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왕세자 시절 자신이 겪은 경험과 중종이래로 200여 년간 역사를 바탕으로 사대부 정치폐해를 익히 알고 있었다. 왕국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왕당파를 육성하는 길이다. 하지만 그것은 측권들이 훈구파를 형성해 권세를 휘두르는 폐해를 가져왔다. 다른 방법은 측근을 키우지 않으면서 당쟁을 막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대부들의 당파를 현실적으로 인정해 주되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영조의 탕평책은 여기서 나왔다. 오늘날 양당 중심의 대통령제와 닮아있다. 영조의 치세에 서로 대립하는 두 당파는 노론과 소론이었다. 이들 간의 세력균형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인사를 고르게 하면 된다. 영조의 즉위를 가장 반대한 세력은 소론이었다. 영조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탕평책 덕분이었다. 이인좌난을 진압하고 탕평책이 효과를 거두자 영조는 두 번 다시 당쟁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기위해 탕평비를 세웠다. 관직을 두 세력 간 공평하게 배분함으로써 균형을 꾀하는 방법은 당쟁이 너무 격심했기 때문에 임시방편 일뿐 근본적 대책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채택된 게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 전략이다.
왕국의 기본 구성요소는 왕과 신민이다. 왕은 왕국 내에서 절대적 권력자의 지위를 누리지만 그 권력과 지위는 바로 신민에게서 나온다. 조선의 왕에게 臣民이라면 사대부와 백성이다. 조선 초기에는 왕이 신민이 다스리는 정상적인 왕국의 정치와 행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종 때 조선이 사대부 국가로 변모한 뒤 왕이 신민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신이 왕의 이름을 빌려 민을 다스리는 기형적인 왕정이 행해졌다. 이제 다시 왕국을 꿈꾸는 영조는 군주가 신민을 다스리는 정상적인 역사의 도상으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영조의 가장 큰 개혁성과는 균역법을 제정한 것이다. 균역법이란 말 그대로 백성의 요역에 대한 부담을 균등하고 공평하게 하자는 취지의 제도이다. 요역 중 중요한 것이 군역이었다. 원래 군역은 역대 한반도 왕족들의 기본적인 조세제도인 조용조租庸調가운데 庸의 개념에 포함되어 있었다.
국가는 언제든지 백성을 동원해 부릴 권리가 있었다. 군역은 사실상 돈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농민인 백성들이 농사를 팽개치고 군역에 종사하기란 불가능했다. 중종때 사람을 사서 자신의 군역을 대신하게 하던 관습이 제도로 만들어 국가가 백성에게 돈을 받고 그 일을 대행해 주기에 이르렀다. 화폐경제가 없었던 당시 돈이란 베, 즉 포布를 가리킨다. 그래서 군역을 면하기 위해 바치는 베를 군포軍布라 부른다. 힘 있고 돈 많은 부자에게는 그 의무에서 벗어날 허점이 많았다. 그 부담은 모두 가난한 농민들에게 돌아갔다. 물론 균역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오랜 사대부체제를 거치면서 관리들 특히 지방관들의 부패가 관행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재건국이 이루어지는 시기의 왕이라면 무엇보다 권위와 다재다능함이 필요했다. 이 두 가지 자질을 갖춘 이가 영조다. 그는 권력과 권위에서 사대부들을 확실히 제압했을 뿐 아니라 학문에 있어서도 사대부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16세기 후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에 이어 성리학에서 두 번째 철학 논쟁이 벌어진 것도 이러한 배경이었다. 사단칠정 논쟁은 정치 이데올로기로 출발한 성리학의 결함을 극복하게 위해 철학적 옷을 입히는 과정이었다. 성리학의 현실적 토대인 중화세계가 크게 변하였다. 대륙의 주인이 바뀌었고 조선이 유일하게 중화세계가 된 것이다. 이번 논쟁은 현실과 동떨어진 공허한 측면에 치우치지 않고 현실적인 문제를 쟁점으로 삼게 된다.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과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이다. 인물성동론은 인과 물, 즉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서로 같다는 것이고, 인물성이론은 人과 物 사물과 사람의 본성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호론湖論은 인물성이론이고 낙론洛論은 인물성동론이었다. 중화사상이 뿌리내리면서 조선사회에서 기묘한 철학논쟁과 화풍이 등장했다. 오랑캐도 인간이라 할 수 있느냐가 쟁점을 부각되고 우리 산천의 경치만이 진짜 경치라고 여기는 주체적인 세계관 같지만, 성리학의 기본적인 사상인 병적인 자기중심적인 소산이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도 지나치면 위험해진다. 문화중심주의는 쉽게 문화파시즘으로 변질된다.
