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각 분야의 유능한 전문가들을 원한다. 어떤 한 가지 지식을 확실히 갖추지 못한 채 통합적 지식만 운운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기 쉽다. 그러나 어느 한 분야의 뛰어난 전문가가 되려면 그 분야와 연관되어 있는 여러 분야의 지식과 소양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국사를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살펴보는 것은 온 세계가 하나의 마을처럼 서로 기대어 생활하는 현대에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뉴욕에 있는 투자자가 실시간을 한국기업의 주식을 사고파는 공간이다. 우리는 우리 바깥 세계와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고인돌과 피라미드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무덤이었다. 큰 고인돌은 무게가 수십 톤이 된다. 아무나 이 거대한 무덤을 가질 수 없다. 아주 특별한 사람만이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준 고인돌 아래에 묻힐 수 있었다. 이 특별한 사람이란 석기시대에는 없고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야 생겨난 지배자다. 이 지배자를 군장이라고 한다. 청동기시대 지배자인 군장은 각자가 작은 영토를 다스렸다. 이후 세력이 비슷한 군장들이 모여 사로 돌아가면서 왕 노릇을 했다. 이 단계를 연맹왕국이라고 한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뉘었다. 이전의 석기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평등했다는 뜻이다.
청동기시대가 되어 생산력이 발전하자 다른 사람들을 잡아다 노예로 부리고, 그 노예들이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은 곡식을 수확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남은 곡식은 노예의 주인이 고스란히 가져갔고 그 결과 인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뉘게 되었다. 어느 사회든 지배자보다 피지배자가 훨씬 많았다. 피지배자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지배자들에게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이 딴 마음을 목지 못하게 여러 방법을 궁리했다. 그중 하나가 선민選民사상이다. 지배자는 신이 선택한 특별한 사람이고 피지배자는 태어날 때부터 천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고인돌이 바로 그러한 선민사상을 사람들 눈앞에 보여주는 구조물이었다. 지배계급은 사회를 통치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법을 만들고 군대를 조직했다. 행정조직을 꾸려 벼슬아치들이 공공의 일을 맡아보게 했다. 이와 같이 법, 군대, 관료 등으로 사회를 통치하고 관리하는 조직이 바로 국가다.
지구 위에 출현한 최초의 인류는 약 300만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이다. 돌을 가공하여 도구로 사용한 인류는 기나긴 구석기시대를 거쳐 기원전 8000년 무렵 드디어 신석기시대에 접어들었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시작도 그즈음이었다. 신석기시대에는 농경과 목축생활이 시작되었고 이는 인류의 삶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 시기에 인류는 자연을 그대로 이용하던 구석기 시대 생활에서 한 단계 올라선 것이었다. 스스로 땅에 씨를 뿌리고 그 곡식이 익어가기를 기다렸고 들짐승을 가축으로 길들이기 시작했다. 정착생활을 시작하자 인구가 늘어나고 마을이 생겨났다. 이것만으로 문명이 생겨났다고 할 수는 없다. 사회 전체를 관리하고 문자, 상거래, 학문 등을 다루는 계급이 나타나야 비로소 문명사회가 출범하게 된다. 도시가 나타나고 국가가 수립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강가 마을은 점차 도시로 발전했다. 무기를 휘두르는 정복자들은 여러 마을과 도시를 빼앗고 그곳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다. 이러한 정복활동으로 영토가 늘어나고 권력이 강해지면서 도시국가가 생겨났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청동기를 사용한 사람들은 기원전 3500년 무렵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주민이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가 기원전 1000년경에 시작되었다고 보면 이들은 우리보다 2500년이나 앞섰다. 神의 뜻을 받들어 인간을 다스리는 이들은 도시국가에서 제사와 정치를 담당하면서 사람들을 지배했다. 또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신전과 궁전을 건립했다. 세금 내는 백성들이 늘어나고 상거래가 활발해지자 이를 기록하기 위해 문자도 만들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렇게 생겨났다. 거대한 스핑크스와 피라미드는 당시 이집트 문명이 상당히 발달했으며, 그곳 지배자의 권력이 아주 강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동북아시아이 강국 고조선과 중화제국 한나라
역사학자들은 어떻게 고조선의 영토를 추측할까? 바로 땅에 묻혀있는 유물을 통해서다. 고조선 사람들이 사용했던 비파형 동검이나 북방식 고인돌, 미송리식 토기가 별견되는 곳이 고조선의 영토였다고 짐작한다. 지도를 보면 고조선은 중국 요령지역부터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에 걸쳐 있다. 영토가 상당히 넓다. 그렇게 넓은 영토를 가졌으면 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삶을 이어갔을 텐데, 아쉽게도 고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고조선 사람들의 생활은 이 나라의 법률이었던 8조법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3조만 남아있다.
-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인다.
- 남을 다치게 한 사람은 곡식으로 보상한다.
