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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煩惱를 끊는 이야기(간화선의 길

사유의 아침에 내가 나를 안 가리면 (1)

가린 것이 벗겨지면 다툼이 일시에 그쳐 모든 것이 꿈속의 일로 보인다.  흙 속에는 나무로 보이는 형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흙만 있다. 흙에 뿌리를 둔 나무는 푸른 잎도 나오고 꽃도 피워낸다. 아무것도 없는데 감나무는 감이 나고, 배나무는 배가 열린다.  포도나무는 포도가 열리고, 그 열매는 우리 눈에 보여준다.  아상은 머리에서 것이 아닌 마음에서 온 것이다. 그 뿌리를 보면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없는데 할 것은 다하고 있다. 상이 없으므로 세존은 이것을 금강경에 일체 제상 비상 비비상一切 諸相 非相 非非相이라는 말을

남겨둔다. 육식六識의 뿌리가 눈에 안 보이면 빈 성품에 닿아있다는 것을 잊고 산다. 부처님은 제일 먼저 개개인을 다 인정해 주고 법을 설하고 계신 분이다. 못난 사람 잘난 사람, 가난한 사람, 부자, 창녀, 백정, 노인, 젊은 사람,..  남녀귀천이 모두 佛의 성품이 안 떠나 있다고 인정해 주고 나오신 분이다. 그것이 세존이 깨닫고 난 후 우리를 보는 눈이다. 그분은 사람만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말한다.  ‘일체 중생을 둘러보니 불성을 가지고 있다’가 그것이다. 이것을 믿지 않는 불교 신앙은 사람을 더 어리석게 만든다.

 

이 믿음 없는 신앙은 미신이 되든지 기복이 되어 나온다. 종교속에 있는 경전은 그들이 깨달음에서 온 경험을 말해 놓고 간 것이다.  사실 그 말들은 살아있는 나안에 있는 길을 말해 놓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들의 말이 우선 멀고 낯설다. 내 마음에 바로 와 닿지를 않는다. 소위 말하는 성직자들이 그들의 말을 전해주고 있지만,  그들 또한 요즈음 사람으로 사람을 떠난 믿음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종교가 미신이든지 실체가 없는 그림자로만 남아 사람과 멀어져만 간다. 성인의 진리가 그만큼 덮어놓고 멀리 들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의 말은 사람 속에 있는 진리를 보고 나온 말들이다. 석가모니나 다른 성인이나 그 누구도 이 땅에 서 있는 하나의 나무이다. 그리고 나무는 뿌리를 땅에다 두고 있다. 길러주는 성품, 곧 그것이 우리들 성품이다. 붓다는 이것을 불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뿌리가 만나는 땅에는 나무가 없다.  그러나 나무는 푸른 잎을 달고 싱그럽다.  사람 또한 사람속에서 불佛을 만나면 그렇다. 길러주되 보이지 않는 것?  참선 공부가 그것이다. 부처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인정해 주듯이 나도 나를 먼저 인정해 주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부처는 그런 분이다. 중생을 인정해 주는 분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인정해주는 문화는 혼란이 적고 저절로 질서가 따른다.  평화로운 세상도 이런 곳에서 시작된다. 나를 덮고 있는 장애가 보인다. 장애가 나에게 보이면(수용하면) 그 장애는 놓아진다. (그것은 그냥 내가 안고 살아야 할 나의 일부일 뿐이다. 그것을 아쉬워하고 한탄하면 그것은 장애가 되어 괴로움이 되고, 수용하면 사라진다) 예수가 남긴 복음은 말하고 있다. 신은 네 안에 있다. 그 신이 곧 전지전능한 것이다. 다만 네가 아는 것이 아니므로 네가 모르게 온다. 내가 그를 만나면 나는 사랑으로 변해져 나와 버린다. 신은 곧 신성이고 불성을 말한다.

