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는 조선의 건국이 최종목표였지만 정도전은 그렇지 않았다. 이성계가 조선의 시공자라면 정도전은 건축가다. 이성계는 건물이 다 올리는 것에 만족하지만, 정도전은 실내장식이 끝나야 완공으로 보았다. 건국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개국공신,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들이었다. 그들은 새 왕조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사대부 국가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유교왕국이다. 유교왕국은 국왕이 상징적으로 존재로 군림하고 사데부가 실제 정치와 행정을 담당하는 체제다. 피라미드 정점에 있는 국왕의 권위가 언제까지나 권력이 바꾸지 않은 채 사대부들이 원하는 것처럼 상징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가능할까? 그래서 유교왕국은 이상적 왕국일 뿐이다.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앙권력의 불안정에 시달렸다. 유학을 공식 이데올로기로 한 중국의 한제국은 사대부의 힘이 미약했기 때문에 황실의 외척과 환관들이 정치를 좌지우지 했고, 당 제국은 과거제를 실시했지만 귀족과 변방의 절도사들이 사실 권력을 장악했다. 송 제국에 이르러 비로소 사대부들이 꿈에 그리던 권력을 잡았으나 밖으로는 강성한 북방의 이민족에게 시달렸고, 안으로는 사대부들 간에 치열한 당쟁으로 국력을 소모했다.
조선의 태종은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의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골격을 갖추었지만 당시는 왕국이었기 때문에 모두 국왕의 직속기관이었다. 왕권강화를 위한 태종은 노력은 비정할 만큼 철저했다. 그 덕분에 왕의 권위에 도전할 사대부나 관료체제는 없었다. 이제 사대부는 국왕의 충실한 관료가 되거나 순수 사림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태종의 2차건국사업의 최종 목표는 조선을 확고한 왕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국가제정이 튼튼하지 못하면 불가능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태종이 자리를 잡으려면 더욱 절실했다. 최종 마무리 작업인 경제개혁에 착수했다. 임자 없는 땅을 거두어들이고 부당하게 가진 땅을 빼앗았다. 그 대상은 고려시대 번영을 누렸던 불교사원들의 토지다. 고려의 토지제도는 중대까지 전시과가 적용되었다. 전시과는 기본적으로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면서 관리에게 토지의 생산물을 수취할 권리, 즉 수조권만 허용하는 제도이다. 하지만 관리가 죽어도 토지는 국가에 반납되지 않았다. 고려는 중대에 접어들면서 국가 재정이 파탄 날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백성들의 삶도 피폐해졌다.
사대부를 제거하기는 했으나 태종도 유학 이념을 지향했다. 유학자를 양성하기 위해 그는 중앙의 성균관을 강화하고 지방의 향교를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태종시대 각종 사업의 추진으로 조선은 명실상부한 왕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태종의 역사적 위업은 후계자를 잘 골랐다는 것이다. 왜 세종은 굳이 훈민정음을 만들려고 했을까? 공식적인 이유는 백성에게 바른 소리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우리말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망하고 싶어도 제 뜻을 표현하지 못한다. 내가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편하게 쓰도록 하리라’ 한글이 없을 때도 지배층은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한글 창제 목적이 백성을 위하는데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중국과의 차이를 극복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적어도 세종은 조선이 중국의 한 지방에 머물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았을까? 천문학을 장려한 데서 더 확실히 드러난다. 조선이 처음부터 사대부국가로 출발한 데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었다. 유교국가란 왕과 관료라는 두 축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다. 그 균형이 기울어지면 언제든 내재된 모순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왕국시대
세종은 태종을 조선의 영락제라고 여겼겠지만 명나라의 영락제와 더 닮은 인물은 세종의 아들 수양대군이다. 수양은 50년 전의 영락제가 그랬듯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비정한 삼촌이다. 그의 행위는 사육신 사건으로 후대에 오명을 떨쳤다.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공신 세력이 왕권에 의해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사대부 국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일단 세조는 나라를 새로 건국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조가 아무리 3차 건국자로서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 해도 단종의 폐위와 살해, 형제들 간의분쟁, 소장파 사대부들의 도전 등의 사건들은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었다. 그는 소수 측권들만 중용했다. 세조의 제위기간은 13년에 불과했다. 독재자가 사라지면 정국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세조가 죽고 둘째 아들 예종이 즉위하지 문제는 즉각 터져 나왔다. 예종은 스물일곱 나이에도 어머니의 수렴청정을 받았고, 아버지 유언으로 세조 참모들에게 국정을 위임했다. 조선의 주인이 사라지면서 질서의 중심도 사라졌다. 당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병조판서 남이가 유자광의 모함으로 죽게 된다. 남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이 사건을 둘러싼 정황에 있다. 반란이며 역모로 규정되었지만 실체가 없는 말만의 역모라는 것이다. 예종은 남이의 기묘한 반란을 진압한 것을 유일한 치적으로 남기고 재위 1년을 겨우 넘기고 병으로 죽었다. 예종의 아들이 너무 어려서 예종의 형인 덕종의 열세 살짜리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이렇게 해서 조선의 9대 왕 성종이 즉위했다.
