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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생활사 (차윤정)

여름 숲

 여름은 숲에게 필요한 것들이 풍성한 계절이다. 도시를 뜨겁게 달구는 태양빛은 식물이 갈구하는 동력자원이며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물은 물품을 조달하는 통로를 마련해 준다. 풍부한 빛과 물과 온도와 낮의 길이, 식물에게 최상의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여름 한철이다.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여름 숲은 축축하다. 밤이 되어 온도가 낮아지면 대기중의 포화 수증기량이 낮아지고, 갈 곳이 없어진 물 분자들은 나뭇잎에 풀섶에 가지에 줄기에 매달린다. 밤새 모아진 물 분자들이 방울이 되고 빗물이 되어 아침 숲에 뚝뚝 떨어진다. 숲이 깊고 울창할수록 물의 이동은 큰 힘을 받는다. 신갈나무 한그루는 낮 동안 시간당  30미터 속도로 물을 지상으로 펌프질 한다.  이렇게 한그루의 신갈나무는 한낮 동안 400리터의 물을 끌어올린다.

 

흙에서 뿌리로 즐기로 잎으로 그리고 공기중으로 올려진 물기들이 하늘에서 뭉쳐서 다시 흙으로 쏟아지는 이 장쾌한 순환은 거대한 숲이 있는 곳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숲에서 이 순환은 결코 서로를 상처내는 일이 없다. 물을 대기중으로 품어 올리는데 기여한 나무들이 이제 물의 공격으로부터 지상을 보호한다. 숲의 울창한 덮게는 쏟아지는 물을 거르며 숲 바닥의 낙엽은 떨어지는 물의 강도를 약화시킨다. 그러면서 또한 울창한 수관과 낙엽은 물을 품는다.

 

무릇 과한 것은 부족한 것만 못하다. 과한 물은 말썽을 일으킨다. 공기의 통로를 막고 조직을 물러지게 한다. 이런 물의 과함을 여름의 뜨거운 빛이 견제한다. 풍부한 빛은 물기의 횡포를 견제하는 강력한 힘이다. 숲의 덮개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공중을 떠도는 물은 빛의 제일의 목표다. 마찬가지로 빛이 물을 만나지 않으면 그것도 독이 된다.  물이 없는 열기는 숲을 태워 버린다. 숲이 가진 물기가 빛의 열정을 저지하지 못하면 숲은 금방 타 들어 갈 것이다. 물은 빛을 식히고 빛은 물을 말린다. 숲이 없어지면 이 순환의 고리는 끊어지게 되어 어느 한쪽의 힘이 우세하게 된다. 물과 숲과 빛, 이 얼마나 멋진 조화인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는 이 관계로 인해 지구는 푸른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다.

 

여름 폭풍우는 거세다. 나뭇잎은 사납게 흔들어대는 바람에 안간힘을 다해 버티다가 찢겨져 나가고 줄기는 부러진다. 굵은 빗줄기조차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공중에서 흩어진다. 저항이 심하면 상처도 심하다. 무수한 수관이 비바람에 저항하느라 안간힘을 쓰면 숲은 금새 우우 소리를 내며 울어댄다. 수관을 통과한 물줄기는 살벌한 기세로 줄기를 타고 흐르고  땅에 깊게 주름을 낸다. 숲바닥은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고, 강한 결속력을 자랑하던 나무 뿌리들도 들떠 공중으로 분해된다. 바람의 기세는 너무도 사나워 도무지 진정될 것 같지도 않다.  숲이 깊고 무성 할수록 바람의 심술도 더욱 거세어 어느 하나를 무너뜨리고 나서야 폭풍우는 직성이 풀린다.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안정한 상태에서 오랫동안 머물고자 하는 속성을 지닌다.  그러나 안정된 상태란 변화가 없는 밋밋한 상태가 아니라 작용과 반작용이 끊임없이 세력다툼을 하며 평행에 다다르고자 하는 상태이다. 동시에 자극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조각들은 숲을 건강하고 활기차게 만든다. 소낙비는 여름이라야 그 시원한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물기만으로는 싱그럽지 못하다. 깊고 푸른 숲의 출렁임이 있어야 시원하다. 숲 위로 쏟아지는 비를 공중에서 내려다 보라. 스펀지가 물을 빨아 들이듯  숲은 스스로 내뱉은 물을 일순간에 삼켜버린다. 인간에게 숲에서 맞이하는 장대비는 공포다. 숲을 통과하는 물줄기는 엄청난 속도로 체온을 앗아간다. 여름 더위에 지친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날 때까지는 장쾌함을 느낄 수 있어 좋다. 그러나 피할 곳 없는 숲은 절망스럽고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물은 바닥에서 차오르고 습도가 높아져 숨쉬기도 힘겹고 발끝과 손끝에서 저려오는 감각은 이내 몸은 한기가 든다. 숲 속에서 사람이란 얼마나 절망적이고 취약한 생물종인가를 알게 한다. 숲의 생명들에게 비록 쉽지는 않지만 늘 있어왔던 일상이건만 사람은 자연 앞에서 나약한 존재가 된다.