실학이라고 하면 보통 공허한 논쟁을 일삼던 유학과 질적으로 다른 학문으로 여기지만 실학의 뿌리는 원래 성리학에 있다. 동양에서 유교는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종교와 비슷한 지위였다. 그런 점에서 서양의 그리스도교와 비교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가 전 세계를 지배한 세계는 중세유럽이다. 당시 그리스도교는 유럽사회의 모든 부분을 관장하는 하나의 세계관이었다. 근대에서 모든 학문의 뿌리를 이루는 철학조차 당시에는 신학의 시녀였다. 오늘날 유학은 학문의 한 분과에 불과하지만 유학이 지배했을 때는 총체적인 세계관이었다. 그 유학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실학도 유학이었다. 이수광이 지붕유설이라는 백과사전을 펴냈는데 그것이 최초의 실학서로 간주된다. 그는 참된 선비였기에 편협한 중화적 세계관에 물들지 않았고, 중국에서 여러 가지 서양문물을 가져와 소개했다. 유학이 그랬듯이 중세유럽을 건설하고 지배한 그리스도교도 중세 후기에 잡아들면서부터 도덕적 타락과 사회적 정체의 근원이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실학은 수도원운동이었다. 그리스도교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 내부개혁을 통해 교회가 원래 기능을 회복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교회를 되살릴 수 없기에 종교개혁이라는 대수술이 일어나게 된다.
유럽세계는 사회기틀을 송두리째 부수고 인간의 이성이 신의 손아귀에서 풀려나는 르네상스를 맞게 된다. 유학의 경우도 그리스도교보다 더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한 상황에서 실학이라는 미적지근한 처방으로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실학자들은 중앙무대에 제대로 침투되지 못했다. 실학자들의 역량 문제가 아니라 체제문제였다. 영조치세에 여당은 노론이었고 야당은 남인이었다. 북학파는 노론 내에서 호락논쟁이 벌어진 결과로 탄생한 집단이므로 인맥상으로 노론계열에 속했다. 반면 야당이었던 남인 혹은 재야에 있던 남인들은 민생문제에 주목했다. 그들이 중농학파 입장에 서게 된다.
비록 현실 정치에 반영되지 못했어도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이 만개할 무렵 때 마침 중국에서도 주목할 만한 학문적 발전이 있었다. 오랑캐 나라답게 청은 옛 중화세계의 지배이념이었던 성리학과 양명학을 버리고 새로이 고증학을 채택해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학문연구의 풍토를 정착 시켰다. 양명학은 명의 왕수인이 주창한 새로운 유학으로 성리학의 대중판이다. 성리학이 주로 국가운영의 철학이자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한데 비해, 양명학은 유학뿐만 아니라 선불교, 도교까지 가미해 일종의 생활철학으로 성립했다. 명을 타도한 청은 새로운 학풍을 장려하였는데 그것이 고증학이다. 그 이름에서 보듯이 이전의 어느 유학보다도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학문이었다. 실제로 고증학의 모토가 바로 실사구시였다. 고증학이 실학이었다. 고증학은 모든 학문적 대상을 증명하려는 과학적 자세를 견지했다. 고증학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전거가 중시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 전거典據(출처)를 모은 작업이 바로 고금도서집성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사회적 분위기와 학문적 흐름은 새 시대를 지향하고 있는데도 조선의 정치현실은 여전히 수구였다. 경제가 성장기의 신체라면 정치는 옷이므로 적절한 시기에 바꾸어주어야 한다. 정치는 반드시 혁명을 필요로 한다. 탕평책으로 당쟁을 잡았다는 순간 영조는 마음이 약해졌다. 여당인 노론을 배려하고 특권적 지위를 인정해주기도 했다. 영조는 맏아들인 효장세자가 열 살 어린나이에 죽은 탓에 마흔 넘어 얻은 장헌세자를 끔찍이 아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데다 노론이 저지른 잘못을 지적할 만큼 정치적 안목도 뛰어난 세자를 노론세력이 환영하지 않았다. 여기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후궁까지 가세하여 세자의 입지는 좁아졌다. 영조는 노론의 상소를 믿고 세자를 꾸짖었다. 총명함에 비해 성품이 유약했던 세자는 정신병에 걸리고 말았다. 결국 세자는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여드레 만에 죽음을 맞았다. 이 사건으로 영조는 정상적 왕국을 코앞에 두고 갑자기 물러섰다. 새 세자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은 할아버지가 중단한 왕국화를 다시 추진하는 것이었다.
