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정이라는 이름의 쿠데타로 즉위한 왕답게 중종의 치세는 대대적인 개혁의 바람으로 출발했다. 태종과 세조도 그랬듯이 정변으로 즉위한 왕은 개혁의 기치를 높이 치세우기 마련이다. 그러나 중중의 경우는 달랐다. 국왕의 임명권자가 사대부인 만큼 왕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중종은 형과 달리 성품이 유약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니 사대부의 입맛에 꼭 맞는 군주였다. 이로써 또다시 공신이 생겨났는데 이 추세라면 얼마 안가 반정공신들이 종래의 훈구파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게 뻔하다. 세조 집권 과정에서도 그랬듯이 비정통적인 왕위계승이 있을 때는 새로운 공신세력이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따라서 새로운 비기득권층 사대부 세력이 생겨나 대립하는 것도 필연이다. 이것이 나중에 당쟁의 뿌리가 된다. 만일 정상적인 욍위계승만 이루어진다면 사대부 힘들어질 것이다. 그렇게 보면 당쟁과 사화는 조선사회가 유교왕국 사대부 국가체제를 취하는 한 불가피한 숙명이었다.
중종 때 다시 유교정치 토대를 갖추게 된다. 중요한 과제는 어떤 건물을 지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중종이 그 작업을 위해 기용한 사람이 조광조다. 조광조는 지방관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간 평안도 희천에서 무오사화로 유배되어 온 김굉필을 만나게 된다. 그로 인해 학문과 경륜만 아니라 장차 미래의 조선을 이끌게 될 사림파의 학맥을 얻게 된다. 조광조는 관직으로 나가기보다 학업에 더 뜻을 두고 있었다. 물을 소가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고 했던가? 학문과 정치가 일치하는 것은 양면의 칼이다. 건강한 학문이라면 그 학문이 정치를 통해 현실에 접목될 수 있으므로 사회발전을 가져오지만, 그 반대일 경우에는 치명적인 독소가 된다. 불행이도 조선의 학문은 사대부를 제외한 모든 계층에게 유해한 학문이었다.
반정세력의 적이었던 신수근의 딸(단경왕후)을 복위시키면 반정의 정당성이 허물어질 뿐 아니라 장차 어떤 피의 보복이 일어날지 모른다. 따라서 반정을 주도한 공신세력은 당연히 정비인 단경왕후 복위를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조광조다. 그는 논쟁의 초점인 단경황후복위 문제에서 벗어나 더 중요한 쟁점을 제기했다. 바로 대사간의 기능에 관한 지적이다. 대사간은 조정에서 논쟁이 벌어졌을 때 교통정리를 담당해야 하는데, 마음대로 상소자들을 유배시킨 것은 언로를 막은 커다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의 입장이 공신들의 반발을 부른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중종의 신임을 받았다.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있었으므로 조광조를 반기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꼭두각시라 해도 국왕이 존재하는 한 사대부도 국정에 대한 전권을 가지지는 못했다. 여러 정변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사대부들간의 세력 다툼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언제나 왕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왕의 신뢰와 자신의 학문을 토대로 그는 본격적으로 개혁의 바람을 일으켰다. 물론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성리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았으나 그전까지는 유학의 이념이 사회의 생활 구석구석까지 침투하지 못했다. 지배층에서도 유학이라고 하면 사詞와 장章, 즉 시와 문장만 숭상했을 뿐, 철학으로서의 유학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고 실천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한 유학을 통치철학, 사회철학으로 받아들인 조광조는 국가운영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대부, 백성들의 생활 전반까지 유학이념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 말에 들어온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예법이 일반 백성들의 가정에까지 생활상의 원칙으로 지켜지게 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조광조의 개혁은 정치와 행정뿐만 아니라 일반사회까지 겨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향약鄕約 보급이다. 향약은 처음부터 성리학 이념을 향촌사회에 까지 침투시키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 나쁜 일은 서로 바로 잡아주고 이웃끼리 서로 예로써 대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는 것이 향약의 4대 강령이다. 조광조의 개혁은 급진적이었다. 국가권력은 정변하나로 쉽게 바꿀 수 있지만 문화나 생활영역은 그렇지 않다. 조광조는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만 제거하면 개혁은 성공할 것으로 생각했다. 반대파의 핵심은 새로운 훈구파가 되어 있는 중종반정 공신들이었다. 조광조는 그들을 개혁 대상으로 지목했다. 조광조의 공격은 현량과賢良科다. 국가를 위해 일할 만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인물들을 천거해 관직에 등용시킨다는 현량과의 기본 취지는 나무랄 데 없다. 그러나 인물 추천제의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자의적인 기준이 적용되기 쉽다는 점이다.
