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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세계사 (남경태)

한국사 1

 

우리 역사만이 아니라 동양사 전체에서 지성이란 유학이다. 중국에서 주나라가 탄생한 기원전 12세기에 유학의 초보이념인 가 생겨났고 여기에 공자의 의 개념이 보태 유학이 성립되었다. 예는 조상에게 제사에서 나온 개념이고 인은 국가 경영원리이므로 유학은 종교와 정치가 합일된 개념이다. 동양사회가 제정祭政일치적이고 정치적 지향이 강한 역사를 전개해온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이처럼 지배 이데올로기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동양의 역사와 우리 역사는 유학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유학이라고 하면 동양철학의 한 분야로 여기지만 수천년 동안 유학은 우리 사회의 정치와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강력한 이데올러기이자 생활윤리였으며, 학문적으로 단지 철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문 일반을 가리키는 의미였다. 특히 유학은 중화사상이라는 또 다른 옷을 입고 있어서 우리 역사의 안과 밖에 거의 전일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우리 역사는 전반적으로 빛보다 그늘이 많다. 그 이유는 잘못된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중화사상을 근간으로 삼는 유학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역사 내에 중화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모든 문제를 유학이라는 이데올로기로만 돌릴 수는 없다. 유학의 이념으로 채택된 데에는 나름대로 필연성도 있다. 유학의 이념에 물든 지배층의 무능과 무책임에서 온갖 모순이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조체제가 유지되었던 이유는 유학이 전 사회의 조직원리로 자리 잡으면서 피지배층에게 복종과 충성을 국가가 유기체적이고 국가지상주의적인 맹신을 불어넣은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최고지도자가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거란이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나주까지 도피한 고려 현종, 몽고침략 때 강화도로 도망간 고려 고종,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조선의 인조, 임진왜란 때 가족들만 거느리고 의주로 도망간 선조, 아내가 일본 깡패에게 살해당하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간 고종, 6.25전쟁 때 수도를 사수하겠다는 약속을 팽개치고 한강을 건너 도망친 다음 인도교마저 끊어버린 이승만 등이다.

 

고려왕조는 왕건이 세웠으나 광종과 성종이 다듬었고 문종이 최종적으로 마무리한 나라였다. 국가재정에서 가장 중요한 토지제도를 비롯하여 지방행정구역을 재편하고 법체계 등 제반 국가체제를 완비한 시기가 문종 때이다. 고려가 건국되고 나라꼴을 갖추게 되는데 150년이나 걸린 셈이다. 그런 과정을 거친 뒤 그때까지 한반도 역사상 가장 완벽한 왕국이 성립되었다. 정복수준에 머물렀을 뿐 행정국가를 이루지 못한 고대 삼국, 중국의 한 지방정권으로서 존재한 통일신라와 달리 고려는 명실상부한 왕국이 되었다.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지 못했으나 송, 요와 더불어 동북아시아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고려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한족제국인 송이 허약하고 거란의 요가 세력을 대등하게 차지한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8세기 초반의 신라 번영기는 당이 동북아시아 질서의 구심점으로서 역할을 한 데서 나온 반면 11세기 후반 고려 번영기는 송이 그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송은 중국식 제국의 완성형이었다.

 

주나라 때 중화이념이 생겼고 춘추전국시대에 유학으로 체계화되어 한대에는 유학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공인되었고, 남북조시대에 유학에 기초한 관리임용제도인 과거제와 그 체제를 뒷받침해주는 경제제도인 균전제가 탄생했다. 통일제국 당은 제도적 개선만 이루었을 뿐 귀족체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에 비해 송은 유사 이래 처음으로 가장 완벽한 유학제국을 이룬 것이다. 황제를 정점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와 관료들이 황제를 보좌하는 사대부 체제가 완성되었다. 고려가 열심히 본받으려 한 체제다. 유학국가체제는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도모하기에 대단히 유리하고 편리한 제도이다. 북극성(천자) 주변을 별자리들이(제후들) 하루에 한 바퀴씩 일사분란하게 돌아가는 우주의 조화를 인간세상으로 옮겨놓은 게 유학적 질서이다. 유학체제는 철저하게 지배층을 위한 체제이다. 중국과 한반도의 유학국가는 지배층이 절대권력과 억압적 관료제로 다수의 피지배층을 착취하는 체제였다. 피지배층을 충효사상으로 억압했다. 동양역사에서 혁명이 부재한 이유이다.

 

이렇듯 이념이 먼저 만들어지고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이념을 실현하는 제국이 형성된 중국에 비해 유럽 경우는 정반대의 역사를 거친다. 유럽에서는 중국에서 중화이념이 생겨난 시기보다 천년이상이나 늦게 통일을 위한 이념인 그리스도가 생겨났으며 다시 수백 년이 지나 그 이념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공인했다. 통일적 이념이 부재했기에 자연스럽게 분권화의 길로 들어섰던 서양과 달리 동양은 처음부터 통일을 겨냥한 이념을 가지고 시작함으로써 부자연스러운 정치적 통일을 지향했다. 그 결과 근대에 들어서 서양문명이 동양문명을 정복하고 흡수하였다.

