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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煩惱를 끊는 이야기(간화선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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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상을 덜어내는 동물관 요즘 사람들은 믿는 불교가 아닌 아는 불교를 하려고 한다. 아는 데 갇혀서 불교가 어려워진다. 문명을 말하다 보니 사람의 두뇌가 이성화된 나머지 삶 속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이성적으로만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사람이며 사람인 동시에 동물적 근성도 같이 가지고 있다. 불교의 가르침 중에 아상, 인상, 중생상을 말한다. 그러나 그 개체 속에는 부처가 있습니다. 동물 또한 그 생명 속에는 불성이 있다. 다만 동물이다, 사람이다 하는 상이 서로 간에 그 불성의 성질을 가로막고 있는 것 뿐이다. 우리가 배운 지식으로 사람이라는 상에 너무 집착하면 곧 그것이 펄펄 살아있는 생명체를 장애한다. 우리는 흔히 인간을 동물보다 높은 수준에 있다고 생각한다. 삶이라는 것은 동물적인 것이 인간으로 되어가는 과정이 아..
말을 가지고 노는 사람들 깨달은 사람 입장에서 보면 진리 자체는 텅 빈 가을 하늘과 같다. 깨달은 이는 상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지는 않는다. 가을 하늘 그려보나 그 또한 자기가 만든 꿈 속의 상이다. 불교는 이상이 아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에 ‘나’가 있고 나 있는 곳에 부처가 있다. 일어난 일 뒤에 자각하는 바 없이 노력을 하면 전도몽상이 되는 것이고, 먼저 자각이 온 뒤에 알면 일 없는 것이 된다. 마치 그림자를 실로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다툴 대상이 없으니 일 없는 이가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싫어하는 그림자가 있고, 내가 미워하는 것이 있으면 좋아하는 그림자도 있다. 좋으면 좋은 것이고 싫으면 싫은 것이지, 그것에 마음이 집착할 것은 아니다.) 如如란 망상이 없는게 아..
암자에 혼자 앉아(2) 깨달음은 산모퉁이를 지나자 넓은 벌판이 한번에 보이듯이 그렇게 온다. 망상을 바탕으로 이해하여 말이 귀중하다고 지키고 있으면 그것은 선의 재앙이다. 발걸음을 멈춰본다. 성인이 내 옆에 있고 진리가 바로 나와 같이 있다. 이제 살만하다. 본시 있는 마음에 의존하면 눈은 밖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안을 보는 것 같기도 할 것이다. 일체의 것을 되는 대로 놔둔다. 인간은 어찌보면 나약한 존재이다. 항상 배우는 삶만 있다. 화두를 들고 궁구하면 언어 이전의 뜻을 알 때가 온다. 깨치면 곧 바로 성인의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 그때부터 실천하는 행이 생활중에 자연스럽게 나온다. ( 언제나 화두를 가지고 있으면 세상 이치는 저절로 알게 된다. 내가 절실한 화두를 가지고 있으면 몸이 저절로 깨닫는다.) 자기에 대한 ..
암자에 혼자 앉아(1) 사실 화두공부는 흉내만 내도 좋은 것이다. 잘 할 필요도 없고 그냥 옆에 가기만 가도 좋으니 말이다. 화두는 모든 번거로움을 일시에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일반 사람이 말하는 도는 모른다. 그러나 도를 깨달은 이가 말하는 도는 그냥 알아본다. 조금이라도 경험을 하면 아는 생각이 일어난다. 여기에서 머물면 아만我慢이 생긴다. 자기 경험만을 지키고 사는 문지기가 된다. (나는 깨닫지 못하고 아는 대로 맞춰가니 어렵고 마음이 시끄럽다) 법문은 듣는게 중요하다. 듣다가 순간적으로 자기와 계합(부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각이 오고 나는 변한다. 나는 하나이다. 일어난 번뇌도 번뇌, 없에려는 생각도 번뇌다. 하나인 나에게서 두 생각이 나니 충돌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번뇌를 없애려 하지 말고 번뇌와 같이 ..
