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고구려는 산악지대에서 성장한 국가였다. 식량이 부족한 고구려는 주위에 있는 나라들을 정복해서 공물을 받으며 살았다. 부여, 옥저, 동예 등이 고구려에 공물을 바치는 나라들이었다. 이렇게 나라를 키워가던 고구려는 4세기 무렵 큰 위기를 맞는다. 용감하고 싸움 잘하던 고구려 사람들조차 두려움에 떨게 만든 백제의 근초고왕이 등장한 것이다. 백제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이런 위기에서 나라의 기틀을 다잡은 왕이 소수림 왕이었다. 소수림 왕은 불교를 받아들여 국가정신을 통일했다. 소수림 왕은 나라살림을 잘해서 조카인 광개토대왕이 밖으로 활발한 정복활동을 할 수 있는 밑바탕을 마련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이 땅을 빼앗고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 서북쪽으로 후연을 격파하여 요동을 포함한 만주 대부분을 차지했다. 고구려가 힘을 키워가던 시기에 중국은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다. 고구려는 백제, 신라, 왜 등을 자기 세력권으로 거느리는 동북아시아 천하의 중심이었으며, 중국의 여러 나라와 대등하게 맞서는 강대국이었다. 이처럼 당당하던 고구려가 6세기말 다시 위기를 맞았다. 중국이 하나로 통일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가 백만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침략했다. 이 전쟁은 수나라가 망한 뒤에도 중국의 새로운 당나라와의 싸움으로 이어지는 길고 고단한 역정이었다.
중국은 589년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기까지 370여 년의 기나긴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장강이북의 화북지역에서는 여러 북방민족이 침입하여 수많은 왕조 세워 5호16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그러자 한족은 강남으로 피난하여 자기들의 왕조를 세우게 된다. 이 시기를 위, 진, 남북조 시대라고 부른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남조와 북조의 문화는 각기 다른 특징을 띠었다. 한 족 중심의 남조에서는 귀족사회가 발달했다. 그리하여 유교적 권위를 부정하는 자유분방한 노장 사상과 청담사상이 크게 유행했다. 이에 반해 북조에서는 유목민의 강건한 기풍을 보였다. 중국이 남북조로 나뉘어 혼란을 거듭하고 있을 때 고구려는 비교적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장수왕은 남북조 모두와 교류하면서 나라의 힘을 키웠다. 그러나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동북아시아이 정세는 급격히 바뀐다. 수나라는 몇 차례 고구려 정벌에 나섰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전쟁의 부담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고구려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 태종은 중앙아시아와 돌궐을 정복하여 대제국을 건설했다. 당나라는 신라의 도움을 받아 668년 드디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신라마저 집어삼키려 했다. 그러나 신라는 고구려, 백제의 유민들과 협력하여 당나라군을 내쫓았다. 옛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발해가 세워지면서 동북아시아를 통째로 지배하려는 당나라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당나라는 건국 된지 100년 만에 쇠퇴하기 시작했다. 875년에 일어난 황소의 난으로 깊은 혼란에 빠졌다. 결국 907년 지방에서 국방의 책임을 맡고 있던 절도사 주전충이 당나라의 숨통을 꾾었다. 그러자 발해와 신라도 곧 위기가 닥쳐 당나라와 운명을 같이 했다.