정조가 맨 먼저 한 일은 아버지의 시호를 사도에서 장헌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원한을 어느 정도 달래고 정조는 왕당파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세조, 광해군, 영조 모두가 기존사대부 가운데 일부를 끌어들여 왕당파로 삼았다. 기존의 세력을 왕당파로 만들면 자신의 치세에만 유지될 뿐이고 오히려 반정을 부르게 된다. 그래서 정조가 택한 방법은 새롭고 참신한 세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이 그것이었다. 정조는 규장각 임무를 확대해 도서관과 출판 기능을 부여했다. 출판의 총 행정을 담당하게 했다. 규장각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왕의 비서기능을 부여했다. 조정은 영조시대부터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다. 북학파 중에 홍대용이나 박지원 같은 노론측 인물도 있었으나 그들은 노론 중에서도 진보적 소장파였다. 노론 중심세력은 여전히 중화적 세계관에 물든 골수 성리학자들이었으며, 호시탐탐 당쟁의 기회만 노리는 낡은 사대부체제의 유물이었다.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입장에 따라 분열되는 것은 조선사대부들의 생리다. 장헌세자의 죽음을 두고 노론 소론으로 나뉘었다. 세자 죽음을 당연하다는 벽파와 안타까이 여기는 시파로 분류되었다. 시파에 옛 소론과 남인의 세력까지 가세하였으니 반노론 연합이었다. 홍인한을 우두머리로 한 등의 책동이 노골화 되자 정조는 측근을 만들어 대처했다. 그가 바로 홍국영이었다. 홍국영이 자신의 권력을 위해 대신해준 노론 강경파에 대한 숙청은 정조가 혁신정치를 펼치기 위한 좋은 무대를 만들어주었다. 사대부들이 왕권에 도전할 때 가장 우려되는 것은 반정이다. 왕이 허수아비일 때 사대부들은 자기들끼리 권력다툼을 치열하게 벌이는데 그 경우 구사하는 수단이 말만의 역모다. 한 편이 다른 한 편을 역모로 엮어 왕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식이다. 왕이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려 하면 사대부들도 실력행사에 나서게 된다. 그게 실패하면 반란이 되고 성공하면 반정이 되는 것이다. 정조는 국왕을 특별히 수호하는 친위대를 만들고 이것을 장용위라 불렀다.
규장각을 정치개혁의 실무자로 삼고 실학자들에게는 전반적인 사회개혁에 필요한 이론과 이데올로기를 만들게 했다. 개혁을 위해 정조는 기획, 제작, 시나리오 작업까지 완벽하게 진행했으나 마지막 감독 단계에서 무너졌다. 그 단초는 그리스도교가 제공했다. 서양의 새로운 종교를 조선에 처음 소개한 이래 그리스도교는 학문적으로 연구대상이었고, 신앙으로 믿어지지 않았다. 영조 시대와 달리 북학이 정부지원으로 적극 장려되는 분위기에서 그리스도교가 종교로서의 움직임이 싹트게 된다. 한반도 최초의 정식 그리스도교도가 탄생했다. 그가 이승훈이다. 조선정부에서는 북학을 베우는 것을 장려한다 해도 그리스도교를 허용할 마음은 없었다. 북학의 바람이 아무리 거세다하지만 천년이 넘도록 한반도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유학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그리스도교가 인정될 수가 없었다. 서학은 국가의 정체성을 바꿀 것을 요구한다. 서학을 다스리기 위해 정조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이로 인해 열하일기의 박지원과 이덕무, 박제가도 자기비판을 해야 했다. 정조가 순수한 한문체를 널리 확산시키려는 명을 규장각에 내림으로써 학문적으로 실학을 포기하고 정치개혁이 복고로 선회했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고 개혁의지가 충만했던 정조는 조선역사에 보기 드문 출중한 군주였다. 그러나 꿈이 실현되려는 순간 수구적인 자세로 돌아서버렸다. 조선의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은 북학을 거부하고 문체반정이라는 조치를 들고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 오랜 세월 번영하던 청은 점차 부패하기 시작했다. 탐관오리가 늘어났고 온갖 부패가 사회를 얼룩지게 했으며 청제국은 서서히 썩어가고 있었다. 당시는 동양역사에서 한 번도 없었던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유럽열강이 일제히 중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청이 몰락의 기운을 보이자 정조는 당황했을 것이다. 청에 파견된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서양 침략을 안내하는 앞잡이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자 개혁을 중단했을 것이다. 정조가 병으로 죽으면서 조선의 실험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정조는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왕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