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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세계사 (남경태)

동양사-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3

당시 만주의 주인인 만주족(여진족)에게 명은 관직도 주고 조공무역도 허락하는 등 북변을 침범하지 않도록 무마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1588년 누루하치는 만주일대를 통일했다. 후금이 랴오둥에서 랴오허를 건너 랴오시까지 진출하자 명은 군대를 파견했다. 그래서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했을 때 명의 주력군은 만주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칸위를 물려받은 홍타이지는 후금을 본격적인 수권정당으로 탈바꿈 시킨 인물이다. 이자성이 베이징을 장악하는 바람에 만주로 파견된 명의 군대를 갈 곳이 없어졌다. 총 사령관 오삼계는 청에 항복하고 이자성의 반란군을 진압하기로 마음먹었다. 1644년 이자성을 물리치고 꿈에도 그리던 베이징에 입성했다.

 

베이징을 점령한 뒤에 청은 한동안 통일제국을 갖추지 못했다. 은 오삼계를 비롯한 한인 공신 세 명에게 각각 번국을 할당해 세 개의 번국으로 강남을 통제했다. 청의 입장에서 번국은 중원지배의 화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즉위한 강희제는 61년 동안 재위하면서 청제국을 안정시키고 강대국으로 만든 뛰어난 군주였다. 강희제는 유럽의 러시아와 처음으로 접촉하게 된다. 동진을 계속해오던 러시아군과 만주의 청군은 헤이룽강(아무르강)에서 만나 역사상 최초로 동양과 서양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표트르는 동방진출을 단념하고 유럽무대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강희제 체세에 청은 완전한 통일제국 기틀을 마련하고 번영을 구가했다. 강희제의 한화정책은 중국의 선진문화를 흡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족 반발을 회유하고 무마하려는 의도도 컸다.

 

아버지 강희제가 오랫동안 장기집권 한 탓에 옹정제는 넷째 아들이면서도 마흔넷의 나이에 제위에 올랐다. 13년 동안 제위기간에 치밀하고 정교한 정책을 구사해 탁월한 치적을 남겼다. 옹정제가 만든 태자밀건법의 첫 수혜자는 건륭제 고종이다. 태자밀건법은 황제가 후계자를 미리 결정해 두고 황제가 죽을 무렵 공표하는 것이다. 건륭제는 다섯째 아들로 제위에 올랐으며 문무를 겸비하고 제국을 전성기로 이끈 군주였다. 내치에서는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나 대외적인 측면에서 소극적이었던 옹정제와 달리 건륭제는 활발한 정복활동을 재개했다. 중국 서북방을 계속 위협하던 중가르(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두 차례에 걸친 원정으로 평정하고, 비단길 인근을 장악하고 남쪽으로 미얀마와 월남을 복속시켰으며, 히말라야까지 원정을 보냈다. 영토면에서 청은 어느 한 족보다 최대 강역을 자랑했다.

 

청은 무려 300년 동안 중국을 지배했으니 여느 한족 통일제국 못지않게 장수한 셈이다. 소수 지배층이 압도적 다수 피지배층을 오랜 기간 동안 지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강희제의 한화 정책의 덕분이 크다. 한족문화를 활발하게 수용했을 뿐 아니라 제도적인 면에서도 한족에게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 한 것은 한편으로는 민족 간 차별을 두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인 관료들에 대한 감시와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청은 만주족 특성을 잃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한문을 사용하면서도 누루하치 시절에 만든 여진문자도 계속 사용했으며 군사제도는 만주족 전통의 팔기제를 주축으로 삼았다. , , , 명 등 중국역대 한족 왕조들의 국력이 약화된 것은 만주와 서북방면의 북방민족들에게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청이 중원을 차지하자 만주쪽 국방은 자동으로 안정되었다. 강희제와 건륭제의 정복사업으로 서북변까지 평정됨으로써 청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이민족의 공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장기간의 번영으로 인구가 급속히 성장했다. 1700년대 2000만 명이었던 인구는 50년 뒤 18000만명으로 늘었고 1850년에는 4억명을 넘었다. 인구가 지나치게 늘어나자 중국은 맬서스의 인구법칙이 맞는 사례가 되었다. 식량은 더하기로 증가하고 인구는 곱하기로 늘어난 것이었다. 빈민은 늘어나고 각지에서 탐관오리가 판을 쳤다. 바야흐로 서세동점의 물결이 중국을 향해 휘몰아쳐 오는 시대였다. 단순한 왕조 교체 이상의 근본적인 변화가 동양 전체에 오고하고 있었다.