신라의 삼국 통일과 프랑크 왕국의 서유럽 통일
오늘날 우리는 동족인 고구려, 백제, 신라가 통일하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남북이 통일되면 좋은 것처럼.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지금 우리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로에게 적이었다.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어야 했다. 상대가 나와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이겨야 할 상대라는 생각이 훨씬 컸다. 다시 말해 삼국시대에는 서로가 종족이라는 의식이 약했다. 동족이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는 의식이다. 그리고 그런 의식이 생기려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생활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고구려인, 백제인, 신라인에게는 그런 공동의 역사가 없었기 때문에 동족의식이 약했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동족 의식은 삼국통일 이후에야 비로소 생겨났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을 완수하던 그 시기, 유럽에서도 오늘날 서유럽의 기원이 되는 통일국가가 출현했다. 바로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왕국이다. 800년 카롤루스 대제는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았다. 서로마제국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나라였다. 로마는 기원전 8세기 중엽 라틴족 사람들이 티베르 강가에 세운 나라에서 출발했다. 로마는 옥타비아누스가 황제가 되면서 제국으로 발돋움하여 200년간 번영을 누렸다. 로마제국은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라고 부를 만큼 넓은 영토를 자랑했다. 로마는 3세기 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군인들이 저마다 황제가 되겠다고 싸움을 일삼았고 이민족의 침입하면서 위기를 만난 것이다. 결국 395년 로마제국은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되었고 뒤이어 476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되었다.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은 카를로스 대제가 바로 게르만족이었다. 게르만족은 원래 발트 해 연안의 북유럽에 살았다.
게르만족은 수많은 나라를 세웠지만 대부분 오래 가지 못했다. 문화수준이 낮고 인구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게르만족이 세운 국가 중에 제대로 된 나라가 딱 하나 있었으니 바로 프랑크 왕국이다. 카를로스 대제가 다스린 8세기 후반은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였다. 그의 정복활동으로 프랑크 왕국은 옛 서로마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에 로마 교황 레오3세는 카를로스 대제를 이미 사라진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고 황제 관을 선물하기로 했다. 이로써 카를로스 대제는 그리스에서 로마로 이어지는 고대라틴 전통, 그리스도교 신앙, 게르만 문화라는 세 가지 유산을 한데 합친 역사적 인물로 등극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요소는 새로운 서유럽 세계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카를로스 대제가 세상을 떠나자 그이 후손들이 저마다 이 큰 나라를 차지하겠다는 내분이 있었다. 결국 카를로스 대제 후손들은 베르됭조약과 메르센 조약을 맺고 왕국을 동프랑크, 서프랑크, 중프랑크 이렇게 셋으로 나누었다. 이 세 나라가 바로 오늘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기원이다. 카롤루스라는 이름은 로마사람들이 쓰던 라틴어발음이다. 독일에서는 카를, 프랑스에서는 샤를마뉴라 부른다. 한편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시작된 서유럽의 중세는 카롤루스 대제의 노력으로 결실을 맺었다. 우리나라가 고구려, 백제, 신라로 대표되는 여러 갈래의 문화와 불교라는 보편적인 종교를 아우르며 중세로 나아갔으며, 서유럽은 라틴 게르만 계통의 문화전통과 그리스트교라는 보편적인 종교를 아우르며 그들 나름의 중세로 나아갔다.
코리아의 탄생과 세계문명의 용광로 이슬람 문명
고려의 국제무역항인 벽란도에는 이슬람 상인이 많이 드나들었다. 그들은 고려를 코리아라 부르며 서방에 널리 알렸다. 오늘날 세계인이 우리나라를 부르는 코리아라는 이름은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고려가 우리에게 물려준 것은 코리아라는 국제적인 이름만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의 기본 틀도 바로 고려 때 만들어졌다. 통일신라가 망해 가던 시기에 전국 각 지방에는 호족이 성장하고 있었다. 호족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기반으로 각 지방을 통치했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지방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던 상황에서 호족은 그 지역의 작은 왕과도 같았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호족들은 두 개의 나라로 통합되어 통일신라와 맞섰다. 먼저 옛 백제지역에서는 견훤이 오늘날의 전주인 완산주를 중심으로 후백제를 세웠다. 또 옛 고구려지역에서는 궁예가 강원도 철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모았다. 이렇게 해서 옛 고구려, 백제를 부활시킨다고 나선 두 나라가 통일신라와 힘을 겨루는 후삼국 시대가 열렸다.
