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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시간에 세계사 공부하기 (김정 지음)

조선, 중국, 일본의 개항

조선, 중국, 일본의 개항

 

1863년 조선에서 고종이 임금 자리에 오르면서 그동안 일부 가문이 나랏일을 좌우하는 세도정치가 끝났다. 그러나 고종은 왕 노릇하기에는 아직 어려서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모든 나랏일을 맡아보았다. 선진 자본주의 열강 가운데 프랑스가 조선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1866년 조선 정부가 프랑스 신부 9명과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사건이 그 구실이었다. 다음 차례는 미국이었다.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이 콜로라도호를 앞세우고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미국에게도 핑계는 있었다. 병인양요가 일어났던 1866년 대동강에서는 제너럴 셔먼호가 행패를 부리다가 불에 탔다. 미국은 이를 트집 잡아서 1871년에 강화도를 공격했다. 외국군대를 두 번이나 물리친 조선은 축제분위기에 휩싸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비석까지 세웠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지 10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쇄국정책의 한계가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운 좋게 서양세력은 물리쳤지만 일본이 문제로 떠올랐다.

 

일본군함 운요호는 1875년 강화도에 나타나 대포를 쏘아댔다. 일본은 그전에 프랑스, 미국이 그랬듯 조선에게 항구를 열고 근대적 무역을 하자고 요구했다.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을 물리친 조선이었지만 일본의 대포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876년 조선은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강요로 맺은 강화도 조약에는 조선에 불리한 조항이 많았다. 예를 들면 일본사람이 우리 땅에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다. 또한 일본 돈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던 반면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아도 되었다. 일본이 열어젖힌 항구로 서구 열강이 무더기로 들어왔다. 1882년 미국을 시작으로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과도 불평등 조약이 체결되었다.

 

16세기 신항로개척이후 유럽세력은 앞 다투어 아시아로 진출했다. 처음에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선두를 다투었으나 17세기 이후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권을 잡았다. 청나라에 진출한 영국은 청나라의 엄격한 통제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청나라에서 무역을 허가한 항구도 광저우 단 한 곳 뿐이었다. 게다가 청나라는 차, 비단, 도자기 등을 수출하면서도 도무지 영국이 만든 상품을 수입하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영국이 물건을 사고 지불한 은이 청나라에 쌓여갔고 영국은 은 부족에 시달렸다. 이 상황에서 영국이 생각해 낸 방법이 바로 청나라에 아편을 팔아서 은을 회수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자기네 식민지인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하여 청나라로 밀수출했다. 중국이 마약을 단속하자 영국은 이에 항의하면서 전쟁을 개시했다. 아편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부도덕한 전쟁에서 일방적으로 패한 청나라는 영국의 요구대로 1842년 난징 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했다.

 

얼마 후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애로호 사건를 핑계로 삼아 청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천하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던 청나라가 종이호랑이임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결국 청나라는 서양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했다. 아시아의 최강국이던 중국이 이렇게 무너진 반면 일본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일본은 19세기 초만 해도 조선이나 청나라처럼 서양세력에 대해 쇄국정책을 폈다. 단지 네덜란드와 얼마간 교류를 했을 뿐이다. 그러자 미국이 일본을 개항시키기 위해 나섰다. 나중에 일본이 조선의 강화도에 대포를 쏘아대듯 이때는 미국이 일본 땅을 향해 마구 쏘았다. 일본은 1854년 하는 수 없이 항구를 열었다. 근대 이전의 일본은 청나라는 물론이고 조선보다도 뒤떨어진 나라였지만 개항 이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1868년에는 수백 년간 이어 온 무사지배를 체제를 청산하고 봉건영주가 각 지방을 다스리던 지방분권 체제를 없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천황중심의 중앙집권 국가를 수립했다. 신분제가 폐지되고 산업을 육성하는 근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일본 근대화를 이룩한 정치개혁, 이른바 메이지 유신이었다. 그러나 공업화를 성급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생겼다. 마치 한국의 박정희 정권이 산업화를 추진했을 때 일부 재벌들만 떼돈을 벌고 노동자, 농민들은 가난에 허덕이던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일본은 국내에 들끓는 불만을 없애기 위해 이웃나라 조선을 침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불행히도 이 계획은 성공을 거두었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동아시아 삼국 운명은 이렇게 길렀다. 관건은 개항 이후 주체적으로 노력 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였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은 국내 문제가 생기면 우리나라를 이용해 탈출을 시도한다)