 

고려 현종이 죽은 해(), 거란의 요나라 성종이 죽으면서 요는 더 이상 팽창을 포기하고 체제 안정을 도모했다. 그 덕분에 송과 고려에 대한 북방의 압박이 한결 느슨해졌다. 이 공백을 이용해 고려는 짧은 번영기를 누렸지만 다급해진 것은 송이었다. 송에 개혁을 위해 등장한 것이 왕안석의 신법이었다. 요나라 조공으로 초래한 재정난을 부국책을 막고 부족한 군사력을 강병책으로 키운다는 부국강병책이다. 하지만 이런 급진정책은 지주들과 송대 크게 성장한 대상인 세력이 기존 정치권과 결탁해 거세게 저항했다. 이 갈등은 부국강병과는 거리가 먼 정쟁으로 발달했다. 이것이 송대 극성을 떨치게 되는 당쟁의 시작이다. 이렇게 야기된 당쟁은 유학의 근본이념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지면서 주희의 성리학을 낳게 된다. 당쟁은 어느 시대에나 있지만 송대에 치열했던 이유는 과거제 때문이다. 과거제는 전통적 귀족집단의 혈연 대신 학연이라는 새로운 연줄을 만들어 내었다. 관료의 임용이나 승진에는 교권의 후원이 필요했으며 연줄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당시 고려시대에는 송과 달리 과거제가 확고한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당파가 형성되지 못했다. 한반도의 역사에서 당쟁은 조선으로 넘어갔다.

 

역사적 대형사건은 대개 사소한 계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과 배경은 오랜 기간에 걸쳐 숙성된 것이지만, 실제로 일이 터져 나오는 계기는 필연이라기보다 우연이다. 기원전 264년 시칠리아 작은 도시 메시나가 시라쿠사와의 다툼으로 로마 원로원에 구원요청을 하지 않았다면 포에니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303년 서진의 사마염이 흉노족장 유연을 팔왕의 난에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남북조 시대는 없었을지 모른다. 물론 그렇지 않아도 로마는 지중해를 통일했을 것이고, 4세기 중국은 이런 분열기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1170년부터 1270년까지 10년간 고려 후기의 역사를 장식한 무신정권도 지극히 사소한 계기로 터져 나왔다. 아버지 인종이 치세 내내 이리저리 치이며 고생한 것을 알고 있는 의종은 개경귀족들과 결탁하는 것만이 왕권강화의 길이라고 믿었다. 개경귀족 역시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서 국왕을 형식적인 정점으로 하는 사대부체제를 굳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공동 이해관계와 더불어 개인적으로도 학문을 사랑했던 의종은 개경문신들과 죽이 잘 맞는 군주였다. 열아홉 살에 즉위해 마흔셋이 될 때까지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1170년 한 여름에 유원지에 문신들과 어울려 놀러가는 행차에 호위병력이 없을 수 없다. 전쟁과 내전이 없으니 군대의 중요한 임무는 그런 행사를 호위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의종의 명으로 수박시범을 보이던 중에 사소한 사건이 일어났다. 예순 노장의 이소응이 젊은 병사와 겨루다 넘어지자 한뢰라는 젊은 문신이 뺨을 치며 무시하게된 것이다. 정중부는 이의방을 불러 거사를 지시했다.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한 다음 반대파를 숙청하고 허수아비 왕을 세운다. 이것이 우리 현대사에서 익숙한 군사 쿠데타의 전형적인 공식이다. 다만 쿠데타의 우두머리가 직접 권좌를 차지한 현대 쿠데타와 달리 왕조 사회였기에 왕위를 차지하지는 않았다. 철없는 문신의 손찌검으로 시작된 무신정권이 100년이나 지속될 줄은 몰랐다. 늘의 권력자는 늘 기회주의자다. 일본의 바쿠후와 고려 무신정권은 상징권력과 실제 권력이 나뉘는 일종의 이중 권력체제였다. 고려의 무신정권은 철저히 그늘에만 머물면서 권력의 단물만 빼먹는데 반해 일본의 쇼군은 천황을 대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고려 무신집권자는 국왕을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고려 무신정권은 깡패집단이었다.

 

중국 한족제국들의 역사를 보면 유학이념의 발달사와 일치한다. 옛 주나라 시절에 유학의 근본이념이 싹텄고 춘추전국시대에 유학이 체계화 되었으며, 제국 때 공식 이데올로기로 채택했고 당 시절에 과거제도를 유입해 유학제국을 이루고자 했다. 하지만 당은 결국 귀족지배체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완벽한 유학제국은 송대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송이 역대 제국들 가운데 가장 물리적으로 허약했다. 거란과 여진 오랑캐에게 나라가 짓밟히는 상황을 목도한 주희는 그 이유를 유학의 문제점에서 찾았다. 유학경전에만 매달렸을 뿐 근본적인 변화를 꾀한 적이 없었다. 주희는 공자가 유학을 체계화한 이래로 가장 큰 학문적 변혁을 시도하는데 그것이 주자학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주자학은 중화사상에 철학의 옷을 입혀 세련되게 포장했을 뿐이다. 천하의 중심세계는 중화세계이며 사방의 오랑캐들이 중화세계를 중심으로 받들고 사대하는 게 우주의 질서이고 조화라는 것이다 주희는 그 중심을 , 주변을 로 지칭하면서 화이론華夷論을 이기론理氣論으로 대체했다. 지금은 가 성한 세대 즉 오랑캐가 지배하는 세상인데 이것은 우주의 질서가 깨진 것이며, 근본적으로는 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한족의 세상으로 복귀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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