후삼국시대가 열린 것은 우리 조상들이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도 아직 하나가 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인, 백제인들은 자기 나라가 신라에 통합되었다고 해서 자기 자신이 신라의 백성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국이 신라에 의해 망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나라를 되찾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삼국통일이후 200년이 훨씬 넘는 세월동안 옛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람들이 서로 조금씩 섞이기도 했다. 그러나 완전한 통합에 이르지는 못했다. 통일신라의 지배력이 느슨해지자 옛날 망한 고구려와 백지를 되찾자며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출현한 것이다. 국호에 한계가 있었지만 고려는 우리 조상들이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각 지방에서 힘깨나 쓰던 호족세력이 고려의 중앙귀족이 되자 자신이 신라와 백제의 후손이라는 의식이 점차 엷어졌다. 진정한 삼국통일은 고려시대에 이루어진 셈이다. 이런 점에서 고려는 우리에게 코리아라는 대외적인 국호와 더불어 통합된 민족의식을 남겨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슬람교는 불교, 그리스도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다.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도교는 기원 전후에 창시되었다. 이슬람교는 7세기에 창시되었으나 출발이 다소 늦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이슬람교는 어떻게 해서 짧은 시간 안에 세계적인 종교로 부상할 수 있었을까? 이슬람교가 탄생한 곳은 아라비아반도 메카다. 이슬람교가 생겨날 무렵 홍해와 맞닿아있는 메카는 새로운 교역로로 부상되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중국 장안에서 파미르공원, 이란고원을 거쳐 지중해에 이르는 비단길이 거쳐 가는 지역인 동로마제국과 사산왕조, 페르시아 계속 전쟁을 벌이는 탓에 상인들이 안심하고 이 길을 이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새롭게 발굴된 교통로가 바로 홍해를 거쳐 지중해로 가는 바닷길이다. 바다의 길목에 있는 메카가 상업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아라비아반도에 살고 있던 부족들은 저마다 자기네 신을 믿고 있었다. 그 때문에 부족들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반목을 거듭했다.
이때 무함마드가 나타났다. 그리고 알라를 단 하나의 신으로 믿는 이슬람교가 탄생했다. 알라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가르침은 민중의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다. 메카의 지배층은 이렇게 성장하는 이슬람 세력이 두려운 나머지 무함마드가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며 박해했다. 세력을 키운 무함마드는 메카를 되찾았고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통일했다. 이슬람교가 짧은 기간에 세계종교가 될 수 있었던 힘은 정치와 종교의 일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슬람 세력은 종교와 국가 조직을 하나로 결합하여 세력을 키웠다. 이슬람교가 팽창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비결은 평등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알라와 인간 사이에 어떤 매개체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슬람교에는 크리스트교의 목사나 불교의 승려에 해당하는 성직자가 따로 없다. 모든 신도가 신앙의 주체이다.
너른 포용성 또한 이슬람교의 힘이다. 우리가 이슬람세력을 무슨 테러 집단정도로 생각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슬람교가 탄생한 지역은 전통적으로 문명의 용광로였다. 이슬람 문명은 앞서 살펴본 세계4대문명 중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문명을 어버이로 삼아 태어났다. 지리적으로 동양과 서양의 가운데에 자리 잡은 이슬람문명은 동서 문화를 모두 받아들이며 성장했다. 이슬람 사람들은 서양으로부터 그리스, 로마의 온갖 서적을 들여와 아랍어로 번역했다. 정작 중세유럽에서는 이런 고대 서적이 모두 사라졌다. 이슬람의 번역본들로 다시 유럽에 소게되면서 르네상스가 꽃피기도 했다. 동양으로부터는 인도인들이 발견한 0의 개념을 배워 와 지금 우리가 쓰는 아라비아 숫자를 완성했다. 그런가 하면 중국으로부터 종이, 나침반, 화약 등을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동양의 선진문화를 서양에 전해주는 우편배달 역할도 했다. 한 마디로 이슬람 문화는 세계 문화의 용광로이자 배달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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