 

김옥균의 삼일천하와 캉 유웨이의 백일천하

 

조선은 개힝 이후 여러 분야에서 전근대적인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우리보다 먼저 개항한 청나라와 일본을 본받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다.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만들고 무기를 제조하는 기기창도 설립했다. 이렇게 개화정책이 진행되고 있을 때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으니 바로 1882년의 임오군란이다. 조선정부가 신식군대 별기군에게만 좋은 대우를 해주고 구식군대는 차별하자 구식군대가 개화정책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고 옛날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가 들어와 반란군을 제압하고 대원군을 청나라로 끌고 갔다. 당시 조선 개화파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한쪽은 조선이 근대화를 신속하게 밀어붙여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는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 박영효 등이 있었는데, 이들을 급진개혁파라고 부른다. 일본 메이지유신을 본받아 사회를 뜯어고치려 했다. 서양과학기술뿐 아니라 신분제도, 정치제도를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다. 한편 개화에는 찬성하지만 개화의 시기나 방법에 의견을 달리하는 온건 개화파가 있었다. 그들은 동양의 정신이나 제도는 그대로 유지하고 서양의 기술만 수용하자고 주장했다. 김홍집이 대표적인 온건 개화파였다. 이들은 중국의 근대화 운동인 양무운동을 모델로 삼았다. 급진개화파는 갑신정변을 통해 조선을 어떻게 바꾸려 했던 것일까? 전체 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봉건제를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바꾸고자 했다. 그리고 신분제를 없애려 했다. 이런 점에서 조선이 가야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한계가 많았다. 우선 민중의 힘을 믿지 않았다. 민중은 무식해서 자신들과 함께 개혁을 이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본세력을 끌어들였다.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힘없이 패한 청나라는 위기상황을 맞았다. 외국에 줄 배상금을 마련하려고 민중에게 세금을 많이 걷어야 했다. 그래서 백성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 졌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이 힘을 뭉쳐 일어난 운동이 태평천국운동이다. 청나라 정부는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할 수 없어 외국의 지원군이 도착했을 때 이 운동을 진압할 수 있었다. 아편전쟁과 천국운동을 겪으면서 중국인은 서양 무기와 기술의 우수함을 확인했다. 이런 깨달음이 1862양무운동으로 나타났다. 양무운동은 사상과 제도는 바꾸지 않고 서양의 기술만 받아들이자는 운동이었다.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양무운동이 일어났음에도 청나라는 일본과의 청일전쟁에서 힘 한번 못 써보고 패배하고 말았다. 정치가 바뀌지 않고서는 경제도 과학기술도 바뀔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서양의 과학기술뿐 아니라 서양의 정지치제도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변법자강운동이 1898년에 시작되었다. 변법자강운동은 개혁 지도자 캉유웨이 주도 아래 강력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청나라 실권자 서태후 등 보수파의 탄압을 받고 100일 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개혁운동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왕조를 타도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쑨원이었다. 쑨원은 중국동맹회를 결정하고 민주독립, 민권확립, 민생안정이라는 삼민주의를 내세웠다. 쑨원을 중심으로 한 혁명파는 마침내 1911년 신해혁명을 일으켜 청나라 왕조를 타도하고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하는데 성공했다.

 

제국주의 세력이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동아시아를 침략하는 상황에서 조선과 중국은 근대화 운동을 일으켰다. 동아시아는 워낙 전통이 깊고 유구했기에 전통적인 정치체제는 그대로 두고 서양의 과학기술만 받아들이자는 근대화운동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 개혁이 실패함으로써 정치제도를 근본부터 바꾸지 않고 기술만 받아들이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들어났다. 갑신정변과 변법자강운동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려했으나 자신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세력을 모으지 못했다. 혁명세력이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운동들은 보수파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쑨원이 내세운 삼민주의는 민중과 혁명세력을 이어주는 통로역할을 했다. 혁명세력과 민중이 함께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중국에서는 변법자강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청나라라는 거대한 제국을 안으로부터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 생겨났다. 안타깝게도 조선의 혁명세력은 민중과 결합하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운명을 막아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