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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세계사 (남경태)

한국사-요약

요약

 

고조선은 우리 역사의 시작이다. 역사라기보다 신화라고 해야겠지만 5천년전쯤에 단군이라는 외래집단이 한반도 원주민을 복속시키고, 고조선을 세우면서 우리 역사의 문이 열린다. 이후 2천년동안 한반도 문명권은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거쳐 조금씩 신화에서 탈피하는 한편 중국사와의 접촉을 계기로 알려진 역사가 시작된다. 중화문명권의 변방으로 출발한 한반도는 중국 한의 힘이 약해지는 시기를 맞아 도약의 기회를 만난다. 그것이 삼국 시대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문명의 빛은 밝은데서 어두운 데로 퍼진다. 중국과 가까운 고구려는 가장 먼저 중국의 문명을 전해 받아 고대국가 기틀을 다진다. 때마침 중국이 분열기로 접어들면서 중국의 정치적 지배에서 벗어난 고구려는 북조의 왕조들로부터 랴오둥의 소유권을 인정받는 대신 사대의 의무를 약속하고 한반도 방면의 진출을 모색한다. 그러나 고구려가 노리는 한반도 중남부에서 백제와 신라가 신흥세력을 착실히 성장해가고 있었다. 고구려의 강력한 압박전술에 두 나라가 동맹을 맞서면서 본격적인 삼국의 정립기가 시작된다.

 

고구려와 찰떡궁합이었던 중원의 북위가 약화되면서 고구려는 중국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한다. 그러나 중국의 질서가 변한 것은 오히려 삼국 중 가장 후발주자인 신라에 기회를 제공한다. 백제와 고구려가 가지고 있었던 한반도 중남부 영토를 기습으로 손에 넣은 신라는 자연히 두 나라의 목표가 된다. 이 위기를 구해준 것은 중국의 새로운 통일제국인 수와 당이다. 변방 정리의 일환으로 중국이 고구려를 침공함으로써 고구려는 치명적인 타격 입었고, 중국적 질서를 재빠르게 받아들인 신라가 한반도의 단독정권으로 발돋움한다.

 

한반도의 역사로 보면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것이지만,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중국과 한반도를 아우르는 중화세계를 완성한 것이다. 따라서 중화질서의 변방인 신라는 중국이 붕괴하면서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중화의 질서가 정점에 달한 8세기 초반 잠시 평화와 번영을 누렸던 신라는 중국이 당말 오대의 위기에 빠지자 함께 극심한 혼란기로 접어든다. 거란이 발해를 대신해 랴오둥을 무대로 삼고 비중화非中華 세계의 대표주자로 성장하는 가운데 한반도의 단독 장권은 고려로 넘어간다.

 

- 신라에서 송- 고려로 맴버를 교체한 중화세계는 어느새 강성해진 비중화 세계의 거센 도전에 시달린다. 그러나 중화의 두 형제는 거란의 요가 동북아시아 질서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 것을 환영할 수가 없었다. 모순에 찬 고려 왕건의 훈요집조는 중화 대 비중화의 대결 구도를 예고한다. 하지만 중앙집권화를 이루지 못한데다가 고구려의 후예라는 구호와는 반대로 신라의 경주 정권을 계승한데 불과했기 때문에 중화세계의 약한 고리로 남았고, 거란의 요와 여진의 금으로 이어지는 비중화 세계의 만만한 목표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앙집권화를 이루지 못한 대내적 문제와 시대착오적인 중화세계의 일원으로 남으려한 대외적인 문제는 결국 고려사회의 붕괴를 앞당긴다. 내부문제는 무신정변을 불러 때 이른 군사독재를 탄생시키고, 외부문제는 거란- 여진에 이어 새로이 비중화 세계의 선두주자로 부상한 몽골제국의 침략을 불러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식민지시대를 연다. 몽골이 한 세기 동안의 지배를 마치고 물러가면서 고려는 부활의 기회를 잡았으나, 중국에 명이 탄생한 것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파악한 신지사대부들은 다시금 중화세계의 우산 밑으로 들어간다.

