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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세계사 (남경태)

한국사 4

영원히 지속될 줄 알았던 윤원형의 권세는 문정왕후가 죽으면서 끝났다. 권신들도 죽고 왕도 죽자 오랜만에 사림파는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장성한 왕족을 국왕으로 옹립하는 것은 사대부들에게 불안의 요소였다. 국왕을 자신들의 손으로 정할 수 있었으니 왕권을 강화할 생각은 없었다. 반정으로 왕이 교체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골치 아픈 공신세력도 없었다. 그들이 꿈 꾸어온 유교정치를 화려하게 펼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정치 이데올로기로 괜찮지만 철학적 수준으로 보잘 것 없는 성리학이 다소 업그레이드된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다. 국왕을 선택할 만큼 권력을 확고히 장악했고 숙적인 훈구파와 외척도 사라졌다. 그렇다면 사대부들간의 권력다툼은 없어져야 할 것이다. 실제로 역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권력의 정점에 올랐는데도 그들은 자기들끼리 파당을 만들어 싸우기 시작한다. 당쟁, 붕당정치가 본격화 된다. 차라리 왕권을 빼앗기 위한 반란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사대부들은 주먹다짐 같은 것도 없이 입만 가지고 싸우며, 왕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고 막후 실력자기 되기 위해 싸운다. 세계 어느 나라 역사를 봐도 내전과 반란은 흔하지만 조선의 사대부처럼 말꼬리나 잡으며 박 터지게 싸우는 경우는 없다.

 

이조전랑직을 맡으면 과실이 없는 한 재상까지 순조롭게 출세할 수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탐내는 요직이었다. 이를 두고 심의겸과 김효원이 갈등을 빚었고 이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김효원은 한양 동쪽에 살았다고 해서 이를 지지하는 세력을 동인, 심의겸이 서쪽에 살았다고 해서 지지세력을 서인라고 불렀다. 심의겸은 검소하게 생활하며 권세를 부리지도 않았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김효원도 나중에 자중하여 지방행정관으로 일하다가 죽었다. 그런데 당쟁은 왜 일어났을까? 왕국이라면 중앙권력이 수직적으로 구성할 수 있지만 왕이라는 지배자에게 권력이 없다면, 그 권력을 과점한 무리 내부에서는 권력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조선이 왕국인 이상 국왕은 형식상으로 절대 권력자이며 사대부들이 입안하고 집행하는 모든 명령은 왕명 형식을 취해야 한다. 실제 모든 국정을 사대부들이 처리하는 점에서 보면 국왕은 사대부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조선은 사대부 왕국이라는 기묘한 이중적 체제이기에 세자책봉 문제도 사대부의 영향력과 국왕의 결정권이 조합이 되어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대부와 국왕 간에 또는 사대부들끼리 견해가 다를 경우 불화가 빚어질 수 있다. 동인 우두머리인 영의정 이산해가 정철을 제거하게 위해 모략을 꾸몄다. 정철은 광해군을 후보로 낙점했으나 선조는 자신이 총애하는 인빈 김씨 소생 신성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선조는 정철을 삭탈관직하고 서인세력을 물리치고 동인의 손아귀에서 꼭두각시가 된다. 승리한 동인은 서인들에 대한 숙청의 정도를 두고 두 파로 갈린다. 온건파인 유성룡은 남인 강경파인 이산해는 북인이 된다. 조선이 사대부들이 진흙탕의 개처럼 치고받는 동안 바깥에서는 엄청난 일이 준비되고 있었다. 왕의 후계자 문제의 회오리가 가시기도 전에 1592년 일본의 16만 대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다.

