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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세계사 (남경태)

동양사- 한결 같이 도발하는 일본3

영국은 1902년 드디어 동양에서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오로지 러시아의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뤼순과 인천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기습하고 다음 날에야 선전포고를 했다. 영국만이 아니라 프랑스와 미국도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 측에 전쟁 비용을 지원했다. 졸지에 유럽열강을 대표해 러시아와 싸우게 된 일본은 예상외로 선전했다. 서구 열강의 지원까지 받았으나 개전 후 1년이 지나자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일본을 사지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준 것은 러시아의 내부 사정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활발해진 러시아의 혁명운동은 러일전쟁으로 더욱 고조되었다. 사태가 급변하자 전쟁을 바라보는 열강의 태도도 변했다. 이제는 군국주의 일본의 성장보다 러시아의 혁명운동이 더 큰 위협이었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주선으로 일본과 러시아의 강화를 유도했다. 105년 포츠머스 강화회담에서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의 모든 권리를 일본에 양도하고, 사할린마저도 일본에 넘겨주는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다. 러일전쟁의 최대의 전리품은 조선이었다. 청일전쟁으로 수천년 동안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온 종주국을 물리쳤고, 러일전쟁으로 신흥종주국마저 제압했다.

 

조선을 병합하고 나서부터 군부라는 말이 스스럼없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군대가 아닌 군부라는 말은 군이 정부에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의 위치에 있음을 뜻한다. 일본은 역사상 처음으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결합한 새로운 정치, 일본식 제국주의를 선보이게 된 것이다. 군국주의의 큰 특징은 전쟁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고방식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후발 제국주의 열강과 영국과 프랑스 등 선발 제국주의 열강이 맞붙은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을 무대로 벌어졌으므로 원래는 일본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으나, 전형적인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일본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일본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을 천우신조라고 표현하면서 즉각 연합국 측에 가담하기로 결정했다.

 

영일동맹은 그야말로 구실일 따름이었다. 연합국 측은 유럽에 군대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일본은 거부하고 동양에서 제 역할을 찾았다. 독일이 진출해 있던 지역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일본해군은 남태평양 일대의 독일령 섬들을 차례로 점령했다. 중국에서 독일세력을 몰아낸 뒤에도 일본은 군대를 철수시키기는커녕 병력을 증원했다. 세계대전이 종전을 향해 치달을 무렵 러시아는 차르체제가 무너지고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마자 연합군 측은 즉각 대소간섭전쟁에 나섰다. 1차 세계대전은 일본에 여러 가지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중국에 대한 지배권을 얻었고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세계대전은 패전국만이 아니라 승전국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므로 연합국 측에서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받지 않은 나라는 일본과 미국밖에 없었다. 또 다른 큰 소득은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크게 상승한 것이었다. 종전 직후 미국 윌슨 대통령의 주창으로 결성된 국제연맹에 일본은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당당히 이사국으로 참여해 세계5대 강국의 하나가 되었다.

 

1929년 세계대공황이 없었다면 일본은 경제적인 노선으로 나아갔을지 모른다. 일본은 이미 경제대국이었지만 대외의존도가 높은 게 문제였다. 대공황이 터지자 서구국가들은 공황의 피해를 막기 위해 지역적으로는 블록경제를 취하고 국내적으로는 국가독점자본주의 노선으로 나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경기부양이라는 대책을 내놓았다. 서구국가들과 공동 대응을 모색하고 그들로부터 금융지원을 받아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만주에 특히 애착을 가지고 있던 일본 군부는 만주를 완전히 식민지로 만들면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31년 관동군 일부 장교들은 남만주 철도를 폭파하고 중국군이 저지른 도발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전쟁을 일으켰다. 서구열강이 일본의 만주침략을 맹렬히 비난했을 때도 정부는 침략이 아닌 자위행위라는 억지를 부리면서 군부의 변호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래도 국제여론이 수그러들지 않자 정부는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일본은 장제스의 군부군만을 적수로 여겼으나 의외로 곳곳에서 일본군의 진출을 저지한 것은 마오쩌둥이 이끄는 홍군이었다.

