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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시간에 세계사 공부하기 (김정 지음)

제후국 조선과 황제국 명明

제후국 조선과 황제국 명

 

조선은 이성계가 세운 나라다. 고려 말,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신진사대부의 혁명파와 손을 잡았다. 조선왕조의 설계자라고 불리는 정도전과 권근이 혁명파의 대표인물이었다. 고려시대가 끝나고 조선이 탄생할 무렵, 중국에서는 몽고족의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등장했으나 조선과 명나라는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조선이 요동을 정벌하려했기 때문이다. 요동을 정발하자는 주장은 고려 말, 명나라가 철령 부근을 자기네 땅이라고 내놓으라고 요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철령부근은 원나라가 빼앗아 간 것을 고려 말에 되찾은 것인데 명나라 내놓으라고 하자 이성계에게 요동을 정벌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와 우왕과 최영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뒤 조선을 세웠다.

 

정도전은 요동정벌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니 명나라와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방원이 정도전을 죽이고 태종이 되면서부터 조선은 명나라에 확실한 사대를 했다. 그제야 명나라는 정식으로 조선을 인정했다. 조선이 명나라에 사대를 했다고 해서 명나라의 속국이 된 것은 아니다. 당시의 사대관계는 형식적인 것으로 명나라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나라이니 이 점을 인정하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약속이었다. 두 나라의 관계는 제후국 조선이 황제국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명나라 황제는 이에 보답하여 조선이 하사품을 내렸다. 일 년에 두 차례 공식적으로 선물을 교환하는 것이 양국관계의 전부였다.

 

한복의 가난한 농민 출신인 주원장은 몽고족의 원나라를 만리장성 밖으로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웠다. 세상의 중심을 찾은 명나라는 중국을 정점에 세우는 국제질서 속에 주변 여러 나라를 포함 시켜려 했다. 명나라는 주변나라의 왕들을 제후로 인정하는 책봉절차를 통해 그들을 중국 황제의 신하로 삼았다. 주변국들은 조공을 바치고 중국 황제는 하사품을 내리는 방식으로 교류했다. 이렇게 서로를 인정함으로써 평화로운 국제질서가 자리 잡았다. 조선 초기 우리 조상은 중화사상의 영향권에 속해 있었다. 즉 당시의 문화 선진국인 중국을 인정하고 평화를 위해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이러한 사대관계는 두루 평화로운 국제질서를 위한 것이었지 조선이 명나라 식민지는 아니었다. 조선은 조선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수준 높은 문화를 일구어 나갔다. 여기서 우리는 중화사상이 결국 중국 자신의 발전을 가로 막았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한다.

 

탕평군주 영.정조와 절대군주 루이 14

 

새로운 정치를 펼치기 시작한 정조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만든 도시가 바로 화성이다. 수도 한성에서는 새 정치를 실현하기 어려웠다. 노론 같은 기득권 세력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탓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지금의 수원에 화성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했다. 아버지 묘를 화성 근처로 옮기고 상인과 수공업자를 화성으로 많이 이주 시켰다. 화성이 완성되고 새로운 정치의 꿈이 무르익고 있었다.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었다. 왕이 죽자 그동안 억눌려 있던 세력들이 복수를 개시했다. 정조가 키운 새로운 인물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개혁은 멈추었다. 영조에는 서인이라는 정당 하나가 정치를 독점했었다. 그러더니 정조 이후에는 가문하나가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렸다. 상황이 개선전보다도 나빠졌다. 늙어가는 조선 왕조는 한때 회생을 꿈꾸었으나 이제 활력을 회복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루이 14세와 같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른 이 시대의 군주를 절대군주라고 한다.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에는 절대군주가 다스리는 절대왕정이 나타났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 나중에 독일이 되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등이 그들이다. 절대군주가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왕을 뒷받침해줄 세력, 즉 관료와 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관료들은 왕의 명령을 전국에 전달했다. 언제나 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군대인 상비군은 군주에 반항하는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했다. ‘절대군주 왕의 권력은 신이 주었다라는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며 왕권을 강화했다. 이전 시대까지 왕과 세력다툼을 벌이던 귀족이나 교황은 이제 이빨 빠진 늙은 호랑이 신세였다. 절대군주들은 자신의 손발 역할을 하는 관료와 군인들에게 월급을 두둑히 주어야 했다. 그러니 많은 돈이 필요했다. 누구나 알고 있듯 국가가 쓰는 돈은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다. 그런데 귀족은 재산이 많으면서도 세금 한 푼 내지 않는 특권층이었다. 왕에게는 귀족을 대신하여 세금을 내줄 돈 많은 계층이 필요했다. 이들이 바로 중세의 세 신분 중 가장 아래에 속했던 시민계급이었다. 시민이란 말 그대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상업과 공업에 종사했다. 절대왕정의 군주들은 상공업자인 시민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절대왕정의 중상주의정책 덕분에 시민계급은 강력한 세력으로 성정할 수 있었다. 이들이 내는 세금이 절대왕정에 튼튼한 기반이 되었다. 시민 중 일부는 직접 관료가 되어 왕의 손발 역할을 했다. 그렇다고 절대왕정시대에 봉건귀족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절대왕정은 무너져 가는 봉건귀족과 새로 강해지는 시민계급의 세력균형 위에 서 있었다. 두 세력 중 어느 한 쪽도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고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시민계급은 절대왕정을 쫓아내고 중세봉건제의 막을 내린다. 영국의 경우 시민계급은 우여곡절 끝에 별다른 유혈사태 없이 권력을 차지했다. 왕정과 시민계급은 타협을 통해 입헌군주제라는 시민권력의 형식을 만들어 냈다. 왕은 국가의 상징으로 존재하되 통치하지 않고 시민들이 구성한 의회가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시민계급이 들고 일어나 기세 등등 하던 절대왕정을 폐지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혁명이다. 프랑스 절대왕정의 마지막 왕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중세말기에 조선에서도 서양에서도 강력한 왕권이 출현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새로운 정치세력이 성장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새로이 등장한 자본주의 세력인 시민계급이 절대왕정의 후원아래 성장했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 절대왕정의 보호를 벗어나 시민혁명을 일으켰다. 시민계급은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시민이 주인인 세상을 열었다. 반면 영조와 정조는 새로운 정치를 시도했지만 새로운 사회세력을 키우지는 못했다. 무너져가는 봉건제를 개혁할 수 있는 세력은 상공업자였는데 조선에서는 이들의 힘이 아주 미약했다. 겨우 싹을 틔운 새로운 세력은 정조가 죽은 후 기득권세력에 의해 제거되고 말았다.

