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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남북 분단과 세계의 동서 냉전 일제로부터 해방된 우리 민족은 이제 우리 손으로 정부를 수립하여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것이 순진한 생각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우리에게 미처 생각하지 못한 크나큰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다. 해방은 우리 손이 아닌 연합군 덕으로 이루어졌고 이후 우리 민족의 운명은 연합국의 결정에 따라 정해졌다. 그러나 해방이후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려면 먼저 당시 연합국의 우두머리인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해방 직후 미군은 남한 땅에 진주해서 중앙청에 걸려 있던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했다. 같은 시기 소련은 평양에 진주하여 자기네 국기를 게양하고 있었다. 아니 왜 우리 땅에 외국군대가 그것도 두 나라의 군..
우리나라를 만들어 갈 사람은 바로 우리들이다. 한국의 신간회와 중국의 국-공 합작 사회주의자는 자본주의를 뒤집어엎으려는 사람들이었다. 민족주의자는 사회주의를 제거하고 자본주의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이었다. 1919년의 3.1운동은 온 민족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하나로 단결하여 일제에 반대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3.1운동이 끝나고 민족운동은 분열의 시기를 맞았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세력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3.1운동전까지 독립운동을 이끌어온 세력은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사실 그때까지는 민족주의자 외에 다른 세력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3.1운동 이후 사회주의 세력이 등장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제국주의란 자본주의의 발전된 형태였다. 그러므로 사회주의는 제국주의를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고..
동학농민운동과 프랑스혁명 동학농민운동과 프랑스혁명 경상도 경주의 몰락한 양반 중 최제우는 1860년에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동학이란 서양학문인 서학에 반대하는 목적을 담고 있었다. 서학은 천주교를 가리키는 말이다. 동학은 서양세력의 동양침략에 반대했다. 또한 동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평등사상에는 조선의 신분제를 부정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조선 정부는 조선 사회 근본틀인 신분제를 부정한다는 이유로 동학을 금지했다. 또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백성을 속인다는 죄목으로 그를 사형에 처했다. 신분제 때문에 고통 받고 있던 백성들은 동학에 빠졌다. 서양세력의 침략과 신분제 때문에 이중으로 고통 받던 농민들이 동학에서 희망을 찾은 것이다. 동학 농민군은 나쁜 관리를 제거할 것, 신분제를 폐지할 것..
조선, 중국, 일본의 개항 조선, 중국, 일본의 개항  1863년 조선에서 고종이 임금 자리에 오르면서 그동안 일부 가문이 나랏일을 좌우하는 세도정치가 끝났다. 그러나 고종은 왕 노릇하기에는 아직 어려서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모든 나랏일을 맡아보았다. 선진 자본주의 열강 가운데 프랑스가 조선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1866년 조선 정부가 프랑스 신부 9명과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사건이 그 구실이었다. 다음 차례는 미국이었다.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이 콜로라도호를 앞세우고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미국에게도 핑계는 있었다. 병인양요가 일어났던 1866년 대동강에서는 제너럴 셔먼호가 행패를 부리다가 불에 탔다. 미국은 이를 트집 잡아서 1871년에 강화도를 공격했다. 외국군대를 두 번이나 물리친 조선은 축..
제후국 조선과 황제국 명明 제후국 조선과 황제국 명明  조선은 이성계가 세운 나라다. 고려 말,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신진사대부의 혁명파와 손을 잡았다. 조선왕조의 설계자라고 불리는 정도전과 권근이 혁명파의 대표인물이었다. 고려시대가 끝나고 조선이 탄생할 무렵, 중국에서는 몽고족의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등장했으나 조선과 명나라는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조선이 요동을 정벌하려했기 때문이다. 요동을 정발하자는 주장은 고려 말, 명나라가 철령 부근을 자기네 땅이라고 내놓으라고 요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철령부근은 원나라가 빼앗아 간 것을 고려 말에 되찾은 것인데 명나라 내놓으라고 하자 이성계에게 요동을 정벌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와 우왕과 최영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
무신정권과 세계의 무사들 무신정권과 세계의 무사들 고려는 호족이 세운 국가였다. 우리가 잘 아는 왕건은 호족 대표였다. 하지만 왕건은 전국의 호족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다. 고려가 안정기에 들어선 것은 네 번째 왕 광종이 실시한 개혁조치를 통해서였다. 당시 호족 세력은 노비로 이루어진 개인 군대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이때 광종이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다시 양인으로 돌려놓았다. 호족들은 군사적 기반을 잃었고 그제야 하는 수 없이 고려의 신하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력기반이었던 출신지역을 떠나 수도 개경으로 가서 귀족으로 변신했다. 이들은 왕족과 혼인을 맺거나 귀족끼리 결혼하는 식으로 가문을 이어갔다. 이들을 문벌귀족이라 부른다. 문벌귀족은 특권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음서와 공음전이 대표적이었다. 음서란 아버지가 ..
신라의 삼국 통일과 프랑크 왕국의 서유럽 통일 원래 고구려는 산악지대에서 성장한 국가였다. 식량이 부족한 고구려는 주위에 있는 나라들을 정복해서 공물을 받으며 살았다. 부여, 옥저, 동예 등이 고구려에 공물을 바치는 나라들이었다. 이렇게 나라를 키워가던 고구려는 4세기 무렵 큰 위기를 맞는다. 용감하고 싸움 잘하던 고구려 사람들조차 두려움에 떨게 만든 백제의 근초고왕이 등장한 것이다. 백제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이런 위기에서 나라의 기틀을 다잡은 왕이 소수림 왕이었다. 소수림 왕은 불교를 받아들여 국가정신을 통일했다. 소수림 왕은 나라살림을 잘해서 조카인 광개토대왕이 밖으로 활발한 정복활동을 할 수 있는 밑바탕을 마련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이 땅을 빼앗고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 서북쪽으로 후연을 격파하여 요동을..
고인돌 ~ 불교 이 세상은 각 분야의 유능한 전문가들을 원한다. 어떤 한 가지 지식을 확실히 갖추지 못한 채 통합적 지식만 운운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기 쉽다. 그러나 어느 한 분야의 뛰어난 전문가가 되려면 그 분야와 연관되어 있는 여러 분야의 지식과 소양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국사를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살펴보는 것은 온 세계가 하나의 마을처럼 서로 기대어 생활하는 현대에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뉴욕에 있는 투자자가 실시간을 한국기업의 주식을 사고파는 공간이다. 우리는 우리 바깥 세계와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고인돌과 피라미드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무덤이었다. 큰 고인돌은 무게가 수십 톤이 된다. 아무나 이 거대한 무덤을 가질 수 없다. 아주 특별한 사람만이 이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