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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철학 (지바마사야 지음, 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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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각을 부르는 유머 유머란 코드에서 엇나간 발언이다. 유머는 어떤 새로운 시각을 그 환경으로 데려온다. 아이러니는 근거를 의심하는 것이다. 유머는 시각을 바꾸는 것이다. 대화에서 어떤 발언이 발생할 때 그 환경 코드의 적용범위 안에 있는지를 판단하는 시험이 시작된다. 적용이란 틀에 맞춘다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대화의 흐름은 하나하나의 발언이 코드에 적절하게 들어맞는지 아닌지, 즉 코드의 적용범위 안인지 아닌지 시험당한다.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발언이 유머의 효과도 지니는 것이다. 유머에서 코드는 파괴되지 않고 오히려 확장된다. 음과 음이 부딪히거나 아름다운 화음이 되기도 하는 음악과 닮은 게 아닐까? 새로운 견해가 원래의 코드를 비튼다. 그러면 원래의 코드는 '음악으로 간주한다'는 다른 코드로 이른바 '코드 변환'된다..
아이러니의 과잉, 초코드에 의한 탈코드화 고차원적인(메타적인)근거가 부여된 물음이 연쇄적으로 끌려나오게 된다. 악이란 다른 사람을 슬프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슬픔에 '어떻게 근거를 부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나와서 더욱 깊어진다. 또 다른 물음이 나오면 더욱 깊어지고... 이런 식으로 근거 부여의 연쇄는 멈출 줄을 모른다. '불륜은 악이다' 라는 원래의 코드는 상식적인 믿음일 뿐이다. 근거가 빈약하다. 확실한 근거가 있는 사고를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궁극의 근거, 즉 진리를 알고자 하는 욕망이 커진다. 원래의 코드에 대한 의심에서 도출된 고차원적 근거를 '超코드'라고 부르겠다.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이 말하는 내용의 근거를 끈질기게 의심하고 불합리를 밝혀 내어 상대방이 원래 가지고 있던 신념(코드)이 얼마나 허접한지 폭..
코드의 전복 코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최소한의 츳코미 의식이 최우선의 대전제다. 공부란 새로운 것을 자각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일이다. 0. 최소한의 츳코미의 의식: 자신이 따르는 코드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1. 츳코미: 코드를 의심하고 비판한다. 2. 보케: 코드에서 어긋나려고 애쓴다. 사전적으로 아이러니는 반어이고 보케는 재치라고 정의할 수 있지만, 츳코미와 보케가 핵심이라고 이해해도 상관없다. 코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비유하자면, 나 홀로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 것이다. '이때는 이래야 한다(당위)'를 '이러한 코드다'라고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본다. 환경에 관련짓지 않는다. 이것을 '메타적 입장에 머문다'라고 말하자. 메타란 고차원적이라는 뜻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전체를 조감하는 ..
겉도는 이야기에 자유가 깃든다. 우리가 깊게 공부하는 이유는 환경의 동조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이다. 근본적으로 깊은 공부, 즉 래디컬 러닝이란 언어편중적 인간이 되는것이다. 언어편중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어떤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행위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언어를 그 자체로서 조직하려는 의식을 높이는 것이다. 언어의 도구적 사용에서 완구적 사용으로 향하는 것이다. 환경에 의존하여 코드에 순종하는 생활이 우선 기본 값으로 주어진다. 코드는 순종하는 기본값 상태는 보수적이다. 이와 달리 공부를 통해 체득하기 바라는 것은 비판적 자세다. 자유의 여지는 오히려 동조에 서툴러질 때 깃든다. 그것은 환경에서 겉도는 이야기다. 공부를 통해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재수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언어가 재수 없어져서 환경에 맞지 않..
깊게 공부하기란 도구적 언어와 완구적 언어 언어를 일반적으로 도구라고 보는 도구적 사용이 첫 번째 언어사용 모습이다. 환경에 있어서 목적적 행위를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가령 '소금 좀 집어줘'라는 말은 의뢰이다. 상대방을 움직여 소금을 손에 넣으려는 목적으로 하는 말이다. 두번째 단순히 말하는 것 자체가 목적인 언어사용이다. 이것을 완구적 언어 사용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언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무언가 말함으로써 행하는 것을 철학에서는 언어행위라고 부른다. 한편 목적이 확실하지 않고 어느 정도까지 완구적인 말을하는 경우도 있다. 친구와 다양한 화제를 꺼내가면서 대화할 때는 그저 말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친구 관계를 평화롭게 유지하기'라는 언어행위를 하..
언어의 불투명성 우리 인간은 언어라는 필터를 매개로 현실과 마주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환경에서는 새로운 언어의 동조에 익숙해지는 것이 과제다. 사물의 이름, 전문용어, 약어, 특징적인 말의 사용법 등 특정환경에서만 쓰이는 화법을 일부러 사용해야 한다. 새로운 환경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자연에게 부자연스러운 화법으로 말은 할 수 있다. 하지만 말만 하고 있다는 느낌, 말이 입에 붙지 않고 겉도는 느낌이 든다. 언어가 불투명한 것이 되어 현실위에 떠 있는 느낌. 낯선 말이 주는 억지로 말하는 느낌은 언어의 불투명성을 드러낸다. 말의 새로운 정의에 금방 적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때 언어는 일시적으로 불투명한 이물이 된다. 소리의 덩어리, 즉 의문의 기호가 된다. 불투명한 이물로서 언어가 현실위로 떠올라 있다. 이 상태가 바..
언어의 타자성, 언어적 가상현실 한번 완성된 생활습관은 매우 끈질기다. 이곳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감내하기도 한다. 삶이란 타자와 관계하는 것이다. 외부에서 양향받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나 자신은 성립 불가능하다. 즉 나 자신은 항상 옷을 입고 있다. 나 자신은 타자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우리의 육체는 부모 그리고 앞선 세대의 유전자가 섞여 만들어진 것이다. 유전적 경향에 성장 과정이 더해진다. 성장 과정에서 타자와 관계하는 동안 사고방식이나, 호불호 생겨닌다. 우리는 개성적인 존재다. 하지만 백퍼센트 자기가 만들어낸 개성은 없다. 개성이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어떤 타자와 어떻게 관계해 왔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개성은 타자와의 만남으로 구축된다. 자신의 성분인 타자가 결국 자신의 욕망이나 쾌락의 원천이다..
자유로워지기 자유로워진다는 것 , 그것은 지금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생각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새로운 자신이 된다는 말이다. 즉 새로운 행위의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기존의 자신을 파기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른바 제2의 탄생이다. 회사, 가족, 지역과 같은 환경이 우리의 가능성을 제약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환경을 벗어나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환경의존적 존재다. 이 책에서는 환경이라는 개념을 어떤 범위에서 타자와 관계맺는 상태라는 의미로 사용하겠다. 환경도 타자다. 중학교 친구들도 환경으로 간주해야 한다. 사회 전체나 인터넷 세상, 글로벌 세상 등도 마찬가지로 환경이다. 타자란 자기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다. 우리는 환경적 제약, 즉 타자 관계에 의한 제약에서 벗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