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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세계사 (남경태)

동양사- 한결 같이 도발하는 일본2

일본 바쿠후가 쇄국을 하던 18세기 후반 무렵 유럽은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자본주의의 새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 영국은 18세기 중반 프랑스를 꺾고 단독으로 인도를 식민지화 하는데 성공했다. 영국에 패한 프랑스는 엄청난 변화의 회오리를 맞게 되었다. 랑스 혁명이다. 이 혁명과 뒤이어 나폴레옹전쟁은 전 유럽의 지각을 뒤흔들어 근대적 국민국가의 성립을 촉진시켰다. 러시아는 18세기 초반 표트르 대제의 개혁을 바탕으로 착실하게 근대화를 추진해 유럽의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유럽의 식민지로 시작한 미국도 1776년 혁명으로 독립해 성공해 열강의 막내로 당당히 끼어들었다.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은 중국과의 통상에 최대한 주력했다. 향료 산지인 동남아시아는 이미 에스파니야, 포르투갈, 네덜란드가 해상을 주름잡던 시대에 무역을 장악했고, 인도는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최대 주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남은 것은 중국과 일본이었다. 일본에 최초로 통상을 요구해온 나라는 유럽의 변방인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끊임없이 동진해온 끝에 마침내 유라시아 땅 끝인 베링해에 이르렸다. 동진의 목적은 부동항을 확보하는데 있었다. 1783년 러시아 캄차카에 표류한 일본 선원들을 귀환시키면서 일본 바쿠후에 통상을 요구했다. 바쿠후는 거절했다. 20년 이 지난 후 러시아는 나가사키에 사절을 보내 통상을 요구했다. 일본은 쇄국정책을 내세워 거절했다.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한 것으로 일본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1842년 난징조약이 체결된 이후 유럽열강은 중국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에 닥친 열강은 유럽국가가 아니었다.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이끄는 함대였다. 미국에 개국된 뒤 일본은 계속되는 서구열강의 침입에 시달린다. 1864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4개국 연합과 벌인 시모노세키 전쟁으로 바쿠후는 막대한 배상금을 다 지불하지 못하고 불평등조약을 체결해야했다. 1854년 일본은 요코하마에서 미일 화친조약을 맺고 2개 항구의 개항과 무역개시, 영사주재 등의 조건을 얻어냈다. 이후 몇 년 동안 러시아와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과 차례로 통상조약 체결하면서 바쿠후의 권위는 끝없이 추락했다.

 

