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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5 장제스가 토벌에 여념 없던 1931년에 일본의 관동군이 만주의 중국군을 기습했다. 이 9.18사건이 만주사변의 시작이었다. 청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서구열강이 상대적으로 소홀한 만주를 중점적으로 개발했다. 1932년 만주를 손에 넣은 일본은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웠다. 한창 뻗어가던 일본경제는 1929년 대공황으로 제동이 걸렸다. 당시 만주는 청년군벌 장쉐량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관동군은 손쉽게 만주전체를 장악했다.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에게 적은 공산당과 일본이었다. 장제스는 먼저 국내를 안정시킨 뒤 외세를 몰아낸다는 것을 기본노선으로 삼았다. 일차 목표는 공산당과 홍군이었다. 장쉐량도 일본에 저항하지 않았다.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해 항일운동 중심지인 상하이를 공격했다. 장제스는 공산..
동양사-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4 1912년 1월1일 쑨원은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쑨원은 임시 대총통을 맡았다. 청조정에서는 위안스카이에게 사태해결을 맡겼다. 쑨원은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자리를 양보하겠다고 제의했다. 위안스카이 압력으로 어린황제 선통제는 4년만에 퇴위했다. 그가 마지막 황제 푸이다. 청제국은 297년의 사직을 끝으로 멸망했으며 동시에 진시황이 대륙을 통일한 이래 2133년 동안 지속된 중국의 제국시대도 종말을 고했다. 쑨원과 위안스카이는 우리 현대사에서 김구와 이승만 관계를 연상시킨다. 쑨원은 권력을 장악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때 마다 분쟁을 피하기 위해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했다. 위안스카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재나 제정 복고를 꾀했다. 시행착오를 거듭한 중국의 근대화 노력은 결국 공화정 체제로 개혁하..
동양사-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3 당시 만주의 주인인 만주족(여진족)에게 명은 관직도 주고 조공무역도 허락하는 등 북변을 침범하지 않도록 무마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1588년 누루하치는 만주일대를 통일했다. 후금이 랴오둥에서 랴오허를 건너 랴오시까지 진출하자 명은 군대를 파견했다. 그래서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했을 때 명의 주력군은 만주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칸위를 물려받은 홍타이지는 후금을 본격적인 수권정당으로 탈바꿈 시킨 인물이다. 이자성이 베이징을 장악하는 바람에 만주로 파견된 명의 군대를 갈 곳이 없어졌다. 총 사령관 오삼계는 청에 항복하고 이자성의 반란군을 진압하기로 마음먹었다. 1644년 이자성을 물리치고 꿈에도 그리던 베이징에 입성했다. 베이징을 점령한 뒤에 청은 한동안 통일제국을 갖추지 못했다. 청淸은 오삼계를 비롯한 한..
동양사-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2 걸출한 군주인 명 태조는 자신의 사후에 대비했다. 원래 건국자가 죽으면 후계를 둘러싸고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는 법이다. 이런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태조는 아들들을 모두 변방 요지를 지키는 번왕藩王으로 만들어버렸다. 태자가 일찍 죽은 탓에 태조는 손자를 태자로 책봉해 두었다. 태조가 죽자 손자가 건문제로 즉위했다. 호랑이 같은 태조가 죽자 건문제의 삼촌들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가장 강력한 삼촌인 연경의 번왕이 군대를 이끌고 난징으로 쳐들어와 조카를 손쉽게 제압하고 제위를 차지하였다. 그가 영락제 성조이다. 영락제가 즉위하자마자 맨 먼저 한 일은 수도를 난징에서 북쪽 연경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자신의 세력근거지를 전국의 중심지로 만든 것이다. 영락제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고 베이징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동양사-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1 한족은 북방민족을 미개하게 여겼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최초 유목민족국가가 생긴 것은 한족漢族 최초의 통일국가가 생긴 것과 때를 같이 한다. 진秦제국이 중국을 통일했을 때 북방에서는 강력한 흉노제국이 탄생했다. 흉노는 한漢제국 초기만 해도 조공을 받을 정도로 강성했으나 기원전 2세기 중반 한 무제의 공략에 밀려나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다. 그 후 1세기 무렵에 중국주변에서 흉노는 이리저리 갈라져 본래 형체는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유럽에서 사정은 다르다. 동유럽에 자리 잡은 흉노는 신의 재앙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아틸라의 지휘아래 유럽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다. 당시 로마는 게르만족 일파인 고트족과 반달족 등의 유목민족들의 침략을 받은 사실이 있었지만 동방에서 온 흉노는 막강한 상대였다. 흉노의 최대의 무기..
동양사 -일본 3 30년에 가까운 고려의 치열한 항쟁을 물리치고 1258년에 고려를 정복한 몽골의 쿠빌라이 칸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자고 했다. 바쿠후는 거부했다. 1274년 몽골과 고려연합군은 900척의 함선과 3만3천명의 병력으로 원정을 출발했다. 원정군은 쓰시마와 이키를 순식간에 정복하고 규슈에 상륙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태풍은 산더미 같은 해일을 동반하면서 정박해 있던 몽골군의 선박을 궤멸시켜버렸다. 군대는 남은 함선을 추슬러 간신히 귀환했다. 하지만 원세조는 포기하지 않았다. 남송을 정복한 뒤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일본에서는 사신을 참수해 버렸다. 2차원정이 결정되었고 원정을 담당하는 조직을 구성했다. 정동행성이다. 4만 명의 몽골군과 고려연합군이 선발대였고 남송군 10만여명이 후발대로 편성..
동양사 -일본2 일본은 645년 다이카 개신으로 고대국가 기틀을 갖추고 당대의 동북아시아 여러 민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중국의 당제국은 동북아시아의 패자 일뿐 아니라 세계적 선진국으로 일본이 모방모델로 삼은 것은 당연했다. 한반도가 고대 삼국으로 분리되어 있을 때 백제로부터 당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섬이란 양면적 조건이다. 외부의 침략을 막기에 더 없이 좋지만 폐쇄적일 수 있게 때문이다. 곧 일본민족은 열도에 갇혀 지내려하지 않고 외부의 영향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 뒤 일본은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당의 문물과 제도를 직수입하기 시작했다. 당의 제도를 모방해 율령을 만들고 당의 수도인 장안을 모방해 헤이조를 건설했다. 다이카 개신으로 탄생한 율령체제의 경제적 토대는 모든 ..
애착 공동체를 만들자 어느 비 오는 날 관악산 연주암을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 오르고 있다. 아마 아이에게 좋은 추억이 되었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나도 손자와 함께 그러고 싶었지만 자식과 며느리, 할매까지 결사 반대이다. 은퇴 이후 아이들이 나의 친구였다.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아이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했다.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함께 지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의 사고와 어른의 사고가 같을 수 없으며, 좋아하는 것이 같을 수 없고, 일상이 같을 수 없다. 먹고 마시고 노는 일상, 취향, 사고가 다른 아이와 함께 하는 것은 부모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요즘 아이들은 일찍부터 교육을 위해 어딘가에 누군가에게 맡겨진다. 일찍부터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길들여진다. 아무리 좋은 장난감도 함께 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