 

믿었던 신립의 패전 소식에 조정과 민심의 큰 동요를 가지고 왔다. 백성들은 선조가 도망치려는 것을 알고 가로막았을 정도다. 임진왜란은 20세기 한국전쟁과 닮았다. 먼저 전쟁의 책임자가 아니면서도 한반도가 전장이 되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었고 개전 직후 공격측의 일방적인 공세, 반격과 소강상태, 3국의 참전 등 전쟁의 전개 과정도 그렇다. 게다가 종전협상 과정은 꼭 같다. 한국전쟁에서 국제연합과 북한이 휴전협상의 주체였듯이 임진왜란에서도 조선은 협상에 끼지도 못했다. 유혈파티가 끝난 뒤 일본과 중국은 그냥 손을 털고 가버리면 그만이지만 파티장소를 제공한 조선은 사정이 달랐다. 오랜 전란으로 한반도 전역이 폐허가 되었고 수많은 백성이 죽었고 삶의 터진을 잃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중앙 지방할 것 없이 굶주림이 심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데 지쳐 늙은이와 아이들은 도랑과 골짜기에 쓰러져 있고, 장정들은 도둑이 되었으며 게다가 전염병으로 죽어 넘어지고, 심지어는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죽은 사람의 뼈가 잡초처럼 드러나 있다전쟁으로 빚어진 엄청난 재앙을 복구할 재정도 턱없이 부족했고 문화제 피해도 막심했다. 주목할 것은 강제로 잡혀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철수하는 일본군을 따라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조선 측에 투항한 일본병사도 많았고 조선의 지방관리나 백성들 중 자발적으로 일본 측에 협력한 부일배附日輩는 더 많았다.

 

현대사회라면 난리를 겪고도 정권이 바뀌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사태에 책임이 있든 없든 임진왜란 정도의 재앙이라면 권력자만이 아니라 권력구조도 바뀌어야 정상이다. 물론 일본의 침략으로 비롯된 전쟁인 만큼 원죄는 일본에 있지만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선정부는 철저히 무능과 무책임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조선의 지배층은 변명할 근거가 있었다. 조선의 권력구조가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책임을 묻는다면 당연히 임금과 사대부들이 져야 한다. 군주는 군림하는 존재일 뿐 국적은 사대부들이 담당했다. 사대부들은 전쟁 직전까지도 당쟁을 일삼았고 이순신을 모함하고 임무를 방기 했지만 책임을 면했다. 조선은 엄연히 왕이 다스리는 왕국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대부들에게 큰 성과가 있었다. 토지가 황폐해지고 토지대장도 사라져버렸으니 공전이고 사전이고 말뚝만 꽂으면 모두 내 땅이 되었다. 대부분이 지주들인 사대부들은 일제 토지겸병 (아울러 병합한다는 뜻으로, 특히 남의 토지 따위를 합쳐 가지는 것을 말함)에 나섰다. 몽골지배가 끝난 후 고려의 경우와 흡사하다. 1604년 발표된 공신명단을 보면 호국공신들은 터무니없게 적군과 싸운 사람들이 아니라, 선조를 도망치게 한자들과 명에 군사를 요청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에도 이런 불공정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세계사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다. 멀러 서유럽에서는 전통의 신분제가 무너지고 신흥시민세력이 국가의 주인으로 떠올라 국민국가를 수립하는 변혁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동북아시아에서는 수천 년 동안 질서의 중심이었던 중화세계가 쇠퇴하고 비중화세계가 도약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일본에 이르는 비중화세계는 역사상 처음으로 힘의 우위를 보이기 시작한다. 일본에서 남풍이 중국에서 북풍이 불어올 것이다. 비중화세계는 중화세계가 마음대로 교린交隣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1593년 여진을 통일한 여진이 추장 누루하치가 구심점이었다. 조정은 사대부들이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기들끼리 동림당과 비동림당을 만들어 당쟁을 일삼느라 변방의 사정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안중에도 없었다. 누루하치는 북방유목민족의 전통적 황제인 칸에 올랐다. 누루하치의 야망은 단순히 중국을 사대하지 않는 독자적 제국이 아니었다. 중원북방 민족이 장기적으로 존속하려면 반드시 중국대륙을 정복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열강 속에서 약소국이 벌이는 외교란 줄타기처럼 섬세하고 위험한 곡예일 수밖에 없다. 어느 측으로 기울어져서도 안 되고 줄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다. 명은 서산에 지는 해고 후금은 동에서 떠오르는 해다. 조선의 광해군의 줄타기는 결코 쉽지 않다. 1618년 후금이 중원진출의 관문에 해당하는 랴오뚱을 공략하자 광해군의 줄타기는 위기를 맞았다. 명의 황실이 문란해지면서 변방의 주둔군도 무기력했다. 명은 조선의 군대를 징발해 후금을 막으려 했다. 여기서 광해군의 전략은 지원군을 보내되 싸우지 않는다는 전략이다. 광해군은 예기치 않은 공격을 받아 줄에서 떨어지게 된다. 바깥문제로 안을 다스리지 못한 게 원인이었다. 대북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육성한 왕당파는 잘 쓰면 약이 되고 잘못 쓰면 독이 된다.