전통의 지배층인 다이묘들이 바쿠후에 집착하는 동안 시대를 담당할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다이묘와 번주들의 휘하에 있던 무사들을 비롯해 로닌, 지주, 상인계층이었다. 이들은 존왕양이를 주장하고 나섰다. 몇 년 전부터 부활의 조짐을 보이던 천황은 존왕양이의 구호에 힘입어 다시 일본 역사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천황 고메이는 자신을 정치권의 핵심으로 부활시키려는 존왕파를 외면하고 오히려 바쿠후측이 내미는 손을 받아 쥐었다. 천황을 끌어들인 바쿠후 정권은 공공연한 정치세력을 떠오른 존왕파를 역적으로 몰아붙이고 탄압을 가해왔다. 바쿠후는 양이인 프랑스와 결탁하여 정치, 군사, 무역의 자문과 지원을 얻고 있었다. 존왕파에서 반바쿠후파로 명패를 바꾼 그들은 자연스럽게 영국에 접근했다. 일본민중에게도 바쿠후에 대한 반감이 절정에 달할 즈음인 1866년 고메이 천황이 죽고 열네 살의 메이지가 즉위했다. 드디어 18681월 존왕파는 쿠데타를 일으켜 바쿠후를 타도하는데 성공했다. 쇼군제가 폐지됨으로써 본의 아니게 마지막 쇼군이 되어버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아직도 에도를 장악하고 있었다. 새 천황정부는 요시노부를 타도하자는 구호로 대군을 편성해 에도로 진격했다. 수백년동안 바쿠후 중심지였던 에도는 이때부터 도쿄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그보다 더 큰 변화는 9세기 이래 셋칸시대(섭관들이 정치적 지배자 시대))와 바쿠후시대를 거치면서 내내 상징적 존재로만 군림해왔던 천황이 무려 1000년만에 다시 현실 정치의 무대에 우뚝 서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천황은 법제상으로만 절대권력을 지녔을 뿐 현실적으로는 관료들이 권력을 소유하고 집행했다. 그래도 천황은 과거의 상징적 존재와 달랐다. 관료들은 천황의 이름으로 행사했으므로 천황은 모든 권력의 원천이었다. 일본의 근대화에 결정적 기여를 한 유명한 메이지 유신은 소년 천황이 직접 주도한 게 아니라 메이지 정부관료들이 천황의 이름으로 집행한 것이다. 메이지시대 관료들은 바쿠후의 다이묘의 지휘를 받는 바쿠후시대 관료들과 전혀 달랐다. 그들은 명령을 받아 실행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정책일 입안하고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메이지유신의 본론은 근대화를 통한 부국강병이다. 1871년 체제정비를 완료한 유신정권은 최고 수뇌부의 절반에 달하는 48명의 대규모 사절단을 편성해 미국과 유럽으로 파견했다. 사절단은 1년 반에 걸쳐 미국은 물론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순서로 거의 모든 유럽 국가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엄청난 정보를 가지고 돌아와 적절히 모방해 활용했다. 메이지 유신의 화혼양재和魂洋才는 일본의 정신으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메이지 정부는 서구 여러 나라의 각종제도를 저울질하며 그것들 중 가장 적절한 것을 선별해 도입했다. 유신정권은 청렴했으며 핵심세력의 나이도 부패연령에 이르지 않고 젊었다. 최고 수뇌부의 최고 연장자가 40대 중반이었고, 주로 30대 소장파가 모든 실무를 담당했다. 난징조약 이래 무수한 불평등조약을 맺으면서도 빠져나가는 실익과 이권은 무시한 채, 오랑캐에게 굴욕을 당한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던 중국 관리들에 비해,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당시로서 믿기 어려운 탁월한 대세 감각을 보였다. 문제는 부국강병을 내세웠단 만큼 군사적 성격이 강한 근대화였다는 점이다. 그런 분위기는 필연젹으로 서구와 같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군사적으로 도모하는 군국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기 전부터 일본정부는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었다. 번을 폐지하면서 넘쳐나는 번의 군사력을 조선침략에 이용함으로써 내부 안정을 도모하는 동시에 대외 무력진출을 이룩하자는 것이었다.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한 이후 무사들과 군수상인들의 불만을 임진왜란으로 표출시킨 거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정한론에는 히데요시 시대에는 없던 세계국제정세의 흐름이 반영되어 있었다. 바쿠후시대 말기에 요시다 쇼인은 이렇게 말했다. “ 러시아 미국과 화의를 맺으면 우리는 비록 오랑캐와의 약속일지라도 신의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그 사이에 국력을 배양해 손쉬운 상대인 조선, 만주, 중국을 취함으로써 교역에서 러시아와 미국에서 잃은 것을 보충해야 한다. 그 첫걸음이 1871년에 맺은 수호통상조약이다. 이 조약은 유사 이래 최초로 일본과 중국이 대등한 조건에서 조약을 체결한 것으로 직접적인 성과는 조선에 진출하기 유리해 졌다는 것이다. 한반도는 신라가 삼국통일 이래 중국과 특수 관계에 있었다,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고 연호를 독자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중국의 속국이었고, 내정이 독자적이라는 점에서는 독립국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일본이 중국과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곧 조선에 대해 중국과 똑같은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은 그렇게 해석했다. 조선을 개항시킨 1876년 강화도조약이 그 결과물이었다. 일본은 20년 전 미국이 했던 방식 그대로 군함을 보내 함포로 시위 사격을 하고, 미국과 맺은 조약 그대로 모방해 조선과 조약을 맺었다.

