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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철학 (지바마사야 지음, 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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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공부란 기존의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기존의 자신은 환경 속에서 보수적으로 살아왔다. 이것은 환경의 당위에 동조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한편 공부란 다른 사고방식을 쓰는 환경으로 이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환경의 동조로 들어가는 일이다. 이때 익숙하지 않은 언어가 주는 위화감에 주의 해야 한다. 특정한 환경의 용법에서 해방되어 다시 다른 용법을 부여받을 가능성이 열린 언어의 모습이다. 이것을 용기 (容器) 없는 언어라고 부른다. 레고블록 조각을 맞추듯 언어를 자유롭게 조합하는 언어 유희야말로 삶의 가능성을 풍부하게 상상하는 일이다. 깊은 공부 래디컬러닝이란 자기를 파괴하고 가능성의 공간으로 몸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환경의 동조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동조에 서툰 말을 하는 것이다. 동조에 서툰 ..
글 쓰기 공부란 기존의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할 시간과 공간을 기존의 생활 속에 마련하는 것이다. 공부를 하면 이중생활이 시작된다. 또 다른 타임라인이 생긴다. 갑자기 공부를 한다는 것은 부담이 크다. 기존의 생활속에 있으면서 없는 상태로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 공부 타임라인의 구체적인 존재라고 말하면 호들갑스럽지만, 이것은 단순히 말하자면 바로 공부용 노트다. 노트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다. 공부용 노트에는 미래의 가능성과 과거의 집착이 상호작용 한다. * 대표적으로 에버노트나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에 있는 원노트가 있다. 공부의 경과를 노트에 쓰는 것은 공부의 지속 면에서 중요하다. 무엇을 읽었는 어디까지 생각했는지 무엇을 아직 모르겠는지 등을 적고, 언제든 쉽게 열 수 있도록 저장해 둔다. 거점이..
독서의 기술 독서의 기술1: 텍스트 내재적으로 읽기 독서에서 중요한 점은 자신이 체감으로 끌어당겨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어려운 책을 읽는 일이 어려운 이유는 무리해서 이해하려고 애쓰며 읽기 때문이다. 내 감각으로 말하면, 독서라는 것은 모르는 방에 불쑥 들어가서 물건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과 닮았다. 이때 물건이 왜 그곳에 놓여 있는지 그 의미를 곧바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해하기 이전에 쓰인 용어의 종류나 논리적인 연관성을 파악해야 한다. 이것은 텍스트의 짜임새, 즉 구조를 분석하는 일이다. 이제부터는 글 쓰여진 모든 것을 텍스트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자신의 체감으로 끌어당기지 않고 읽는다는 말은 곧 어떤 텍스트를 ‘텍스트 내재적’으로 읽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텍스트의 구조(설정)안에서 각 개념이 어..
공부의 기술 환경에 제약당한 나머지 가능성을 좁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언어를 더욱 자유롭게 사용하는 상태, 즉 언어 편중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 환경의 동조로 속단하지 말고 멈춰 서서 환경을 메타적으로 바라보고 언어를 아이러니, 유머적으로 사용하여 다른 가능성을 수 없이 고찰해야 한다. 공부를 하면 동조에 서툴러지고 재수 없어지고 약아빠진 사람이 된다. 공부하는 이상 그것을 피할 수 없다. 그것 없이는 깊은 공부가 불가능하다. 근육단련으로 근육량을 늘릴 때 동시에 지방이 느는 것과 마찬가지다. 향락적 집착이란 자신의 바보스러움이다. 바보는 영어로 idiot이다. 고대 그리스어의 idios에서 왔다. '개인의 특이한'이라는 뜻이다. 향락적 집착은 아마도 변화 가능하다. 공부의 시야를 넓혀 자신의..
집착 고찰해야 할 대상은 비교를 계속하는 한편 비교를 중지하는 것이다. 이것을 결단이 아닌 비교를 중단한다고 표현하자. 비교를 계속하면서 임시로 더 나은 결론을 내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임시 고정의 결론을 지속적인 비교속에서 서서히 포기하고, 또 다른 임시 고정의 결론으로 옮겨가야 한다. 어떤 결론을 임시 고정해도 비교는 계속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매일 정보수집을 계속해야 한다. 다른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정보를 검토하여 계속 축적한다. 이것이 공부를 계속하는 일이다. 아이러니 (지나치게 파고드는) 방향으로 비교를 끊어버리려 하면 자칫 결단주의로 흘러간다. 그렇다고 비교를 하지 않으면 유머(한눈팔기)방향으로 복수의 타자 사이를 한없이 헤매고 다니는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지금까지 이어온 논의에서..
결단주의 vs 비교 키워드를 도출하여 들어맞는 분야를 생각해나가는 방식으로 진행하다보면, 공부의 범위는 점점 넓어진다. 공부이 유한화가 필요하다. 공부는 두 방향으로 한이 없어진다. 추구와 연상, 아이러니와 유머라는 방향으로, 바꿔 말하면 지나치게 깊이 파고들기와 한눈팔기다. 공부는 아이러니가 기본이므로 깊이 파고 들어가다보면 한눈팔기가 자주 일어난다. 어떤 입문서를 딱 한권만 읽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인데, 페미니즘이라는 간결한 단어의 이면에는 복잡한 논쟁이 존재한다. 세상의 진리가 결국 모습으로 드러내는 최후의 공부, 과연 그런 것이 존재할까? 절대 최후의 공부를 하려 해서는 안된다. 절대적인 근거를 추구하지 말라는 소리다. 지나치게 깊이 파고들기-한눈 팔기- 지나치게 깊이 파고들기- 한눈팔기... 이 프로세스를 멈추고 ..
공부란 우선은 생활의 다양한 장면을 한 발 물러나 바라보면서 우리가 어떤 환경속에서 어떤 당위(코드)에 맞추고 있는지를 파악한다. 업무방식, 연애관, 좋아하는 음악 등에 대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한 발 물러난 시점, 즉 메타적 입장에서 파악해야 한다. 이것이 아이러니 의식이다. 이 지점에서 공부가 시작된다. 일상생활에 일부러 의심의 칼날을 들이대어 문제를 수면에 떠오르도록 만든다. 문제화 하는 것이다.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공부다. 문제에서 시선을 돌린다면 공부란 불가능하다. 거듭 말하지만 공부란 동조에 서툰 사람이 되는 일이다. 때로 그것은 불쾌한 일일지도 모른다. 공부란 문제의식을 지니는 것이다. 뭔가 석연치 않고 불쾌한 이 상태를 일부러 즐겨야 한다. 바로 이것이 향락하려는 태도다. 가까운 문제의..
아이러니에서 유머로 어떤 작품, 캐릭터, 맛이나 색, 말 등에 집착하는 것, 그것이 왜 자신에게 중요한 일일까? 집착이란 우연히 피어나는 것, 타자와의 우연한 만남에 의해 발생한 것일 뿐이다. 집착에는 인생의 우연성이 각인되어 있다. 우연한 만남의 결과로서 우리는 개성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트라우마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경험이며 불쾌이면서도 쾌다. 그것은 의미 이전의 만남이다. 집착이란 우연하고 강도적인 만남의 흔적인 것이다. 그 불쾌이자 쾌를 반복적으로 맛보는 것이 바로 향락이다. 향락적인 말은 곧 강도적인 말이다. 의미를 전하기 위해서가 아닌 강도적 언어의 존재 방식을 언어의 '비의미적 형태'라고 부르기로 하자. 감축적 유머의 극한은 형태의 난센스다. 아이러니와 유머의 극한에서는 그야말로 의미가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