 

인목왕위를 폐위시켜야 한다는 대북인들 주장을 광해군이 쉽게 허락한 것이었다. 연산군을 타도한 중종반정이래로 처음으로 말만의 역모가 계획되었다. 다 합쳐 1500명도 못되는 병력으로 반란을 성공시켰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의 형편을 말해준다. 그렇게 인조는 반정으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 기존의 합법적인 왕권에 도전한 것이므로 실은 쿠데타였다. 성공한 쿠데타이기에 反正으로 기록되었다. 광해군이 꾀한 왕국의 꿈이 실패하면서 조선은 시대적 조류에 역행하는 수구체제로 돌아갔다. 광해군이 물러남으로써 조선에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새 정권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1만 명의 병력이 평안도로 내려왔다. 겁이 난 사대부와 인조는 공주로 피난 갔다. 외적의 침략도 아닌 국내반란으로 도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으므로 백성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광해군이 주도한 왕국화의 노선이 붕괴되면서 국왕의 권위도 무너진 셈이다. 그로부터 10년 뒤 도망친 국왕은 오랑캐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먼저 한반도를 공격한 것은 중화세계이지 비중화세계는 아니었다. 한족 왕조인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침략하여 멸망 시켰다. 고려시대 때 거란과 몽골의 공격을 받은 이유는 고려가 중화세계에 강한 소속감을 보여 그들을 적대시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이 중화세계의 허울을 벗었다면, 광해군처럼 중립외교를 하였다면 후금의 홍타이지는 굳이 중원을 공략할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할 이유가 없었다. 반정을 주도한 서인 정권이 수구로 돌아서면서 모든 사정은 변했다. 적이 코앞에 왔을 때 인조는 강화도로 도망갔다. 후금은 황해도에 주둔한 채 피난 정부에 화의를 제안했다. 그들의 요구는 의 연호를 사용하지 말 것과 조선 왕실 왕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명을 칠 때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후금은 조선에 형제관계 대신 군신관계로 하자고 요구했다. 여기서 조선의 사대부들이 꼭지가 돌았다. 사대부들은 일제히 일전불사一戰不辭를 외쳤다. 국왕과 사대부가 일치단결하여 항전을 부르짖은 것은 조선의 백성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조선은 국민국가가 아니라 사직을 중시하는 국가였고 나라의 주인은 지배자였다. 조선의 태도를 확인한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중원을 정복하기 위해 후방을 다지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청태종은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 침략에 나섰다. 전쟁 양상은 정묘호란과 다를 바 없었다. 불과 보름만에 청군은 평양을 거쳐 개성부근까지 내려왔고 조선의 사대부들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청군이 강화도 가는 길목을 차단하자 인조와 대신들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산성 내에서도 항복과 항전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그런 문제라면 왜 남한산성으로 기어들어갔을까? 전란이 있기 전에 합의할 일이지. 결국 1637년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올리고 전란은 끝이 났다. 오랫동안 동북아시아 질서의 구심점이었던 중화세계가 해체되고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았다. 그 순간 한반도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난다. 조선에서는 수구와 복고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중화의 세계가 멸망했다고 믿지 않고 중화세계가 조선으로 옮겨왔다고 믿는다. 불과 두 달의 전쟁이었지만 병자호란은 7년 동안 벌어진 임진왜란에비해 피해가 결코 적지 않았다. 청군에 붙잡혀 간 사람만 50만 명에 달했다. 민간인을 잡아긴 청의 수단 비열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문제에 대처하는 조선 사대부들도 비열함을 넘어 황당했다. 제 나라 백성과 제 집 여자가 잡혀갔는데도 책임을 느끼기는커녕 안스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못난 정부와 못난 가장을 둔 탓에 적국에 끌려가 온갖 수난을 당하고 돌아온 조선의 여인들은 환향녀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굴육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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