사유의 아침에 내가 나를 안 가리면 (2) 아는 것과 마음을 구분해야 한다. 아는 것은 식識이지 마음이 아니다. 마음은 형상이 없는 것이어서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있다. (마음은 무의식이고 습관이다. 식은 의식이고 무의식은 공이다) 시비 같은 것은 없다. 사람들은 시비하고 있는 동안 내가 아는 것이 내 마음인 줄 착각한다. 그게 망상이다. 마음은 아는 바가 없다. 그러면서 할 것은 다 한다. 이것이 능력이다. 이 몸이 나라고 아는 것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내 몸이 봐진다. 마음이 없으면 이 몸은 나와는 상관 없는 것이다. 내가 사는 고향 산 아래 동네 내가 사는 빈 초가집에 햇빛만 가득하다. 이 불완전한 몸을 가지고 완전을 기약하니 어려울 수 밖에. 아예 불완전한 것이 삶이라고 인정하다면 더 겸허해질 것이다. 사실을 ..
사유의 아침에 내가 나를 안 가리면 (1) 가린 것이 벗겨지면 다툼이 일시에 그쳐 모든 것이 꿈속의 일로 보인다. 흙 속에는 나무로 보이는 형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흙만 있다. 흙에 뿌리를 둔 나무는 푸른 잎도 나오고 꽃도 피워낸다. 아무것도 없는데 감나무는 감이 나고, 배나무는 배가 열린다. 포도나무는 포도가 열리고, 그 열매는 우리 눈에 보여준다. 아상은 머리에서 온 것이 아닌 마음에서 온 것이다. 그 뿌리를 보면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없는데 할 것은 다하고 있다. 상이 없으므로 세존은 이것을 금강경에 일체 제상 비상 비비상一切 諸相 非相 非非相이라는 말을 남겨둔다. 육식六識의 뿌리가 눈에 안 보이면 빈 성품에 닿아있다는 것을 잊고 산다. 부처님은 제일 먼저 개개인을 다 인정해 주고 법을 설하고 계신 분이다. 못난 사람 잘난 사람, 가난한..
나를 밝게 하는 공부(2) 노자가 말한다. ‘만물은 상대를 의지해서 성장한다. 그러나 道는 거기에 아무 관심이 없다’ (도는 무엇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 의지하고 있지만 관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관계하지 않는다는 말은 비어있다는 다른 말이다. 그러나 모든 생명의 원리는 상대적인 두 개가 서로 의지해서 생긴다. 그러면서 서로 집착한다. 사회도 학교도 이런 상대적인 두 개를 가르친다. 우리가 배운 것은 철학자나 성현들의 말에서 온 것들이다. 우리 근본 성품이 빈 것이라는 것을 배우자는 것이지, 좋은 말을 지켜 가지고 있는 자체가 아니라는 것 이다. 지키는 것을 놔버리게 한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종교에 붙어 세월만 보낸다. ‘... 아침에 살아 있다가 저녁에 죽고마니 찰나 사이에 다른 세상이 되어버렸네. ‘ 물위에 비치는 그림..
나를 밝게 하는 공부(1) 불교를 잘못 시작하면 글만을 배우다가 세월만 다 보내버린다. 글을 알아야 불교를 아는 것 같다. 그러나 글을 알아도 세월만 보낼 뿐 불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부처님은 내마음을 떠난 부처는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나 자신을 못 믿어서 부처를 믿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 말을 믿다보면 어느새 시간이 다가고 늙음이 와 있다. 글이나 말을 배우는 것 이걸 그치기가 그렇게 어렵다. 불교를 배우지 말라. 자기를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사람을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마음을 아는 이가 스승이다. 글이나 말을 많이 아는 이가 스승이 아니다. 대개 사람은 자기가 어두우면 남의 밝음까지도 어둠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성향이 있다. 마음이 없으면 이 몸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좌선을 하려고 앉아 있는 동안 선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