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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생활사 (차윤정)

시련

 

'아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기새등등하던 억새의 칼잎들이 가을볕에 물기가 빠져버리고, 불어오는 가을 바람에 우수수 소리내어 운다. 가을 바람에 울어대는 억새풀은 더 없이 낭만적이다. 억새는 황폐한 땅에서 숲을 준비한다. 억새는 자라는데 그리 많은 양분이 필요하지 않다. 산불로 인한 토양의 성분이 다 타버린 척박한 땅에서 비교적 잘 자라는 억새는 빠르게 세력을 키울 수 있다. 

 

늦 가을에 손끝이 시린 것은 서리꽃의 날카로움 때문이다. 아침이면 붉은 단품 낙엽의 가장자리에 하얀 서릿발이 피어난다. 가장 치명적인 독이 가장 극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서리맞은 잎이 더 붉다고 했던가? 서리에 쭈글쭈글해진 열매는 가장 진하고 달다. 누렇게 말라버린 지푸라기에, 떨어져 딩구는 낙엽에, 바위의 이끼 위에, 부러진 가지위에, 서리는 정교한 조각을 만들어 낸다.들판의 꽃이 아름답듯 들판의 서리가 아름답다. 숲속의 기온은 서리가 생기기에 부적당하다.  이 낭만적인 서리는 참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든가?  늦은 봄에 예고 없이 내리는 서리에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망이 헛수고가 되었던가?  가을 볕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생명들에게, 이른 가을 서리의 방문은 또한 위험하다. 서리는 갑작스런 기온 저하로 생긴다. 공기중에 간신히 떠 있던 물방울들이, 급랭한 새벽 공기에 얼어 붙어 닥치는대로 결정을 키운 것이 서리다. 가을날 서리가 내린 후 땅은 본격적으로 얼어붙기 시작한다.  흙의 미세한 구멍을 타고 올라온 물기가 하얀 서릿발을 세우면, 뿌리는 이제 살아 있는 식물의 일부가 아니라 흙의 일부다. 다양한 토양내 생물들은 땅과 같이 얼어붙는다. 땅의 이런 적용이 없다면 숲은 곧 병들고 말것이다. 겨울은 아주 혹독하게 추워야 다가올 봄이 건강하다. 땅의 진실은 약간의 두깨만 극복하면 알 수 있다. 얼어있는 땅이라지만 얼음의 두께만 이겨내면 보금자리가 된다. 겨울 대기가 아무리 추워도 땅속은 따뜻하다. 흙 아래 불과 수십 센티미터만 내려가도 흙은 지상의 공기변화를 차단하고, 겨울 나는 생명들을 보호한다. 그래서 숲의 많은 생명들이 땅속을 겨울을 나는 움막으로 삼는다.

 

겨울바람은 거침이 없다. 미미한 바람소리라도 텅빈 숲을 통과하면서 휙휙소리를 낸다. 겨울에 경계해야 할 것은 추위보다 건조함이다. 바람은 땅의 물기를 여지없이 말려버린다. 물기를 빼앗긴 토양은 푸석거리며 부서진다. 부서진 입자들은 바람에 날린다. 섣부른 겨울비기 내리면 토양은 그냥 흘러 내린다. 풀과 덤불과 관목들의 뿌리가 없다면 토양의 붕괴는 더욱 심각하다.

 

굶주림은 모든 생명들에게 지독한 고통이다. 겨울은 굶주림의 고통이 가장 극심한 계절이다. 가을에 남아 있을 법한 열매들도 눈속에 묻혀 흔적도 없다. 나무의 연한 순이라도 먹을 수 있으련만 역시 눈속에 갇혀 있다. 나무의 눈은 다음에 성장을 위한 소중한 기관이다. 새로운 뿌리는 그때그때 만들어지지만 새로운 잎은 반드시 눈을 통해 만들어진다. 눈을 만드는 작업은, 한해 살림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일정이다.

 

적막한 겨울 숲에 살아있는 소리는 오직 새소리 뿐이다. 가끔 무서운 바람소리가 들려 오지만, 그것은 생명을 위협하는 소리다. 겨울숲에 들어서면 그 고요함에 질리지 말아야 한다.  겨울을 이겨낼 수 없다면 떠나야 한다. 몸이 자유로운 동물들은 때로 이탈을 시도한다.   하얗게 쌓인 눈, 아름답게 피어난 눈 꽃 그리고 겨울의 적막은 겨울 숲의 가장 큰 매력이다. 푹푹 빠지는 걸음으로 눈 숲을 헤쳐 나가면, 등줄기에 땀이 나고 다리는 흔들거린다. 아무 거침이 없는 숲, 바위도 덤불도 모두 눈이 덮혀 하얗다. 때로 가지에 쌓인 눈은 밤의 냉기에 얼어 투명한 얼음 꽃을 만들기도 한다. 유리알 처럼 빛나는 얼음꽃은 햇빛에 녹아 눈물을 흘린다.

 

큰 나무의 겨울은 위대하다. 무거운 눈이 쌓여도, 눈보라가 몰아쳐도, 나무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숲은 나무가 있어 더욱 아름답다. 흰눈이 덮혀 휑한 겨울 숲에 우뚝선 나무야 말로 땅의 역사다. 나무의 한해는 위대했다. 무수한 이파리의 돋아남과 눈부신 성장, 비를 가리고, 빛을 다듬고 이른 봄 나무의 새순은 허기에 지친 겨울 동물들의 기나긴 허기를 보상해 주는 양식이다. 순이 피어나면서 움직이는 곤충의 애벌레들도 나무의 품에서 비상을 꿈 꿀수 있다. 새들은 젖은 날개를 말리고 비행의 고단함을 달래며 나뭇가지에서 휴식한다. 어딘지도 알수 없는 줄기의 어느 구멍에서는 다람쥐가 깨어나고, 허름한 줄기 속에서는 사슴벌레가 깨어난다. 나무가 드리운 그늘에서 비바람을 피한 야생화들은 붉고, 노랗게 한바탕  화려한 삶을 펼친다. 나무의 부지런한 생장은 숲의 여름을 무성하게 한다. 뿌리에서 잎으로 연결된 미세한 수로들은 끊임없는 물을 품어 올려 대기를 식히고 구름을 만들고 멀리 떠나 보낸다. 지구를 돌아 고향을 찾은 물방울들은 또 다른 일생을 맞이하기위해 나무 위로 장쾌하게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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