 

무엇보다 물의 흐름은 씨앗들의 흐름을 이끈다. 바위에 부러진 가지에, 떨어진 낙엽에 걸려 제대로 여행하지 못한 영혼들을 물이 구제해 준다. 원래 물을 따라 흐르던 영혼이 물에 갇혀 있다가 다시 물에 의해 구제된다. 포악한 폭우라도 일단 숲으로 들어오면 힘을 잃고 무력해진다. 비는 겨우 절반만이 숲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울창한 수관은 많은 양의 비를 공중으로 돌려 보낸다. 숲으로 떨어진 물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숲의 낙엽에 갇히거나 낮은 곳으로 흘러가버리거나 숲이 깊고 울창할수록 그냥 흘러가버리는 물의 양은 줄어든다. 숲은 거대한 댐과 같아서 물을 저장한다. 숲풀이, 뿌리가, 낙엽이 쓰러진 나무가, 이끼가, 심지어 동물의 시체도 물을 그대로 빨아들인다. 숲에 갇힌 물은 숲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다.

 

땅속으로 스며든 물은 흙과 섞이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지상에서 가져온 온갖 먼지와 더러움이 씻기고 맑고 깨끗한 물이 된다. 깨끗해진 물은 흙 속에 포화된 풍부한 미네랄을 녹여낸다. 물은 그 자체만으로는 생명을 품을 수 없다. 물이 진정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흙을 만나야 한다. 물이 생명을 태동시킨 것은 분명하지만 물만으로 한계가 있다. 물은 물질이 서로 붙는 것을 어렵게 하고, 물 스스로 분자 간의 강력한 인력과 부착력으로 서로를 얽어매고, 외부의 노출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둥글게 둥글게 모여든다.

 

물이 흙을 만나면 서로간에 자유로울 수 있다. 흙 알갱이에 의해 분리된 물은 부분적으로 공기를 마시며 생명을 부양 할 수 있게 된다. 숲을 통과한 물은 숲의 바닥으로 스며들고 곧 흙 알갱이들 사이의 공간으로 스며든다. 흙만으로는 생명을 품을 수 없다. 물이 빠진 흙은 시멘트나 아스팔트와 다름 없으며 뿌리에 엄청난 물리적 압박을 가할 것이다. 애초에 흙이란 돌이 물에 녹아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흙에 물이 빠지면 돌이 된다. 흙이 물을 만나지 못하면 식물에게 양분을 전달 할 수 없다. 흙속의 양분들은 물속에 녹아야만 식물들에게 전달된다.

 

햇살이 미처 지난 밤의 물기를 털어내지 못하고 바람도 불지 않는 새벽은 모든 것이 머물러 있는 시간이다. 늘어난 거미줄에는 간밤의 물기들이 방울방울 붙잡혀 있다. 이른 아침 공기가 깨어나면서 제일 먼저 뿌리도 깨어난다. 섬세한 뿌리털은 흙 입자 사이를 더듬으며  물을 끌어당긴다. 물은 서로를 의지해 물기둥을 만들고 위로 밀려 올라간다.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잎은 물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압력에 밀려 입 밖으로 나온 물기는 잎 끝에서 영롱한 물방울을 만든다. 몸 속을 지나온 물기는 공기중에서 만들어진 아침이슬보다 맑고 깨끗하다.

 

   잎맥은 입 전체로 물을 실어주는 수송관이 되기도 하지만 물을 배출하는 수로 역할을 한다. 끊임없이 배어나오는 물을 제대로 흘려보내지 않으면 물은 잎에서 정체되고 대기중으로 흐름은 끊기고 만다. 잎맥을 따라 약하게 경사진 잎의 표면으로 배어 나온 물기는 서로 뭉쳐지며 흘러내린다. 물을 효과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잎 표면에는 미세한 털이 돋아있다. 털은 수증기를 굴러 물방울을 만들어 낸다. 식물에게 털은 보온장치가 아니라 물을 잡는 촉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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