 

처음부터 유학이념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채택한 조선은 두 가지 길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했다. 유교왕국이란 원래 왕과 사대부를 축으로 하는 모순적인 이중권력체제이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승자는 이방원의 왕권이었다. 건국초기부터 사대부체제를 이룩하고자한 정도전의 구상은 당연히 왕국체제를 선호하는 왕자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 덕분에 세종까지는 국왕이 사대부를 관료로 거느리는 정상적인 왕국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으나, 머리가 커진 사대부들은 점차 왕권에 대한 도전을 꿈꾸게 된다.

 

세조가 아무리 조카 왕위를 찬탈했다하더라도 왕실 내에서 이루어진 왕위계승을 문제시할 정도라면, 이미 조선 사대부는 단순한 관료의 선을 넘어선 셈이다. 사육신 사건으로 불리는 사대부들의 도전은 일단 실패로 끝나고, 조선은 다시 세조의 왕국화의 체제가 된다. 그러나 세조의 강력한 지배전략으로 위축된 가운데서도 권력을 향한 사대부들의 야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먼저 자기들끼리의 세력다툼을 통해 힘을 결집한 다음 사림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왕권 타도 작업에 들어갔다.

 

중종반정으로 조선은 마침내 왕국에서 사대부 국가로 바뀐다. 이것으로 사대부들은 유교왕국이 완성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그들은 권좌에 오르게 되자마자 자기들끼리 편을 갈라 새로운 권력다툼을 시작한다. 당쟁이 시작된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진흙탕 싸움에 몰두해 있는 동안 비중화 세계는 거대한 도약을 하게 된다. 남쪽 일본에 이어 북쪽의 여진이 중화세계에 도전하고, 마침내 중화의 본산인 명이 멸망한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은 중화의 중심이 조선으로 옮겨왔고, 이제 조선만이 세상에서 유일한 문명국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사대부의 바람과 반대로 중국이 중화로 복귀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제야 일부사대부들은 소중화小中華의 정신병에서 벗어나 당시 중국의 청에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실학의 학풍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더 중요한 변화는 조선의 국왕이 비로소 왕정의 의미와 필요성을 깨달았던 것이다. 영조와 정조에 의해 조선은 실로 오랜만에 왕정복고의 조짐을 보인다. 그러나 탕평책으로 당쟁을 잡았다는 순간 영조는 개혁의 고삐를 늦추고, 왕당파와 친위대를 육성함으로써 왕권을 다잡았다 싶은 순간 정조는 복고로 돌아선다.

 

사대체제의 완결판은 결국 황폐한 세도정치였다. 정조의 실험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19세기를 맞은 조선은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불모의 땅으로 변했다. 국왕은 허수아비가 되었고 사대부들은 사리사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아들을 왕으로 앉힌 아버지가 시대착오적인 쇄국을 내세우는가 하면, 며느리는 그런 시아버지를 내쫓고 중앙관직을 친정 집안으로 도배를 하면서 외세를 마구잡이로 끌어들였다. 지배층의 이런 무책임과 무능은 급기야 서양과 동양의 오랑캐에게 나라를 내어주고 마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와 비교해도 한반도의 지배층만큼 복된 자들은 없었다. 나라를 빼앗겼으나 백성들은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심지어 식민지시대에도 사대부의 후예들은 친일파로 화려하게 변신하거나 독립운동의 명망가로 거들먹거렸다. 가장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해야 할 1930년대 후반부터 한반도에서는 오히려 독립투쟁의 불꽃이 꺼졌고, 그 결과 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이 패망 뒤에도 한반도는 승전국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남북한 정권이 권력욕으로 가득 찬 음모가들의 손아귀로 넘어간 것은 혁명 없는 역사의 필연적 귀결이다. 이 나라 지도자 중 백성을 위한 왕이나 지도자가 얼마나 있었던가? 외세가 침입하면 왕과 신하들은 도망가고 아니면 외세와 결탁하거나 숨었으며 백성들이 싸웠다. 그들이 저질러 놓은 사고의 수습을 담당하는 것은 언제나 백성들이었다. 지금의 이 나라를 만든 것은 이 나라의 민중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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