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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시간에 세계사 공부하기 (김정 지음)

우리나라를 만들어 갈 사람은 바로 우리들이다.

한국의 신간회와 중국의 국-공 합작

 

사회주의자는 자본주의를 뒤집어엎으려는 사람들이었다. 민족주의자는 사회주의를 제거하고 자본주의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이었다. 1919년의 3.1운동은 온 민족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하나로 단결하여 일제에 반대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3.1운동이 끝나고 민족운동은 분열의 시기를 맞았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세력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3.1운동전까지 독립운동을 이끌어온 세력은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사실 그때까지는 민족주의자 외에 다른 세력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3.1운동 이후 사회주의 세력이 등장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제국주의란 자본주의의 발전된 형태였다. 그러므로 사회주의는 제국주의를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고통 받고 있던 우리 민족은 사회주의 사상을 쉽게 받아들였다. 사회주의 사상이 독립운동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었다.

 

대다수 민족주의자들이 딴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일제로부터 독립하기를 포기하거나 먼 훗날의 일로 미루는 것이었다. 이광수 같은 친일파는 우리 민족은 아직 준비가 덜 되어서 독립할 수 없다는 민족개조론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단 일제의 품안에서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고 주장했다. 이런 다수 민족주의자들의 변절을 비판하는 소수의 민족주의자들이 존재했다. 이상재, 홍명희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이광수 등이 민족의 독립을 포기했다고 비난했다. 그래서 소수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바로 사회주의자와의 연합이었다. 둘 사이의 집안싸움은 그만 두고 공동의 적을 향한 싸움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렇게 친일파를 제외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만든 단체가 바로 신간회였다. 신간회는 1927년에 만들어진 이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민족의식을 높이기 위해 강연회를 개최하고 노동자 농민운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들 연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신간회가 만들어진 뒤 일제와 타협하는 민족주의자들이 슬그머니 신간회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신간회는 점점 나쁜 쪽을 변해갔다. 국제적으로도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연합을 좋지 않게 보는 생각들이 퍼졌다. 중국에서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과 사회주의 정당인 공산당의 연합이 깨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런 이유 때문에 신간회는 4년 만에 안타깝게 해산하고 말았다.

 

19195.4운동 이후 중국에는 두 개의 정당이 출현했다. 쑨원은 민족주의자들을 모아서 국민당을 만들었다.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공산당을 조직했다. 이 두 정당은 지향하는 바는 서로 달랐지만 중국 사람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 중국 민중에게는 두 적이 있었다. 하나는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세력이었고 자른 하나이 적은 군벌이었다. 군벌이란 군대를 소유하면서 일부 지역을 다스리는 군사 집단의 두목을 말한다. 1924년 중국 민중의 염원에 따라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싸움을 뒤로 미루고 공동의 적인 군벌을 무찌르기 위해 손을 잡았다. 두 세력은 힘을 한데 합쳐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 연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5년 국민당 대표인 쑨원이 죽고 장제스가 그 자리에 앉자 사정이 달라졌다. 장제스는 기본적으로 공산당을 싫어했다. 장제스는 1934년부터 1936년까지 군대를 총동원하여 공산당 소탕에 나섰다. 그러자 마오쩌뚱이 이끄는 공산당원들은 국민당의 토벌을 피해 먼 길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적대적인 두 세력이 다시 한번 손을 잡는다. 일본의 중국 침략이 계기였다. 1931년 만주를 침략한 일본이 1937년에는 중국대륙 전체를 점령하기 위해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러자 집안싸움을 그만두고 단결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1941년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중국은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일본과 싸웠다. 이 조직된 연합국도 서로 다른 세력 간의 연합이었다. 초기 연합국은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52월에 있었던 얄타회담으로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이 연합국에 참여했다. 자본주의 국가들과 사회주의 국가가 손을 잡은 것이다. 이처럼 서로 적이었던 두 세력이 손을 잡은 것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전체주의라는 공동의 적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양쪽 모두 서로 간의 싸움은 잠시 멈추고 공동의 적에 대항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연합국은 공동의 적인 전체주의에 승리를 거두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공동의 적이 사라진 뒤 그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서로를 적으로 삼았다. 기본적으로 서로가 적인 두 세력은 상황이 조금만 달라지면 다시 대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우리 역사에서 좌우의 연합은 몇 번 더 나타나지만 끝내는 성공하지 못했다. 지금도 한반도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북한과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남한으로 갈라져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대립을 끝내고 하나의 한국을 만들어 갈 사람은 바로 우리들이다.

