신갈나무 한그루는 낮 동안 시간당 30미터 속도로 물을 지상으로 펌프질 한다. 이렇게 한그루의 신갈나무는 한낮 동안 400리터의 물을 끌어올린다..
치열한 생존경쟁 여름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있어야 나뭇잎은 햇빛을 반사할 수 있으며, 숲을 스치는 바람이 있어야 은빛 나뭇잎을 알아 볼 수 있다. 윤이 나는 왁스 잎을 가진 느릅나무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흰털을 수북히 가진 굴참나무는 바람이 불어야 이파리를 뒤집어 군무출 수 있는 것이다. 여름은 모든 것이 맞물려 있다. 풍성하고 울창한 숲은 그만큼 물질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여름 숲은 한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는 치열한 전쟁터이다. 우람한 몸짓을 만들어 내는 바람은 거세고 빗줄기는 굵다. 여름이 키워낸 강자들에 의해 숲은 다시 재편되고 견제당한다. 뻐꾹—여름이다. 나무는 한해 동안 자라야 할 만큼의 높이에 충분히 도달 하였고, 잎의 두께와 크기도 연중 최고로 자란다. 숲의 두께는 한층 짙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