 

메이지 유신은 민중의 거센 저항과 상인, 지주층의 반발을 샀으며, 민중세력의 성장에 힘입어 서구적 자유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새로운 지식인층과 정치지도자들이 생겨났다. 정부는 10년 뒤인 1890년에 국회를 개설하겠다고 했다. 국회개설에 필요한 헌법을 천황이 제정하겠다는 방침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일본의 제국주의화를 경계했다. 그들은 동북아시아와 연대하여 서양 열강에 대항하자고 주장했다. 그들이 내세운 동양연대는 이후 군국주의 정부에 차용되어 대동아공영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다. 유신초기부터 참여해 핵심의 위치까지 오른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로 헌법초안을 작성한지 몇 년만에 드디어 1889년에 공표된 대일본제국 헌법은 바로 서구식 흠정헌법의 완벽한 모방이었다. 흠정헌법이란 독일어를 번영한 용어인데 원래 뜻은 강요된 헌법, 부과된 헌법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흠정헌법欽定憲法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정한 헌법이란 뜻이다. 대일본제국은 천황이 통치한다. 천황은 신성하여 침범 받지 않는다 같은 조항에서 알 수 있듯이 새 헌법은 민주주의는 커녕 천황독재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발생했다. 개화파인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일본은 김옥균을 지원해 쿠데타를 성공시켰으나 사흘 만에 수구파에 의해 진압당하고 말았다. 그때 공사관이 습격당했다는 것을 빌미로 일본은 군대를 사울에 파견하고 조선정부에 사죄와 손해배상을 요구헀다. 또 청군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빌미로 이토 히로부미는 중국과 텐진조약을 맺었다. 텐진조약에서 마지막 조항에 청과 일본 양국은 이후조선에 출병할 때 상호통지할 것을 약속했다. 일본이 조선침략을 계획한 경제적 이유는 시장으로서 이 역할보다는 쌀과 금을 확보하는데 있었다. 조선에서는 동학농민전쟁으로 전국이 들끓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일본에서 정부 불신임안이 가결된 바로 그날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했고, 조선의 민씨정권은 즉각 청에 출병을 요청했다. 총리 이토 히로부미는 의회를 해산하고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다. 외국군이 들이닥친다는 소식을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은 서둘러 조선정부와 화의를 맺고 전주성에서 철수했다. 조선정부도 그제야 사태의 위중함을 깨닫고 두 나라 군대의 철병을 요청했다.

 

일본군은 조선왕국에 침입해 민씨정권을 제거하고 대원군을 옹립했다. 대원군을 옹립한지 이틀 만에 일본의 해군과 육군은 황해 상에 있는 청의 함대와 아산에 주둔 중인 청의 육군을 기습했다. 이리하여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이홍장이 각별히 공을 들인 청의 육군과 해군은 일본의 공격 앞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랴오둥에 상륙한 일본군이 뤼순을 접수하고 산둥반도까지 밀고 내려가자 청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청은 시모노세키에서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을 제압한 데 이어 청마저 굴복시켜 서구 제국주의에 못지않은 동양제국주의로 떠올랐다. 특기할만한 것은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한다는 내용이 조약의 1항으로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1919년 독립선언서의 첫대목을 연상시키는 이 조항이 삽입함으로써 일본은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일차 포석을 마쳤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동양의 패자가 되었다. 랴오둥반도를 받는다면 일본은 대륙 침략의 교두보를 가지게 된다.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이 함께 랴오둥을 청에 반환하라고 나섰다. 러시아는 역시 중국과 한반도에 진출하려는 야심을 가졌으므로 일본을 견재해야 했던 것이다. 러시아는 18세기초 표토르시대에 근대 국가체제를 갖추고 제국주의로 노선을 정했다. 러시아는 해외진출에 필요한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남하를 시도했다. 그때마다 가로막은 나라가 영국이다. 발트해는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 막혔고 동유럽은 오스만튀르크가 장악하고 있었다. 러시아로서도 남은 곳은 동북아시아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의 조정에서는 친일파와 친러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삼국간섭에서 일본이 굴복하는 것을 본 민씨 세력은 갑오개혁을 주도한 친일내각을 몰아냈다. 이에 맞서 일본은 1895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대원군을 옹립했다. 이 만행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서 1년 가까이 머물렀다. 아관파천이라 부르는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조정은 친러파가 장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