 

독일 파시즘이 히틀러의 단독 의지나 괴벨스의 탁월한 선전만으로 가능했던 것이 아님은 이미 밝혀진 바 있다. 파시즘이 한나라의 정치이념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은 곧 상당한 정도의 대중적 기초를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일본 군국주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정부에 앞서 야당들도 국제연맹 탈퇴를 주장했고 일본 국민 대부분이 전쟁을 지지했다. 물론 여기에는 다양한 배경이 있다. 역사적으로는 무사계급의 오랜 지배에서 생겨난 군국주의 전통도 작용했고, 상황의 측면에서 대공항의 여파로 인한 경제 불황, 국제적 고립이 가져다주는 불안감, 그리고 그 요소들을 교묘히 대중선전에 이용한 정부 등이 모두 군국주의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군국주의 화신으로 바뀌게 되는 데는 일본 대중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대중은 조직한다고 해서 쉽사리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군부는 중일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그것은 허세가 아니었다. 만주사변 이래 여러 차례 벌어진 국지전에서도 연전연패한 중국이 전면적으로 나온 일본을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당시 중국은 경제적으로 수십년 동안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군사적으로는 아편전쟁 이래 국제전에서 단 한 차례도 승리하지 못한 약소국이었다. 1938년 난징대학살은 바로 중국의 항복을 강요한 일종의 대규모 무력시위였다. 그러나 중국의 저항은 의외로 완강했다. 일본군은 곳곳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했으나 중국이 거점을 차례차례 빼앗기면서도 항전을 계속했다. 1938년 일본 의회에서는 군부주도로 국가총동원법이 통과되었다. 이제 군부는 일본 내의 기업들은 물론 온 국민의 개인적 재산과 인력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게 되었고, 국민의 일상생활까지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이 중국을 지원하게 됨으로써 일본은 위기감에 빠졌다. 그러나 국제상황은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939년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고 곧바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경제위기를 타개하고 석유와 고무 등 군수물자 원료를 확보하기 위해 남쪽으로 확전을 결심했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비롯해 동남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전선에 몰두하느라 이 지역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미국은 일본이 우려한 대로 석유를 비롯한 군수품의 대일 수출을 허가제로 바꾸었다, 일본이 상대는 중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 일본은 독일에 접근했다.

 

중일전쟁을 주창했고 이제 대미전쟁을 계획한 육군장관 도조가 총리를 겸임하게 되면서 군부가 공식적인 정부가 되었다.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해군기지가 있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했다. 일본군은 인도차이나는 물론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순식간에 점령했고 서쪽으로는 미얀마, 남쪽으로는 태평양중부의 제도들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손에 넣었다. 미국이 반격을 개시했다. 미드웨이해전에서 미군은 일본 주력함대를 격파하고 태평양의 제해권을 되찾았다. 독일이 소련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해 세계적으로 전황이 역전되었다. 일본군은 중국전선에서도 밀려나기 시작했다. 19458월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일본은 1945815일에 천황은 대국민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 19세기 중반 250년의 쇄국을 깨고 개국한 이래 일본은 초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문호를 연지 20년 만에 제국주의의 대열에 올랐다. 20년 뒤 청을 물리쳤고, 10년 뒤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인 러시아를 이겼고, 10년 뒤에 세계 5강에 올랐다. 20년 뒤에 중국 대륙을 침략했고, 마지막으로 세계최강 미국을 상대로 세계를 제패하려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급행료를 치러야 했다. 동북아시아 전역을 전쟁으로 몰았고 이웃나라들에 막심한 피해를 주었다.

 

정치는 경제를 담아내는 그릇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경제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기는 해도, 그것을 성장이나 발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정치의 목적은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경제와 조화를 이루는데 있다. 그래서 경제는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데 반해 정치는 다소 인위적으로 진행된다. 동양의 역사에서도 경제는 꾸준히 성장하고 발전했지만 정치는 경제와 조화를 이루기는커녕 어긋나고 충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급속한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그래서 마치 정치가 사회발전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유신의 빛나는 성과의 배후에는 경제적 토대가 있었다. 경제와 달리 정치는 오랜 역사를 거치며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개혁되지 않는다. 그런 정치의 속성에 내재한 문제점은 전후 일본의 현대사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일본은 입헌군주제이기 때문에 최대의석을 확보한 정당이 내각을 구성해 정치를 담당한다. 첫 내각이 구성된 이래 1990년까지 스무 번 가까이 내각교체가 있었다. 내각 교체원인이 정책 실패보다 부패, 뇌물, 독직, 스캔들 등 후진적인 정치 문화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본은 형식상으로 의회민주주의 제도를 취하고 있지만 왕조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경제는 눈부신 성장률을 보였다. 특히 경제복구에 나선 초기에 한국전쟁이 터진 것은 일본경제에 중요한 도약의 계기를 제공했다. 1970년 대 중반부터 일본은 세계적인 경제대국의 반열에 올랐다. 몸집이 불어난 경제를 정치가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일본경제는 서서히 밑천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눈부신 실물경제에 취한 정치권은 경제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낡은 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일본 경제는 끝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발목을 잡은 것이 주식과 부동산이었다. 불황이나 경제위기라는 말은 경제만을 가리키는 듯하지만 실은 정치가 경제에 맞추어 변화하지 않은 게 근본원인이다. 고도로 발전한 실물경제에 맞지 않게 취약한 일본 금융기반은 경제자체 문제라기보다 경제와 정치가 연동된 문제다. 정치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역사의 문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