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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트런드 러셀

누구나 자유롭게 게으를 수 있는 세상을 위하여 (하워드 우드하우 교수)

1935년 첫 발표된 그의 수필에 무용한 지식 이야기가 나온다. 러셀은 소위 무용한 지식이 우리가 그것을 몰랐더라면 놓쳐버렸을 환희의 감각으로, 우리이 경험을 고양 시키고 풍부하게 만듦으로써 과일의 맛을 더 달콤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살구 예를 들고 있다.  정원에 앉아 읽으면서 맛 보았던 정신적 쾌감은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너무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과일의 간략한 역사와 어원을 아는 것만으로 살구맛은 더 달콤해지고, 햇살은 더 밝게 빛나고, 내 이해는 더 높아졌다. 무용한 지식은 살구의 역사처럼 사소한 부분에서까지 개인들에게 커다란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러한 지식의 추구를 가능케 해주는 것은 바로 사색하는 습관인데, 여기에는 게으름이 요구된다. 사람은 게으를 수 있을 때  비로소 마음이 가벼워지고, 장난도 치고 싶고, 스스로가 선택한 건설적이고, 만족스러운 활동들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셀은 가벼운 마음으로 놀 수 잇는 그러한 기회들이 아동교육에서 특히 더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그런 기회를 갖지 못할 경우, 노곤하고 불퇘하고 파괴적인 아이로 성장하며 자기 인생에서 보다 깊고 폭넓은 목적들을 이해하는 능력까지 빼앗겨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게 살구나무 아래서 보낸 그 게으름의 시간이 없었더라면, 나는 러셀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류의 경험은 오늘날까지도 대다수 사람들에겐 그림이 떡이다. 그들에겐 무용한 지식을 추구하며 빈둥댈 돈도 여가도 없다. 그들은 러셀이 말하는 효율성 숭배에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지식의 경제적 혜택 혹은 그러한 혜택이 가져오는 타인위에 군림하는 권력 강화만이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부와 권력은 최상의 가치로 여겨지는 반면, 게으름과 사변적 지식은 빈둥빈둥 노는 것으로 비쳐진다.  노동을 구성하는 바쁘고 도구적인 활동들보다 게으름이 더 높게 평가받을 수 있다면,  게으름은 바람직할뿐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도 누릴수 있는 권리가 될 것이다. 게으름은 노동계층이든, 전문계층이든 모두가 누릴 수 있다.  물론 여가를 돈을 벌거나, 타인 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써버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러셀이 주장하는 핵심은 노동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인생의 목표라면 사람들은 노동을 즐길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볼때 실제 노동하는 사람들은 틈만 나면 일을 피하려 한다. 오직 타인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들만이 노동의 가치를 찬양한다. 만일 게으름, 놀이, 사변적 지식을 향유하는 능력이 그 자체로 가치를 인정받는다면, 러셀이 제안한 개혁들이 수행될 수 있다. 게으름 찬양의 목적은 즐겁고, 가치있고, 재미있는 활동들을 누구나 자유롭게 추구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데 있다. 러셀에 의하면  사색하는 습관은 갖가지 도그마를 피하고, 여러 다양한 관점을 표출하게함으로써, 실험적이고 공평한 태도로 모든 의문들을 고려할 수 있게 해준다.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들에게  새로운 증거로 이어지는 열린 마음을 고양시켜 주는 것이 과학적 방법 이듯이 다른 관점들과 자신의 관점이 충돌할 때 조차도,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로운 표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 바로 사색적 습관이다.

 

사색적 습관에 기초한 무용해 보이는 자식에의 접근이야말로 지극히 유용하다는 것이다. 러셀은 '현대의 획일성'이란 글에서 획일성이 위험수위에 달해있음을 경고한다. 누구나 성공한 고위급인사들의 입맛에 맞추려 하기 때문에 각 분야의 전문가란 사람들 조차도 시각이 똑같았다. 이런 사회적 응집의 진정한 위험성은 소수에 대한 불관용,  모든 분야에서 획일성을 선호하는 데서 오는 질적 저하, 다소 떠들썩한 국가주의의 등장, 정체화 될 위험,  다시 말해 대안적 관점이나 행동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로 형성되는 보수적 태도에 있다고 지적한다. 러셀이 특히 반대하는 두 가지 도그마는 파시즘과 공산주의다.  이 두 체제는 경험적 증거나 사회 정의, 그 어느 기준에 의해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극단적인 입장을 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입증해준다. 또한 이 도그마들은 순종적이면서도 한편으론 격렬한 행위를 행위를 선호하며, 사고의 조직화로 지금까지 고안된 것중에 가장 치명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파시즘은 방법과 목표, 모두 비인도적이기 때문에 두 도그마중에서도 더 심각하다.사회주의란 토지, 자본, 광물 등의 경제적 소유권과 보편적 민주주의 양자 모두가, 그 사회의 공공기관들이 속해 있는 사회라고 정의한다. 그는 이 두가지 핵심 요소들을 조화 시킴으로써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야말로 공산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점을 보여주려 한다.

 

교사에게 하루 두시간의 가르침이면 충분하며 그 위에,  교사들도 아이들의 요구에서 잠시 떠나 사회적 접촉을 가지고, 다른 종류의 일도 해볼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덧붙여져야한다. 아동의 충동을 키워주고 가치있는 사회적 활동들로 그들을 안내하는 자상하고, 재치있는 방법을 통해 교사의 권위가 형성된다. 러셀은 노동을 더 이상 최고 가치로 여기지 않는 세상이 보다 행복한 세상일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신기술들은 작업을 용이하게 하고, 만인에게 보다 큰 여가를 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들은 작업단계를 감시하고 노동시간을 연장시킴으로써, 생산성을 향상시키는데 사용되고 있다. 우리에겐 이윤동기 이외에 노동을 비롯된 모든 인간활동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새로운 가치들이 필요하다.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게으름의 진가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는 휴머니티에 등을 돌려버린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