 

한국의 광복군과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대륙침략을 감행했다. 그때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김구를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도하고 있었다. 앞에서 본 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만주사변이 일어날 무렵 임시정부의 힘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힘이 약한 임시정부는 정식군대로 일본과 전쟁을 할 수 없었다. 임시 정부가 직접 지도하던 군대도 거의 없었다. 만주에 있던 부대들이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에 대항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만으로 일본 군대를 감당하기는 힘에 부쳤다. 독립운동가들은 하는 수 없이 변칙적인 방법을 찾았다. 그것이 바로 개인이 일본인을 상대로 폭탄을 던지는 전술이었다. 폭탄던지기는 혼자서도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봉길 의사는 이 투쟁을 성공시킨 대표적 인물이었다. 하지만 폭탄을 던지는 것만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 천황을 죽이든 일본 대장을 죽이든 또 다른 일본인이 그 자리를 물려받을 테니.

 

이렇게 폭탄던지기 투쟁은 약한 쪽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수단이기는 해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제는 더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바로 군대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식군대가 생겼다. 1940년 중국 충칭에서 만들어진 한국광복군이었다. 이제는 일본군과 정식으로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작은 병력이지만 한국광복군은 일본을 향한 전쟁을 활발하게 펼쳐 나갔다. 중국, 영국, 미국 등의 연합군과 함께 공동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특히 국내에 진입하기 위해 정진군이라는 부대도 만들었다. 그런데 이때 매우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만다. 정진군이 국내에 진입하기 직전인 1945815일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한 것이다.

 

만약 한국광복군이 국내에 들어가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면 사정이 굉장히 달라졌을 것이다. 한국광복군이 직접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그랬다면 미군과 소련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으러 이 땅에 들어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따라서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본이 우리가 아닌 연합국에 항복함으로써 우리의 힘으로 일본을 물리치고 해방된 나라를 꾸려 갈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고 있던 1939년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당시 독일의 통치자는 나치당의 지도자인 아돌프 히틀러였다. 일본과 독일, 이탈리아는 모두 전체주의 국가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서로 동맹을 맺고 있었다. 이 나라들은 왜 제2차 새계대전을 일으켰을까?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발생했다. 자본주의국가들이 상품을 너무 많이 만드는 바람에 상품이 남아돌았던 것이다. 식민지가 많은 영국과 프랑스는 남아도는 상품을 식민지에 팔아서 위기를 헤쳐 나갔다. 그러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가지고 있는 식민지가 적어서 대공황으로부터 큰 타격을 입었다. 이들은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식민지를 빼앗기 위해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1910년 독일은 프랑스 북부를 점령했다. 잘못하면 프랑스 전체가 독일군에 짓밟힐 위기상황이었다. 이때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선 저항군을 레지스탕스라고 부른다. 레지스탕스는 프랑스 말로 저항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하일 히틀러’(히틀러만세)를 외치는 무시무시한 나치군대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1944년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수는 10만 명에 이르렀다. 연합군이 프랑스 북쪽의 해안지방인 노르망디에서 상륙작전을 펼칠 때 레지스탕스는 독일군의 배후에서 온 국민의 무장봉기를 주도했다. 결국 프랑스와 영국의 연합군은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성공시켜 독일군을 무찔렀다. 히틀러의 독일이 프랑스 북부를 점령했을 때 일본은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를 점령했다. 같은 편인 독일과 일본은 손발이 착착 맞았다. 그러나 일본의 일방적인 침략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미국과 영국이 강력히 맞섰기 때문이다. 이에 일본은 1941년 진주만에 있는 미군기지를 공격하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태평양전쟁 초기에 일본의 공세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소련까지 가담한 연합국의 공세 앞에서 일본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위력 앞에서 일본에게는 항복 외 대안이 없었다. 결국 1945815일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전 인류를 공포와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지긋지긋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1910년 강제로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이래 우리민족은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열심히 투쟁했다. 그렇지만 우리 힘으로 일본을 몰아낼 수 없었다. 일본은 연합군에 항복했다, 일본에게 항복받은 미국과 소련이 한국문제를 처리하는데 주도권을 쥐었다. 이것은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되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이와 반대로 프랑스는 레지스탕스를 조직하여 연합군과 함께 실질적으로 전투를 수행하여 독일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 후 프랑스는 레지스탕스를 주도적으로 만든 드골을 중심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우리는 중세사회를 주체적으로 극복한 프랑스 혁명의 예에 이어 또한번 프랑스 역사에서 자기 힘으로 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