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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트런드 러셀

금욕주의에 대하여

이제는 금욕적 극기는 더 이상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일단 금욕주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중에서도 가장 어렵고도 본질적인 것은 죽음이다.  죽음의 공포에 맞서기 위해서는 먼저 무시하거나, 생각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 애쓴다. 혹은 반대로 인간생명의 덧없음에 대해 끊임없이 사색하기도 한다. 그리고 죽음은 죽는 게 아니라, 새롭고 더 좋은 인생으로 가는 관문일 뿐이라고 자타를 설득하는 것이다. 전혀 준비가 안된 사람이 죽음을 접하게 되면, 심각한 균형감 상실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죽음을 무시해 버리기보다, 그에 대한 어떤 태도를 확립 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죽음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것 역시 해로운 방법이다. 어느 한 주제를 너무 배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특히 행동이 뒤따르지 않을 땐 더욱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종교적 믿음이란 것은 의식적 영역에서만 존재할뿐, 그 믿음이 무의식 기제까지 바꿔놓진 못한다는 데 있다.

 

죽음이란 주제는 피해서도 안되지만, 지나치게 집착해서도 안된다. 그러므로 너무 의도적일 필요는 없지만 새로운 관심과 특히 새로운 애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린아이가 어떤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강한 애정을 가지는 것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표시이기 쉽다. 애정의 대상만이 자신에게 안전감을 주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린시절에 이런 류의 애정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만일 사랑했던 그 사람이 죽는 일이 생기면, 그 아이이 인생은 산산히 깨질지 모른다. 그 후의 모든 사항은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사실 공포심으로 가득 차 있게 마련이다. 부모는 자신이 그런 종류의 애정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기쁨을 느껴선 안된다. 만일 그 아이가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환경속에서 행복하게 자랐다면, 아이는 어떤 사람의 상실이라는 자신에게도 일어날지 모를 그 고통을 별 어려움 없이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성장과 행복의 정상적인 기회들이 주어진다면, 삶과 희망에 대한 충동만으로도 충분하다. 어른은 자기 자신이나 사랑하는 타인들의 죽음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이 떠오르면 다소 금욕주의적인 태도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다. 다시 말해 죽음의 중요성을 최소화 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것을 초월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냉정하게 사고해야 한다. 이런 원칙은 다른 공포감도 마찬가지다. 즉 공포를 일으키는 대상을 단호하게 주시하는 것이 유일한 처치 법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야 하다.  ‘그래, 좋아.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어쨋다는 거지?’ 사람은 언제라도 자신이 살아가는 데는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고, 자신의 죽음이나 아내 혹은 아이의 죽음이 이 세상에서 그를 흥미있게 만드는 모든 것을 끝장 내는 것은 아니라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성인으로 살아가면서 이러한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청년기에 아낌없는 열정으로 젊음을 불태우고, 자신의 인생을 걸 만한 직업을 가지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불행이 위협해 올때 그 상황을 대처하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불행을 피하려는 태도 그리고 과감하게 그것과 맞서려는 태도다. 비겁하지 않다면 전자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두려움의 노예가 될 마음이 없는 사람에겐 머지 않아 후자가 필요해질 것이다. 이 자세가 바로 금욕주의를 형성한다. 과거 훈육의 개념이 대단히 무시무시해서 교육이 잔인한 충동의 통로가 되었다. 아이에게 고통을 주면서 쾌감을 느끼는 일없이 최소한의 징벌을 내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물론 옛 관습에 젖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런 쾌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부인할 것이다. 가난에 대한 공포, 육체적 고통의 공포, 부유층 여자들 사이에는 출산의 공포도 있다. 만일 우리가 그런 것들이신경쓰지 말아야 한다는 노선을 택한다면, 해악을 줄이기 위해 아무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는 노선에도 따르기 쉬울 것이다.  여자들은 출산시 마취제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오랜 세월 이어져 왔다.  그러나 마취제가 해롭지 않다는 의사들의 주장으로 분만의 고통이 점점 줄어들수록, 그 고통을 이겨보려는 부유한 여자들의 의지는 더 약해지고 있다. 결국 그녀들의 용기가 더 빨리 줄어든 셈이다.

 

인생 전체를 달콤하고 유쾌하게 만들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람들은 불유쾌한 부분들에 적합한 어떤 태도를 취할수 있어야 한다. 지나친 동정은 금물이라는 것을 어린아이들을 다루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금방 알게 된다. 물론 너무 동정심이 없는 것은 더 나쁘지만, 이 경우에도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양극단 모두 나쁘다. 아이들은 때로는 약간 엄하기도 한 어른이 자신들에게 가장 좋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자신들이 사랑받고 있는지 아닌지를 본능으로 느끼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한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자신의 발달을 진심으로 소망하면서 보여주는 엄격함이라면, 어떤 것이든 참아낼 수 있다. 이론상으로 해결책이 간단하다. 교육자들에게 현명한 사랑을 고취시켜라.  그러면 옳은 일을 할 것이다.  실제는 문제가 복잡하다.  피로, 짜증, 걱정, 초조가 부모나 교사를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론 아이의 행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러한 감정들을 아이에게 발산해도 좋다고 하는 교육이론에 기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인생에서 만나는 고통스런 일에 대한 것들을 아이들에게 숨기려 해서도 안되고, 강요해서도 안된다. 상황이 불가피할 때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고통스런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땐, 있는 그대로 감정을 넣지말고 얘기해야 한다. 어른들은 슬픔 속에서도 쾌활한 용기를 보여주어야 하며, 그것을 보고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배워나갈 것이다. 청년기에는 사사롭지 않은 많은 관심사들이 젊은이들 앞에 제시되어야 하며, 자기외부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삶이 있다는 것을 깨쳐주어야 한다. 불행이 닥쳤을 땐 아직도 살아야 할 이유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견뎌내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일어나지도 않은 불행에 깊이 파고들게 두어선 안된다. 

 

젊은이들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혹시 자신이 교육에 필요한 훈육적 요소들로부터 가학적 쾌감을 느끼고 있지나 않은지 스스로를 엄밀하게 감시해야 한다. 훈육의 동기는 항상 품성이나 지성의 발달에 두어야 한다. 지성에도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훈육은 내적 충동에서 솟아나올 때가 가장 좋다는 얘기다그러기 위해선 아이나 청년에게 어려운 무엇인가를 달성하고자 하는 야심이 있어야 하고, 그 목적을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와 같은 야심도 흔히 주변의 누군가로부터 제의되는 (요구되는) 수가 많다.결국 자기 단련 조차도 교육적 자극에 의해 좌우된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