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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대하여: 저항과 체념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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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 관계 vs 친화 관계 사회적 지위, 위계질서 또는 동물들이 먹이를 먹는 순서는 권력과 강압을 기준으로 정해진다. 이런 위계 체계는 근본적으로 타인의 욕구와는 상관없이 희소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얻는 것과 관계가 있다. 반대로 친화적 관계는 사회적 의무, 호혜, 나무 그리고 서로의 욕구를 인정하는 태도를 기반으로 한다. 인간은 두가지 대조적인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 하나는 힘을 기준으로 관계를 맺는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타인의 필요를 인전하고 서로 희소자원을 둘러싼 경쟁을 삼가며, 친구처럼 함께 생활하는 방식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불평등은 본질적으로 권력관계의 표현이며 구성원들의 서열은 희소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권력에 따라 매겨진다. 어떤 종의 구성원에게 최악의 경쟁자는 대체로 같은 종내의..
위로가 아닌 진실을 젊어서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은 늙을 수 밖에 도리가 앖다. 누구도 젊어서 죽고 싶지 않으며, 아무도 늙어려 하지 않는다. 참으로 하나마나한 진부한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가 어쩔수 없이 받아들인 허망함, 그 깊이를 알수 없는 헛헛함, 자기자신을 갉아먹어 들어가는 우리 존재의 심오한 차원이 곁들여지면서 더할 수 없이 선명한 진리로 울림을 남긴다. 명백한 진리인 탓에 그 어떤 이성적 위로도 발가벗겨지고 마는 황량한 삶의 지대가 늙음이다. 그 무엇도 계획하지 말아야 한다. 늙어가며 우리의 세계가 사라지고 오로지 시간만 남는다. 나이를 먹으면 우리는 우리의 몸이 낯설어짐과 동시에, 그 둔종한 덩어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가깝게 느껴진다. 인생의 정점을 넘겨버린 우리에게 사회는 스스로 그 어떤 일도 계확하지..
죽음과의 타협 나이가 들어 온갖 종류의 불편함은 더는 그에게 귀여운 반려동물이나 씩씩한 이웃처럼 하루를 살아내게 허락하지 않았다. 죽음과 친숙한 것처럼 보인다. 타인의 죽음이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의 죽음과 가까워진 친숙함이다.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지금 나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의사의 친절한 진단은 아닐지라도, 몇가지 증표로 이미 내리막길에 들어섰음을 깨달았다. 죽음은 극한의 공포를 닮은 공포이다. 나를 짓밟거나 걷어차도 누구도 나의 일그러진 몸에 도움은 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았음을 현재 일처럼 눈앞에 떠올려야만 한다. 피곤해서 길을 걷기 어려울 때 택시를 탄다. 몇장의 지폐만 내놓으면, 이 좋은 서비스를 언제든지 받을수 있다. 그러나 두려움은 나와..
죽음의 기이한 불가사의 병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주치의의 얼굴은 언제부터인가 전문가의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같은 해에 태어난 친구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다. 늙어가는 이는 죽음을 생각한다. 처음에 떠올리는 죽음은 객관적인 사건이다. 아직은 생존자로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죽음이다. 가족은 형편이 허락하는 한 이런저런 근심에 사로잡힌다. 무엇보다 막상 일이 닥치면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좋을지 몰라 걱정한다. 바로 그래서 고인으로 예정된 노인은 마지막 유지를 글로 남겨둔다. 죽음을 두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없다.죽음은 아무것도 아닌 없는 것, 그 어떤 것도 아닌 없음, 말 그대로 무無이다. 죽음은 마치 등급을 높여가듯, 갈수록 심해지는 신체적 고통을 주어 두렵기만 하다. 죽어감이라는 것도 인생이다. 삶이 영원한 ..
세상 이해, 그 모순에 저항하기 젊은 사람들을 다시는 따라 잡을 수 없다. 그동안 정신적으로 깨어있는 삶을 살려 시도해 왔다. 오늘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저 이런저런 착각에만 빠져 살았다. 모든 것은 시간과 더불어 허망하게 사라진다는 말은 지당한 진리이다.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려 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는 태도보다 더 낫지도 더 나쁘지도 않은, 하나마나한 말이라는 느낌을 지울수 없이 나를 사로잡는다. 영원함은 바람 한점 없는 잔잔 바다 처럼 보인다. 영원함을 들먹이는 것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시간에 저항해서도 안되며, 시간의 꽁무니를 따라다녀서도 안 된다. 이게 진리다. 물론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빠져나와 영원함을 붙들 출구가 없다는 것도 진리다. 그 영원함은 없음 곧 무無이기 때문이다..
문화적 노화 우리는 '어제'라는 모델은 창피하며 우스꽝스럽고, 가슴이 아릴 정도로 아픈 부끄러움에 지나지 않을까? 폭소를 터뜨리게 만드는 동시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창피한 것, 곧 통속은 언제나 어제 유행으로 체험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체계라는 것은 정적으로 머물러 있는게 아니라, 끊임없는 혁신의 과정을 겪는다.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표시질서가 넣어져 그 의미가 바뀐다. 비평가는 표시정리자로 의미를 부여하거나, 받아들이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비평가를 상대로 결코 이길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살며 겪은 현상은 곧 , 지워버릴 수 없는 그만의 특수함이다. 그 현상은 개인적 체계 내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표시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으로 어떻게 비평가에게 그게 아니라고, 내가 직접 ..
저항과 체념의 모순에 직면하기 대중에게 부정되어 거리에서 투명인간으로 취급받았던 시골변호사 A. 투명한 물질을 보듯, 그를 꿰뚫어 지나가는 타인의 시선이 A를 부정했다. 없는 사람으로 취급당한다는 것은 참아내기 힘든 일이다. 인간은 타인에게 존재를 드러내기를 추구한다. 이게 전부다. 인구 통계적인 연령대 피라미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든 간에, 사회가 젊은이들의 파괴적인 판결을 받아들인다는 점은 늙어가는 사람이 분명히 인식해 두는게 좋다. 사적이든 공적이든 노인에게 보이는 존경심이라는게 거기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노인은 청년에게만 늙은이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그들의 눈에도 피하고픈 늙은이일 뿐이다. 운명을 같이하는 늙은이에게는 동지의식을 표시하길 거부하며, 늙은이의 몰골에서 읽히는 존재부정의 표시에 거리를 두려 안간힘을..
소유나 존재냐 젊어서는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용기를 가지고 거듭 가능한 것을 향해 나아가도록 시도했다. 사회가 아직 가능하다고 인정해 주는, 바로 그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어 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러 그 나이는 곧 현실이다. 나이, 곧 사회적 연령은 기억에 저장된 시간층이나 압박과 고통으로 손상된 몸을 세계의 상실로 경험한 바로 그 기억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에게 매겨지는 몸값 역시 시장가격이다. 우리의 고향은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소유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존재는 가진게 얼마나 되느냐는 소유의 문제를 밝힘으로써 비로소 주어질 뿐이다. 어떤 사람이 누구이며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그가 무엇을 가졌느냐에 따라 정해진다. 일반의 질서는 인간에게 가지라고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