세종이 그랬듯이 성종도 왕권과 신권을 잘 조율하면서 정국을 잘 이끌었다. 두 임금의 닮은 꼴은 전 왕들 태종, 세조가 제2 건국자로서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면서 국가의 성격을 크게 바꾸었다. 성종도 세종처럼 자신의 치세까지는 평화를 유지했으나 결국 후임자의 치세에 사건으로 드러나게 된다. 물론 세종과 성종 탓은 아니다. 성종이 자신의 조상이자 우상을 추종하는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우상을 본받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치적에 지나치게 만족한 성종은 집권 후기에 들어 유흥과 오락에 빠져들었다. 그에 따라 사회 기강도 해이해지면서 퇴폐풍조가 만연하고 공직사회가 부패하기 시작했다. 정작 큰 문제는 그런 왕실의 허점을 틈타 사대부 세력이 점차 정국 운영권을 틀어쥐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종 시대 사대부 중에 특권이 생겨나자 자연히 그들에게 대립하는 층도 생겼다. 그들은 사림파를 이루었다. 훈구대신들에게 도전한 인물이 바로 남이였고 남이가 대변하는 세력이 곧 사림파였다. 성종의 즉위한 뒤 정희왕후가 섭정을 맡았던 기간 동안 실제로 국정에 관한 전권을 쥐고 국왕임무를 대신 수행한 것은 훈구대신들이었다. 중앙에서 성종의 간접지원으로 또 지방에서는 젊은 유림의 활약으로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사림파에도 훈구파의 한명회에 못지않은 사람이 등장했다. 그가 바로 김종직이었다. 그는 훈구파에 대한 비판에 앞장섰으며 제자들을 길러내 사림파를 훈구파에 대적할 수 있는 수준으로 키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렇게 사대부는 두 파로 분리되었다. 훈구파가 사대부의 부분집합이라면 사림파는 그 여집합에 해당하지만 그전까지는 동질적인 사대부 세력이 두 줄기로 나누어진 것이다. 사대부 분화는 그 세력이 약화된 것이 아니라 강화되었으며, 왕권이 허점을 보이면 그들이 사대부 국가를 만들려고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왕권이 강하려면 왕이 강해야 한다. 그런데 강한 왕은 새 왕조를 세우거나 정변으로 집권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건국자나 성공한 쿠데타 우두머리는 강력한 권위를 인정받게 되어 강력한 왕권을 누릴 수 있다. 태종과 세조가 그런 임금이었다. 그 뒤를 이은 세종과 성종은 이전 왕들이 다져 놓은 강력한 왕권 덕분에 국왕과 사대부가 조화를 이루면서 안정과 번영의 치세를 보냈다. 왕권이 강하면 사대부는 자연히 국왕에게 협조하면서 관료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왕권이라도 몇 대에 걸쳐 지속되기는 어렵다. 한 동안 왕권에 눌려 있다가도 왕권이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즉각 사대부들이 도전해 오기 때문이다. 유약하거나 자질에 결함을 보이면 사대부들이 왕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게 된다. 성종의 아들 연산군이 사대부의 도구로 활용된 경우다. 문제의 발단은 성종의 옹비인 공혜왕후가 죽으면서 부터이다. 그래서 후궁 윤씨를 계비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연산군을 낳아 성종을 흡족하게 하였다. 그녀는 후궁들에게 심한 투기를 보였으며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와도 갈등을 빚었다. 성종은 윤비를 폐위시키고 사약을 내렸다. 성종 치세에 사림파가 훈구파에 맞설 만큼 성장하자 불안해진 것은 훈구대신들이었다. 성종의 존경을 받던 김종직의 제자들인 영남학파가 핵심으로 떠오르자 훈구파의 목표는 김종직 일파에게로 향했다. 남이 사건에서 보듯이 꼬투리만 잡으면 실체가 없는 사건도 역모로 엮어내는 게 훈구파의 특기다. 다시 유자광이 나섰다.