- 도둑질 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곡식으로 보상한다는 말은 개인이 소유한 곡식이 있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조선에 개인이 따로 소유한 곡식, 즉 사유재산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았다는 조항에서도 사유재산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다. 도둑질이란 남의 사유 재산을 훔치는 행위니 말이다. 그리고 노비로 삼았다는 항목을 보면 고조선 사회에 계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성립한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부터 철기문화를 받아들였다. 특히 기원전 194년에 위만이 고조선의 왕이 되면서부터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전래되었다. 고조선의 영토는 꽤 넓었고 강력한 왕과 지배계급도 있었다. 고조선이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갔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고인돌의 주인공인 족장들의 시대보다 발전했음은 틀림없다. 중국이 전국시대 혼란을 겪는 동안 고조선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다가 중국에 한나라라는 통일제국이 등장하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중국에는 처음에 하나라가 있었다하고 그다음 은나라가 등장했다고 한다. 상나라라고 불리는 은나라는 청동기를 사용하고 갑골문자를 썼다. 은나라에서는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왕을 겸하고 있었다.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神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의 뜻을 거역할 사람은 없었다. 고조선의 왕을 단군왕검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단군은 제사장을 뜻하고 왕검은 정치적 지배자를 뜻한다. 은나라가 멸망한 다음 주나라가 나타났다. 주나라 왕은 수도부근만 다스렸다. 지방은 봉건제를 실시하여 왕족이 제후가 되어 다스렸다. 주나라가 세워진 지 약 300년 후에 중국은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약 500년간 지속된 이 혼란의 시대를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춘추시대에는 다섯 개의 국가, 전국시대 일곱 개의 국가가 서로 중국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다. 전국시대 일곱 개 국가 중 하나가 연나라였다. 고조선은 연나라와 요서지역을 경계로 대립했다. 고조선이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강했던 고조선에 위기가 닥쳤다. 진시황이 전국시대의 분열을 끝내고 중국을 진나라로부터 통일하면서부터이다. 진나라가 망한 뒤 중국을 다시 통일한 나라가 바로 한나라다. 한나라는 오늘날 중국의 기본 모습을 만든 나라였다. 오늘날 중국인구의 90%이상이 한족이 세운 국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몽고족이 원나라를 세우고 여진족이 청나라를 세워 중국을 지배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족은 자기 문화에 대해 변치 않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나라는 고조선을 침략했다. 고조선은 내부의 배신자들 때문에 패망하여 한나라 땅의 일부가 되었다.
삼국 불교와 인도불교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나라는 고구려였다. 소수림왕 때인 372년의 일이다. 백제는 그보다 12년 늦었다. 당시 불교는 단순한 신앙에 머물지 않고 국가 정신을 통일 시켜 왕권을 강화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원시적인 형태의 신앙이 있었다. 어떤 부족은 곰을 숭배하고 어떤 부족은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이 모여 하나의 국가를 만들자 문제가 일어났다. 두 부족의 신앙이 달라서 다른 나라의 전쟁을 할 때 힘을 합치기 어려웠던 것이다. 불교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었다. 불교를 통해 백성들 간에 정신적인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이렇게 백성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과정에서 왕의 권력이 강해졌다. 신라에서 불교는 이차돈 순교로 어렵게 인정받았다. 신라는 불교를 받아들이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는 늦었지만, 그렇게 국가의 기틀을 잡은 뒤 매우 빠르게 성장했다. 진흥왕은 법흥왕이 만들어 놓은 살림을 밑천삼아 정복활동에 나섰다. 백제와 힘을 합쳐 고구려를 밀어내고 한강유역을 차지한 다음에 백제를 물리치고 한강의 주인이 되었다.
아소카왕은 인도 최초의 통일왕조였던 마우리아 왕조에서 가장 유명한 왕이다. 그는 중앙집권적인 통일왕국을 건설하고 불교를 널리 장려했다. 인도문명은 기원전 2500년 무렵 인더스 강가의 기름진 평야지대에 나타났다. 그런데 기원전 1000년 무렵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 살던 아리아인이 인도를 침범했다. 아리아인은 태양신, 폭풍신 등 자연신을 찬양하고 그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 아리아인이 만들어낸 종교가 브라만교다, 브라만교에서 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브라만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가장 높은 제1신분이 되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브라만교의 신분 차별과 복잡한 종교의식을 비판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르한 흐름 속에서 기원전 6세기 무렵 석가모니가 불교를 창시했다. 그는 누구나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올바른 수행을 하면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평등사상은 브라만을 꼭지점으로 하는 차별적인 신분제도, 즉 카스트제도로 고통 받던 인도민중에게 환영을 받았다. 신흥왕국의 국왕이나 상인 같이 여러 계층을 아우르거나 고루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도 불교를 반겼다. 전 계층을 아우르는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해 나가던 아소카 왕이 불교를 장려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불경을 정리하고 돌기둥과 불탑을 세워 부처의 가르침을 전파하였다. 아소카 왕은 이 과정을 통해 국가 정신을 통일하고 부처님 권위를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처럼 왕들에게 사랑받던 불교가 인도에서 4세기 초부터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북부인도를 통일한 굽타왕조 때에는 힌두교가 불교를 제치고 널리 퍼져나갔다. 힌두교는 브라만교가 오랜 세월에 걸쳐 민간신앙을 흡수하고 불교의 장점을 받아들이면서 만들어진 종교다. 그래서 힌두교는 특정한 창시자도 없고 체계화된 교리도 없다. 불교는 평등을 강조했지만 카스트제도를 넘어서지 못했다. 일반 신자들은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카스트제도의 규정을 따라야 했다. 그래서 불교는 끝내 생활 속에 뿌리내리지 못했다. 중국불교도 인도불교와 마찬가지로 왕권을 강화하는 기능을 맡았다.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불교가 전해진 뒤 이번에는 백제가 일본의 야마토 장권에 불교를 전파한다. 특히 쇼토쿠 태자가 아스카지방을 중심으로 불교문화를 크게 일으키고 불교를 통해 왕권을 강화했다. 인도에서 출현한 불교는 신분차별에 반대하는 세력을 지지기반으로 삼아 발전했다. 특히 국가정신을 통일시켜 왕권을 강화하려는 왕들이 불교세력을 키웠다. 인도만이 아니라 중국, 우리나라, 일본 등 고대 아시아 국가들은 불교를 발판으로 삼아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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