 

조선의 대장간과 영국의 기계 공장

 

돈 많은 상인이 가난한 수공업자에게 원료나 자금을 미리 대주는 제도가 나타났는데 이를 선대제라고 했다. 즉 민간 수공업자들은 상업자본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조선후기에 모내기법이 널리 퍼졌다. 모내기방식으로 벼농사를 짓자 많은 변화가 뒤따랐다. 먼저 수확량이 두 배로 늘었다. 또 김매기가 간편해지자 필요한 노동력이 무려 이전의 절반으로 줄었다. 그 결과 농촌 인구의 반이 실업자가 되었다. 살아남은 나머지 반은 농사지을 땅이 예전의 두 배로 늘었다. 즉 부자농민이 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번 돈으로 땅을 사서 지주가 되기도 했다. 모내기법이 보급되면서 일자리를 잃은 농촌의 실업자들은 농촌에서 품팔이 일꾼이 되었거나 광산에서 막노동을 했다. 아니면 도시로 갔다. 도시인구가 늘어났다.

 

조선후기에는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조선중기까지 세금은 쌀, 보리 등 현물로 냈다. 그런데 상품 화폐경제가 발달하자 정부는 편의를 위해 세금을 돈으로 낼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었다. 지방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제도를 개편한 대동법이 그것이다. 국가에서 대동법으로 거둔 돈을 공인이라는 상인에게 주고 물품조달을 맡겼다. 공인들은 전국의 장시를 돌아다니거나 소공업자에게 부탁하여 국가에 필요한 물건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상품 화폐 경제가 더욱 발달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농업에서 부농이 출현하고 소공업에서 선대제가 그리고 상업에서 대상인이 등장했다. 이런 형상들이 바로 자본주의적 관계다. 우리 역사에서 중세 봉건제를 끝내고 근대 자본주의시대를 여는 새싹들이 출현한 것이다.

 

자본주의 발전은 보통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첫 번째 단계는 선대제다. 부자 상인이 가난한 수공업자에게 원료와 자본을 미리 대주고 생산품을 받아가는 형태다. 두 번째는 공장제 수공업, 즉 매뉴팩처다. 돈 많은 상인이 수공업자들을 한 장소, 즉 공장에 모아 놓고 상품을 생산하는 단계다. 마지만 단계가 바로 공장제 기계공업이다. 여기서 드디어 공장주가 공장에 기계를 모아놓고 노동자를 고용해 상품을 생산한다. 서양의 자본주의는 증기기관을 발판삼아 이 세 번째 단계로 올라섰다. 증기기관의 발명은 교통수단에도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기계를 사용하여 물건을 대량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까 원료와 제품도 대량으로 운송해야 했다. 그래서 증기기관차와 증기선이 발명되었다. 이 순간 전 세계가 갑자기 가까워졌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부터 실 잣는 기계, 옷 짜는 기계, 증기기관, 교통, 통신 수단이 발달하면서 세계는 산업시대로 옮겨가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조선은 세계 여러 나라가 그랬듯이 선대제에서 매뉴팩처 단계로 나아갈 기회를 놓쳤다. 업화에 먼저 성공한 나라들이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후진국을 식민지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