사림파가 득세한 성종의 치세는 참고 지냈지만 연산군이 즉위하고 김종직이 죽자 훈구파들은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김종직이 작성한 조의제문이 사초에 수록되어 있다는 점을 이용했다. 초나라 항우가 황제인 의제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한 사건을 비판한 내용이다. 세조가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사건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었다. 세조를 비난한 것은 연산군의 조상을 비난하는 것이다. 연산군은 사림파에 대한 불만이 평소에 많았다. 연산군은 훈구파의 책략에 넘어가 대대적인 숙청이 일어났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사화로 무오사화이다. ( 국가의 사회적 구성은 왕과 사대부, 재벌들 그리고 백성들이다. 사대부는 다시 여러 분류로 나누어진다. 각 분야마다 붕당이 생긴다. 백성들도 이해관계에 따라 또는 하는 일에 따라 학교에 따라 지역에 따라 분류된다. 왕이 힘을 잃으면 사대부들이 권력행사를 한다. 국민들이 대통령을 뽑는다고 하지만 사대부들과 힘겨루기를 하게 된다. 대체로 사대부들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다. 쉽게 그 세력이 변하기 어렵다. 우리나라도 일본제국주의의 거대한 뿌리가 아직까지 사대부의 한 축으로 남아있다. )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없는 독특한 현상은 유교정치의 특성을 보여준다. 유교정치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명분이다. 물리력에서 앞서도 명분에 밀리면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게 된다. 성종 치세에 사림파가 득세할 수 있었던 것은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급급한 훈구파에 비해 사림파가 유교적 명분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훈구파도 유교적 명분으로서의 구실만 찾고 있었다. 명분이 말만으로 역모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은 형식상 왕국이지만 단순한 왕국이 아니라 사대부 왕국이다. 왕은 모든 권력의 중심이지만 실제적인 권한은 사대부 관료들에게 위임한 상징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제나 왕권과 신권(사대부 권력)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소지가 내포되어 있다. 사대부들은 무오사화를 통해 신무기를 얻었다. 모함만으로 반대파를 숙청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구체적인 역모의 증거 같은 것은 필요 없고 혀만 잘 놀려 왕만 조정하면 그뿐이다. 그 다음은 왕이 다 처리하게 한다.
연산군이라는 폭군이 등장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사대부는 훈구파든 사림파든 공동의 이해관계를 지니는 세력들이다. 왕권이 강해지면 사대부는 다 같이 힘들 수밖에 없다. 연산군은 폭군이기 때문에 강한 군주 같지만 사실상 약점 투성이의 허약한 군주다. 그래서 사대부들의 손에 놀아나는 꼭두각시 군주일 수밖에 없었다. 사대부들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진성대군을 왕위에 올렸다. 그가 중종이다. 정도전 이래로 끊임없이 왕권을 제약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노력한 조선의 사대부는 마침내 목적을 달성하여 사대부 국가를 만들었다.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든 폭군이 타도되면 반란 세력의 우두머리가 새로운 왕이 되는 것이 보통이다. 조선은 다르다. 쿠데타를 주도한 사대부는 가존 왕족인 이씨 왕실에서 군주의 배다른 동생을 왕으로 삼았다. 유교왕국은 사직을 정체성으로 삼으며 왕은 하늘의 뜻을 받은 지배자. 그러므로 왕의 혈통은 당연히 세습되는 존재이다. 아무리 사대 권력이 막강해도 천리를 어길 수는 없다. 반정세력이 연산군의 배다른 동생을 왕으로 옹립한 것은 앞으로 왕권을 확실히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팔자에 없던 왕위에 오른 중종도 그들의 꼭두각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