현량과를 통해 자파 인물을 많이 등용한 것에 자신감을 가진 조광조는 정국공신들에 대한 숙청작업에 나섰다. 개혁세력은 칼자루를 쥐었고 수구세력은 칼날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개혁세력은 개혁이 목표지만 수구세력은 생존이 목표다. 싸움에 임하는 자세가 다르다. 중종은 자신이 반정을 통해 즉위한 만큼 공신의 자질론을 앞세운 개혁파의 주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조광조는 중종에게까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리를 강조했다. 왕도정치를 내세우는 성리학 이념에 따르면 군주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플라톤의 철인哲人정치가 목적으로 하는 세계와 성리학적 이상 세계가 같다. 조광조의 비타협적인 태도로 그의 개혁을 지지해 주던 후원자들을 잃게 된다. 남곤, 심정, 홍경주 수구 삼총사는 조광조가 붕당을 만들어 자신의 인물들만 기용하였다면서 상소를 올렸다. 현량과의 폐단을 주장한 것이지만 중종은 불과 몇 달 전에 자신이 승인한 것을 상소로 받아들여 조광조 무리를 잡아들이라고 명했다.
뛰어난 학문과 진보적 정치감각, 게다가 국정의 전권을 가졌음에도 개혁에 실패하고 좌초한 조광조는 건국 초기 정도전을 연상하게 한다. 두 사람은 사실상 당대 조선의 지도자이자 총 지휘자로서 각종 개혁 조치를 입안하고 실행했으며, 조선을 사대부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왕권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렇다고 조선이 왕국인가? 아니다. 사대부 국가에서도 국왕은 사라지지 않고 상징적으로 존재한다. 정도전과 조광조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고서도 왕이 될 꿈을 품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다. 정도전은 다른 왕권에 의해 제거되었으나 조광조는 반대파 사대부에 의해 타도되었다. 조선이 사대부로 진일보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조광조는 얼마 뒤 누명을 벗고 나중에 영의정으로까지 추존된다.
영리하고 유능한 음모가만 있으면 말만의 음모로 어렵지 않게 반대파의 수많은 인물을 때죽음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조선의 병은 깊었다. 그런 사건을 사화라고 부르면 뭔가 그럴듯해 보이지만 용어를 만들어 붙이기도 부끄러울 만큼 한심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군대를 일으키지도 않았고 쿠데타를 계획하지도 않았는데 반란이라고 몰아붙여 처단하는 현상이 발발한 나라는 조선이 세계적으로도 유일할 것이다. 중종은 사대부들에게 자신보다 더 유약한 성품의 세자를 남기고 병으로 죽었다. 그가 인종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어질 仁이라는 시호를 어울리게 효심이 깊고 인정 많았던 인종은 좋은 세상을 만났더라면, 현군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인종이 후사를 남기지도 못한 탓에 왕위는 배다른 동생 명종이 이었는데, 겨우 열한 살 소년이었다. 인종에게 윤임이라는 외삼촌이 있었고 명종에게는 문정왕후의 남동생인 윤원형이란 외삼촌이 있었다. 윤임을 대윤, 윤원형을 소윤이라 불렀는데 큰 윤이나 작은 윤이나 누나를 대비로 둔 것을 믿고 권세를 휘두른 소인배에 불과했다. 작은 윤은 더 흉악한 자였다. 권력을 장악한 윤원형은 현대의 조폭과 다를 바 없이 행동했다. 심복을 거느리고 평소 원한을 맺은 자들을 숙청하고, 온갖 인사청탁과 뇌물을 받아 배를 불리고 남의 토지를 마음대로 빼앗고 조정대신들을 수족처럼 부렸다.
조선중기의 4대 사화는 앞의 두 사화는 연산군이 일으킨 것이지만 중종과 명종 때 일어난 사화는 사대부들 간의 세력다툼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앞의 두 사화와 달리 음모와 술수가 횡행하는 전형적인 말만의 역모로 일어난 사건이다. 사화를 일으켜 공신이 된 자들은 훈구파만큼의 경륜과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사림이 뜻 있는 유생들은 혼탁한 중앙정치를 버리고 낙향해 전국 가지에서 서원을 세우고 제자를 길렀다. 조선의 경우 무신이 아니라 문신이지만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세를 휘두른 무질서와 하극상의 시대라는 점은 고려의 무신정권과 같다.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도 흐리다. 중앙정치가 곪아가자 지방정치도 문란해진다. 부패한 수령들의 학정으로 피해 유민들이 늘어나고 그들 중 산으로 들어가 화적이 되니 자들도 많았다. 한반도 역사를 통털어 가장 유명한 화적두목인 임꺽정이 등장한 것도 그런 배경이다.
만약 서원이 향교와 같은 역을 했다면 부패한 지방관을 탄핵함으로써 중앙정치의 타락이 지방까지 미치는 것을 어느 정도 제어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원의 성격이 바뀌었다. 처음 서원은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했다. 하지만 낙향한 사림파의 유생들로 인해 성리학의 이데올로기의 교육장으로 바뀌었다. 지방 정치를 감시하고 개선하는 일보다 중앙정치를 사림세력으로 바꿀 성리학 전사를 길렀다. 서원동창들과 서로 연고를 맺으면서 지금도 우리 사회를 망치고 있는 학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결국 서원은 조선을 사대부체제로 만드는 일등공신 역할을 했으며 당쟁의 온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