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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 한병철, 김태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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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사회(2) 우울증은 모든 유대를 끊어버리고 대상이 없고 따라서 지향점도 없다. 우울증은 멜랑콜리와도 중요한 차이가 있다. 멜랑콜리는 어떤 상실의 체험 뒤에 온다. 따라서 멜랑콜리는 그나마 어떤 관계 속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슬픔은 강력한 리비도가 투여된 대상의 상실과 함께 일어난다. 슬퍼하는 자는 전적으로 사랑하는 타자와 함께 있는 것이다. 소셜네트워크 속의 친구들은 마치 상품처럼 전시된 자아에게 주의를 선사함으로써 자아감정을 높여주는 소비자의 구실을 할 따름이다. 우울증 환자는 자기자신의 주체가 될 힘을 상실한 사람이다. 그는 주도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의 끝없는 반복에 지쳐 있는 것이다. 우울증이 긍정성의 과잉에서 오는 것이라면, 멜랑콜리는 히스테리나 슬픔과 마찬가지로 부정성의 현상이다. 우울증에 자주 선행해..
우울사회(1) 피로란 스스로는 고통을 느낄 줄 모르는 간肝의 고통이다. 따라서 자기 착취의 주체인 프로메테우스는 엄청난 피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오늘의 사회는 날이 갈수록 금지와 명령의 부정성을 철폐해 가며, 자유로운 사회를 자처하는 성과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적 변동은 인간의 내적 영혼에도 구조적 변화를 가져온다. 칸트의 도덕적 주체 역시 폭력에 예속 되어 있다. 모든 인간은 양심을 갖고 있으며, 내면의 판사에게 감시 당하고, 위협받고 그에 대한 존경심을 품도록 요구 받는다. 그리고 이처럼 법을 넘어서, 인간 내면에서 감시하는 폭력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본질에 합체되어 있다. 이 주체는 어떤 타자의 명으로 행동하지만 그 타자는 자기 자신의 일부인 것이다. 후기 근대의 성과 주체는 의..
피로사회 허먼 멜빌의 단편 ‘ 필경사 바틀비’에서 바틀비는 자기 자신이 된다는 목표를 이루지 못해 좌절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그저 단조로운 필사 작업 뿐인데, 여기서 어떤 자기 주도적 활동에 대한 요구나 가능성이 생겨날 여지는 전혀 없다. 아직 관습과 제도 속에 살고 있는 바틀비는 우울한 자아 -피로를 초래하는 과중한 자아의 부담을 알지 못한다. 바틀비는 자기 자신을 지시하지도, 그렇다고 다른 무언가를 지시하지도 않는 형상이다. 그는 세계 없이 멍하고, 무감각한 상태로 존재한다. 그를 '백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가 세계나 의미와의 연관성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일 뿐이다. 바틀비는 한 때 죽은 우편물, 즉 배달 불가능한 우편물을 담당하는 관청직원으로 일한 적 있다..
활동적 삶 한나 아렌트는 ‘활동적인 삶’ 이라는 책에서 사색적 삶을 우위에 놓는 정통적 입장에 맞서 활동적 삶의 가치를 복구하고, 그 내적 다양성을 새롭게 표현하려고 시도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사회는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격하시키는 노동사회로서 모든 가능성을 파괴해 버린다. 그녀는 개인의 삶이 근대에 와서 인류 전체를 지배하는 삶의 흐름속에 완전히 잠겨버렸으며, 오직 더 잘 기능할 수 있도록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는 것 뿐이라고 주장한다. 다윈 이래 인간은 동물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이제 다시동물로 변신하려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모든 인간활동이 충분히 멀리 떨어진 우주의 어느 시점에서 관찰될 경우, 활동이라기보다 생물학적 과정으로 보일 것이라고 가정한다. 우주의 관찰자에게 기계화는 인간의 ..
성과사회 , 깊은 심심함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더 이상 오늘의 사회가 아니다. 오늘의 사회에는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이 사회 주민은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규율의 패러다임은 '성과의 패러다임' 내지'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으로 대체된다. 알랭 에랭베르에게 우울증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후기 근대적 인간의 좌절에 대한 병리학적 표현이다. 우울증을 초래하는 요인 가운데 사회의 원자화와 파..
신경성 폭력 '시대마다 그 시대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라는 문장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그리고 심리장애를 오늘날 성과 사회의 근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반적인 패러다임 전환의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 특히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성과사회의 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으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것이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루어진다. 시대마다 그 시대 고유한 질병이 있다. 그래서 이를테면 '박테리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적어도 항생제의 발명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 우리는 오늘날 더 이상 바이러스의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다. 21세기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수 있다. 신경성질환들 이를테면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