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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트런드 러셀

내가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반대하는 이유

요즘엔 공산주의와 파시즘이 정치의 유일한 실제적인 대안이라고 한다. 내가 '공산주의'라고 할 때의 의미는  제3인터내셔널의 교의를 수용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초기 기독교인들도 공산주의자들 이었고 중세에도 그런 부문들이 많았지만, 그런 의미의 공산주의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 나는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에 깔린 철학은 물론이고, 마르크스의 철학에 동의할 수 없다.

* 나는 마르크스의 가치론은 물론 그의 변형된 잉여가치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대부분이 자본가들에 대항  하는 입장을 세우고자 하는 그의 편의에 따라 이루어진 취사선택이었다.

* 어느 한 사람을 두고 무오류자로 간주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 공산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소위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것은 사실, 과두지배계급이 된 소수의 독재나  다름 아니다. 통치란 권력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지 않는 한, 언제나 지배계급의 이익속에서 수행된다는  것을 모든 역사가 보여주고 잇다. 그 계급이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한, 자기 계급의 이익을  위해 그 힘을 쓰려 할 것이다.

* 공산주의는 자유, 특히 지적자유를 파시즘을 제외한 다른 어떤 체제보다 심하게 제한한다. 자신의  힘을 증대시키는 것을 제외한 어떤 변화에도 반대하는 것이 관료들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 마르크스와 요즘 공산주의자들의 사고에는 정신노동자들에 비해 육체노동자들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측면이 있다.

* 계급 전쟁을 설파하는 것은 대립하는 양세력이 어느 정도 힘이 비슷하거나 혹은 자본가측이 우세한  시점이라해도 계급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만일 자본가 측의 힘이 우세하다면, 그  결과는 반동의 시대다. 만일 양측의 힘이 엇비슷하다면 현대의 전쟁방식을 감안할 때, 그 결과는 모두  사라져버리는 문명의 파멸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 마르크스와 공산주의는 너무도 많은 증오로 가득차 있다. 전쟁을 치르고 승리한 측이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재건에 나서리라고 기대하는건 무리다. 전쟁의 애초의 투쟁 명분에서 이탈해  독자적으로 흐르게 된다는 점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너무 쉽게 망각한다.

 

공산주의자들의 목표는 전반적으로 나도 동감하는 바이다. 다만 내가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수단이다. 파시즘은 반민주적, 국가주의적, 자본주의적이다. 현대 세계의 발전과정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서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체제가 확립되면,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두려워 하는 중산계층에 호소한다. 기독교에서는 이론으로나마 개별 인간의 영혼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타인들의 영광을 위한 수단이 될수 없다고 정의해왔다. 현대 민주주의 힘은 기독교의 그 같은 도덕적 이상에서 나왔으며, 통치세력이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것을 막는데 큰 역할을 해왔다. 러시아의 강제노역 실태는 독재의 불기피한 결과이다. 역사를 보아도 전제주의에는 언제나 노예제나 농노제가 함께 했다. 나치측의 가장 막강한 힘은 중공업, 특히 철강과 화학이었다.  국가차원에서 조직된 중공업은 오늘날 전쟁 조장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파시즘이 새롭게 승리할 때마다 전쟁은 가까워진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터지고 나면, 그 당시 존재하고 있던 모든 것은 물론 파시즘 조차도 깨끗이 쓸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에 동시에 적용되는 몇가지 반론이 있다. 두 체제 모두 소수의 집권자들이 대다수 국민들을 미리 생각해둔 틀에 강제로 짜맞추려 한다. 기계재료들은 자체내 고유의 발전법칙이 아닌 제작자의 목적에 따라 많은 변형을 겪게 된다. 파시스트와 공산주의자들은 특정 틀에 끼워 맞추기 위해 개인들을 비틀어 버린다. 사람에게 인위적인 틀을 가했을 때 찾아오는 필연적인 결과는 잔인함아니면 무관심, 혹은 이 둘이 번갈아 나타나는 인간들을 양산해내는 것이다. 기계에 몰두하게 되면 이른바 기계 조종자의 허위의식이란 것이 생기게 된다. 개인들과 사회를 무생물 다루듯 하면서 조종자들 스스로가 神적 존재가 된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수동자내부에 깃든 자연스런 성장력에 대한 동정심이 모두 쇠퇴해 버린다. 그 결과 수동자는 조종자가 바라는 대로 미리 생각해둔 틀 속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병적으로 뒤틀려버림으로써, 괴상하고 섬뜩한 사회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인류가 이러한 기형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자유로운 성장, 자기 마음대로 해보기, 훈련되지 않은 자연스런 삶이 필수적이다. 이것이야 말로 민주주의와 인내가 요구되는 궁극적인 이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