 

너무 오래 통치한 탓일까? 황제가 국정에 대한 관심을 놓으면 부패가 잇따르기 마련이다. 건륭제가 신임하고 국정을 맡긴 신하들이 부정을 저질렀다. 정치가 실종되자 전통의 팔기군도 무기력해졌다. 관리가 부패하고 백성이 곤궁해지자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반란이 일어났다. 18세기말부터 중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역사적적으로 보면 이쯤에서 쿠데타가 성공해서 새 왕조를 세우는 게 정상적인 흐름이다. 멸망할 것 같은 청의 수명은 그 뒤로도 10년 이상 연장해준 것은 동양에 거세게 몰려온 유럽열강이다. 중국의 역사로 치면 명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유럽세계는 대항해와 탐험으로 발견의 문을 열었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 정신무장을 새로이 다졌다. 청대 유럽은 그간의 성과로 산업혁명이라는 결실로 맺었다.

 

자본주의시대 이전의 서양은 동양 식민지를 개척하더라도 그 사회에 깊숙히 밀고 들어갈 힘이 없었다, 침탈지를 황폐하게 할 수는 있어도 기존사회 구조를 바꾸지는 못했다.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서구열강은 자국의 공업제품을 팔고 자국 산업을 위한 원료와 식량을 가져갔으므로 식민지의 사회경제구조를 자본주이 종속체로 만들어버렸다. 서구열강의 경제적 침략은 식민지를 일시적으로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 영구적으로 수탈을 구조화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인도의 동인도 회사를 통해 영국산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 기타 보석이나 시계 등 잡화를 중국에 수출하고 중국으로부터 차와 비단, 도자기 등을 수입했다. 중국과의 무역에서 적자를 보자 영국은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수출해 무역적자를 타개하려 했다. 1839년 조정에서 파견된 임칙서는 영국 상인들에게서 아편을 압류해 군중 앞에서 불태워버렸다. 이리하여 아편전쟁이 터졌다. 인도에 주둔한 극동함대를 주축으로 한 영국의 원정군은 순식간에 광동에서 텐진까지 중국 동해안을 휩쓸었다. 해전뿐 아니라 육전에서도 영국군은 연승했다. 1842년 청의 항복으로 영국과 중국은 동서양 최초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을 맺었다.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다섯 항구를 개항하며 영구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했다.

 

1854년 후발 제국국가인 미국이 일본을 개항하는 것은 난징조약의 후속이나 다름없었다. 서구인들은 한반도를 중국의 일부로 여겼기 때문에 조선에 대해서는 통상조약을 요구하지 않았다. 1844년 미국과 프랑스가 청과 통상조약을 맺었다. 난징조약을 체결한지 12년이 지나 1854년 영국은 조약개정을 요청했다. 이리하여 다시 2차 아편전쟁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크림전쟁에서 동지로 싸운 프랑스와 손을 잡았으니 승패는 볼 것도 없었다. 다시 텐진조약을 맺게 되는데 여기에 러시아가 중재에 나섰다. 청이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영국과 프랑스는 재차 군대를 동원해 베이징 조약을 맺었다. 사회적으로 불만과 불안이 팽배한 가운데 중국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다. 태평천국운동이다. 그리스도교도인 홍수전은 자신이 조직한 상제회가 관헌의 탄압을 받자 1850년 광시성에서 봉기했다. 반란세력은 민중을 등에 업고 멸만흥한滅滿興漢의 구호를 외쳤다. 금세세력을 떨쳐 난징을 점령하고 1853년 태평천국이라는 나라를 수립했다. 청조정은 내부반란을 진압할 힘이 없었다. 한족 왕조를 꿈꾼 태평천국군은 신을 뜻하는 노란색 기치를 내세우고 붉은 새 군복을 입었다. 40년 뒤 조선에서도 동학농민군이 외세배척을 내세웠다가 부패한 정부가 외세를 끌어들임으로써 비운을 겪었다. 태평천국 초창기는 서구열강은 반군에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2차 아편전쟁에 승리하고 원하는 것을 다 얻자 청 조정을 위해 특수부대를 편성해주었다. 서양무기로 무장시키고 서양식 훈련을 실시하고 사양인을 지휘관으로 하는 부대를 만든 것이다. 병기가 워낙 우세하여 전세는 역전되었다. 1864년 난징이 함락되면서 태평천국운동은 종식되었다.

