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트런드 러셀

이성의 몰락, 니체와 히틀러(2)

파시즘은 쾌락과 지식을 목적으로 여기는 것은 그들이 보기에 지나치게 소극적이다. 그들은 쾌락의 자리에 영광을, 지식의 자리에 자신들이 바라는 바가 진실이라는 독단적인 주장을 대신 들어 앉힌다. 피히테는 이 엄청난 움직임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추상적 형이상학자로 출발한 그는 처음부터 자의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성향을 보였다. 그의 철학 전체가 ‘나는 나다’라는 명제로부터 전개된다. 루이14세는 '국가가 곧 짐이다'라고 말했지만, 피히테는 ‘우주가 곧 나다’라고 말했다. 1807년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저 유명한 ‘독일 국민에 고함’이란 일장 연설을 했는데, 여기에서 처음으로 국가주의의 완결된 강령을 선보였다. 이 연설문은 독일국민이 우수하다는 설명으로 시작되고, 독일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빚어내는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 그 새로운 교육은 본질적으로 의지의 자유를 완전히 말살하는 것에 달려있다.

 

숭고한 애국주의로 불꽃으로 싸우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숭고한 정신의 인간이라면, 국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것이다.숭고한 인간은 인류의 목표다. 숭고하지 못한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는 교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현대판 공격의 정수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에겐 불멸의 영혼이 있고, 이 점에서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이른바 인권이란 개념은 기독교 교리를 발전시킨 데 불과했다. 또한 공리주의는 개인에게 절대적인 권리를 용인하진 않지만, 한 사람의 행복과 다른 사람의 행복에동등한 비중을 두었다. 이렇게 해서 공리주의는 천부적 권리와 같은 수준의 민주주의에 도달했던 것이다그러나 피히테는 정치적 캘빈주의와 마찬가지로 특정인들을 선민으로 골라내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피히테로부터 시작된 이 같은 움직임은 자신들을 기분좋게 해주는 것 외에는 아무 득도 없는 믿음을 통해 자존심과 권력욕을 부추기는 방법이다.  피히테에겐 나풀레옹보다 우월감을 느끼게 해줄 교리가 필요했다.

 

산업주의와 전쟁은 기계력에 의존하는 습관을 가져다 주었으며 경제적, 정치적 힘의 대변환을 야기했다. 그 결과 독단적인 자기주장을 펼치는 대규모 집단들을 낳았다. 바로 거기에서 파시즘이 자라난 것이다. 대자본가들은 스스로 안전을 지킬 필요성을 느꼈다. 패배한 계층들은 왕과 귀족, 소규모상인, 타종교 인에 대해 반대하는 종교인, 남성이 여성위에 군림하던 시절을 아쉬워하는 남자들은 궁지에 몰렸다. 자연히 그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고, 집단적으로 모이면 다수였다. 자본가들과 군사전문가들은 패배한 세력을 모아 산업과 전쟁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서 가장 중세적인 반동을 지지하는 정당을 만들고자 했다. 결국 나치철학의 비합리적 요소들은 더 이상 존재이유를 가지지 못하게 된 계층들의 지지를 끌어모아야 필요성에서 나온 반면, 비교적 합리적인 요소들은 자본가와 군인들에게서 나왔다. 비합리적인 이유는 예를 들어 소규모 상인들의 경우 자신들의 희망을 실현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환상적 믿음만이 좌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피난처가 된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자본가와 군인들의 희망을 파시즘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영광과 영웅주의와 자기희생에 현혹되어 자신들이 중대한 이익은 제대로 보지 못한 채, 감정에 휩싸여 자신의 목적도 아닌 것에 스스로 이용 당하고자 한다.

 

히틀러는 나치의 계획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우리 민족국가는 과학을 민족의 자부심을 높이는 수단으로 높이 받들 것이다. 세계역사 및 문명의 역사를 가르치는데 있어서도 이러한 시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발명가는 단순히 발명가로서가 아니라, 동포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더더욱 위대해 보여야 한다.....’   히틀러에게 진리 추구로써의 과학은 없었다. 히틀러가 학설로 받아들이거나 거절함에 있어, 오직 정치적 근거만을 내세울 진실이냐 거짓이냐의 개념은 일절 끌어들이지 않는다. 정치에서 이성이 몰락하게 된데는 두가지 요인이 있다. 하나는 세상이 자신들에게 아무런 기회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임금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회주의에서도 희망을 찾지 못하는 계층 및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요인은 능력 있고 힘 있는 사람들 가운데 공동체의 이해와 반하는 이해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세계가 가장 필요로 하는 두가지는 '사회주의와 평화'이지만, 우리 시대 가장 힘 있는 사람들의 이익에 의해 정면대치 되는 것도 바로 두가지다.

 

사회주의와 평화로부터의 위협이 높아질수록 정부는 국민의 정신적 삶을 더욱 타락시킨다. 또한 현재의 경제적 난국이 가중될수록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지적인 냉철함에서 벗어나 기만적인 도깨비불쪽으로 향하게 된다. 1848년이후로 확대되어온 국가주의 열기는 불합리 숭배의 한 형태이다. 하나의 보편적 진실이 있다는 생각은 이미 꺽긴지 오래다. 모든 국가들만의 진실이 있을 뿐이다. 임금노동자에게는 그들만의 진실이 있고, 자본가들에게는 자본가들만의 진실이 있다. 이처럼 다른 진실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만일 이성적 설득마저 좌절된다면, 정신 나간 선전이 판치는 대결과 전쟁에 의해 결정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세계를 전염시키고 있는 국가 및 계급간의 깊은 반목이 해결되어 질 때까지는 인류가 이성적 정신 습관을 회복하길 기대하긴 어렵다. 보편적이고 공정한 진리의 기준에 호소한다는 의미에서 '합리성'이야말로 인간종족의 안녕에 으뜸가는 요소라고 보는 이유도 여기있다. 합리성이란 자신이 동조할 수 없는 부분에서 살인으로 해결해 버릴만한 배짱도 없는 사람들의 헛된 꿈에 불과하다며, 합리성을 경시하고 거절하는 불행한 시대에는 더더욱 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