 

예수가 말하는 가난은 빈 마음, 곧 공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땅을 다시 봐야 한다. 내 허물이 보인다. 그래야 시작할 수 있다. 남들은 부처를 섬기라고 하지만 난 거꾸로 생각한다. 나를 떠나 바깥 부처를 섬기다 보면 삿되든지, 사교주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중생을 섬기면 부처를 섬기는 것 이되 불법이 이 세상에 다시 살아난다.  석가 세존은 말한다.  중생 안에 부처가 있기 때문이다.  중생 안에 있는 부처가 살아나야 부처가 되살아난다. 참회가 없는 사람은 남과 같이 있어도 항상 홀로이다. 외형은 아름다우나 내면은 험하고 고단하다. 마침내 성격의 독으로 주변 사람들이 그를 멀리 떠난다.  홀로 감당하다가 의식의 충돌을 자주 일으키고, 자신을 극한 외로움에 둔다.

 

결혼은 아무리 잘 맞아도 문제가 생긴다. 살아있는 사람은! 왜냐하면 사람은 살아있는 생물이기 때문 이다. 이란 것은 항상 변동이다. 고정된 바가 없다. 그런 줄 알아야 한다. 짝은 둘로 되어 있지만 각자 속에서 짝없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 짝이 살아난다. (내속의 이질감을 나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면 서로 노력한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둘은 서로의 삶을 탄생시켜 주는 파트너가 된다. 가난도, 모르는 것도, 가문도, 서로 배움의 터가 된다. 안 그러면 바라는 만큼 고통은 크고, 쉽지 않다. '결혼은 살아가는 수행도량이다'라고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럼 그 결혼이 거룩해 질 것이다. 그게 사실이다. 결혼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가 모두 그렇다. ( 내 속에 부처, 예수를 안고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항상 내 삶을 감사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행해야 하는 그런 삶을 살고자 해야 한다.  그것은 궁극적인 목표가 될지는 모르지만 중생이 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배우자를 부처라 생각하고 사는 것도 수행이다.) 일단 만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자신을 구박으로 몰아넣는다면 안 좋다. 그러면 일만 더 안풀린다.  그 구박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를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구박하지 말고 그냥 나를 놔둔다. 길이 보인다.

 

生이 死가는 쪽으로 따라가는 것이 苦다. 그렇지만 생도 아니고 사도 아닌 곳에 이르면 이 둘로부터 자유다. 이때 生도 바르게 대하고 死도 바르게 대하는 눈을 갖는다. 내가 살고 잇는 곳에 부처가 있다는 것을 알면, 밖으로 찾는 마음이 쉬어져 살 만하다.  내가 나에게 관심을 두는 것이 수행의 첫걸음이다. 발걸음 하나 바로 놓으면 생활이 저절로 변한다. 공부가 생활을 떠나지 않음을 안다. 마음의 눈이 변하나 사람을 대하는 것도 달라져 나온다. 만든 마음은 곧 변해 버린다. 사람들은 자기를 놓고 찾아다닌다. 그러나 길은 어디를 가나 두 길이 없다. ( 외부에서, 타자에게서 나를 찾는다) 

 

마음은 하나이나 그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많다. 교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나온 이론이다. 그러므로 일어나면 많고 일지 않으면 하나 마저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없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있되 눈에 안보이니 없는 것 같다. 그것이 우리들 마음이다. 세상엔 별의별 사람이 살려 애쓰고 나와 살고 있다. 사람마다 그 안에 부처가 있지만 그 덮어진 종류가 많아 석가세존이 말이 많았다. 육신에 병을 달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생각이 바뚤어져 있는 것을 본다.  사람은 마음과 육체가 있다. 그리고 생각은 살아가는데 하고자 하는 말과 뜻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생각이 마음에 닿으면 그 생각은 건강하고 튼튼해진다.  그러나 생각이 마음을 잃고 살면 몸이 병이 나타난다. 우리는 몸과 마음에 병이 들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종교를 갖는 것은 이런 것에 있다.  어디에나 스승이 있지만, 내가 눈이 어두워 알아보지 못한다. 性에서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좋아하는 것이 마음에 닿으면 사랑이 된다. 좋아하는 것이 마음을 등지면 성은 그냥 성욕性慾일 뿐이다.  성이 사랑으로 쓰일 때 신성하다. 대개의 사람들은 성욕을 사랑으로 오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