 

태평천국군은 순전히 서구의 우세한 무기와 화력에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란의 진압을 계기로 중앙정치에 나서게 된 증국번과 이홍장 등 유력군벌들은 서양의 힘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상하이, 푸저우 등지에 조선소와 병기공장이 세워지고 총포와 탄약, 기선 등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중국에 최초 근대적 중공업이 탄생한 것이다. 이때부터 30년 동안 사양의 과학기술을 적극 도입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자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전개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신장지역에 러시아가 침식해 들어왔고, 프랑스가 베트남을 차지하는 등 서구 열강에 밀려 중국의 영향력이 점점 무너져가고 있었다. 일본도 메이지유신으로 대만을 침략하고 조선에 진출했다.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조선정부는 청에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청으로서는 무대는 한반도였고 양무운동 성과를 시험할 기회였다. 일본은 이홍장의 청의 해군을 황해에서 격파하였고 육군을 평양에서 무찔렀다. 랴오둥반도까지 진출해 중국본토를 노렸다. 청조정은 또 하나의 불평등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했다.

 

한없이 초라해진 중국을 서구 열강은 거세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에다 이번에는 독일까지 이권다툼에 끼어들었다. 양무운동과는 다른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다. 광동지방 지식인이었던 캉유웨이는 변법變法(개혁)을 하지 않으면 나라가 사라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서양에 그리스도가 있다면 중국에는 공자가 있다. 공자가 개혁가라 주장하면서 유교를 재해석하고자 했다. 캉유웨이 주장에 황제 광서제가 움직였다. 황제의 지원으로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시행했다. 개혁세력은 민간이 주도하는 민족자본의 육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정치제도와 과거제, 관제와 법제, 군사제도, 교육제도 등 모든 제도를 뜯어고쳤다. 화폐를 통일하고 철도를 부설하는 등 모든 방면에서 대대적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지배층 가운데 개혁을 지지하는 자는 광서제 한 사람뿐이었다. 실권자인 큰 어머니 서태후에 밀려 소외되었다. 개혁을 실시한지 100일 만에 서태후가 이끄는 보수파는 쿠데타를 일으켜 광서제를 연금하고 개혁파를 체포했다.

 

개혁이 실패하면 보수로 기우는 법이다. 양무운동과 무술변법이 모두 실패하지 중국은 오로지 반외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화단 운동은 중국민중이 들고 일어났다는 점에서 달랐다. 서양의 철도와 교회를 파괴했다. 서태후 지원을 등이 업고 정부의 실권자로 군림하던 위안스카이는 군대를 보내 진압하려 했으나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폭동은 화북일대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의화단을 이용해 외세를 물리치자는 주장이 나오자 서태후는 중국 공사관들에 당장 중국을 떠나라는 통보를 하고, 의화단을 도우라고 명을 내렸다. 2차 아편전쟁 이래 40년만에 중국과 서구열강의 대결이 벌어졌다. 유럽연합군은 텐진과 베이징을 손쉽게 점령하고 쯔진청을 약탈했다. (대영제국 박물관과 루부르 박물관에 소장된 중국문화재들 대부분이 이때 탈취되었다) 청조정은 다시 백기를 들면서 베이징 의정서를 체결하고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강국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은 전통적인 전제군주제인 중국과 러시아를 이겼다. 입헌군주제가 시대적 추세라고 여긴 서태후는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만들고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형식만 갖춘다고 수천년 동안 지속된, 그것도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정이 하루아침에 공화정으로 바뀔리는 없었다. 도쿄 중국유학생들은 정부에 의한 어떠한 개혁도 무용하다고 판단을 하고 혁명적으로 나아갔다. 1905중국동맹회라는 통합조직이 생겨났는데 그 대표는 쑨원이었다. 동맹회는 중화민국이라는 새로운 국호를 정하고 삼민주의라는 강령도 채택했다. 19101010일 우창에서 지식인과 군대가 연합해 봉기를 성공시키고, 중국본토에서 처음으로 중화민국 군정을 수립했다. 훗날 이 사건은 신해혁명으로 기록되었으며 거사가 벌어진 1010일을 쌍십절이라는 이름의 건국기념일로 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