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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煩惱를 끊는 이야기(간화선의 길

말을 가지고 노는 사람들

 

깨달은 사람 입장에서 보면 진리 자체는 텅 빈 가을 하늘과 같다. 깨달은 이는 상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지는 않는다. 가을 하늘 그려보나 그 또한 자기가 만든 꿈 속의 상이다.  불교는 이상이 아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에 ‘나’가 있고 나 있는 곳에 부처가 있다.  일어난 일 뒤에 자각하는 바 없이 노력을 하면 전도몽상이 되는 것이고, 먼저 자각이 온 뒤에 알면 일 없는 것이 된다. 마치 그림자를 실로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다툴 대상이 없으니 일 없는 이가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싫어하는 그림자가 있고, 내가 미워하는 것이 있으면 좋아하는 그림자도 있다. 좋으면 좋은 것이고 싫으면 싫은 것이지, 그것에 마음이 집착할 것은 아니다.) 如如란 망상이 없는게 아니라 망상이 있고 없음에 관계치 않음이다.

 

공부는 이것저것 따질 것 하나 없고 중생심을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중생심이 무상한 것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가 깨달아 경험한 뒤에 말씀해 놓은 일체중생이 개유불성 一切衆生 皆有 佛性이라는 말씀을 믿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없애려고만 한다. 참선을 통해 부처를 통해....  말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렇게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중생심衆生心이란 것을 망각하고 있다. 잘하려는 마음, 깨달으려는 마음, 고를 없애는 마음, 공부가 잘 안되고 있다는 마음, 망상을 제거하려는 마음, 번뇌, 망상, 성냄, 잡생각 등등 무엇이든지 다 중생심이다. 이것들은 중생심에 속하는 것이라고 확실히 알아야 한다. 작용하고 있는 마음을 믿음 아래서 만난다. 스스로 안다. 이 앎은 중생의 마음으로 아는 것하고는 다르다. 알고 모름이 끊어진 상태에서 온다. 경험의 일이다. 뜻을 취하면 글을 벗어나 간단해지지만, 뜻을 얻지 못하면 글 따라 성인의 마음을 접하니 어려워져 버린다. 성인이나 조사의 말은 궁구를 요한다. 그게 화두법인 것이다. 한 생각 일기전에 또 부모 미생전에 '나는 누구인가? '가 그것이다.

 

우리 삶은 순간순간 일정하게 변하고 있다.  이 변하는 가운데 도가 있고 선이 있고 불교가 있는 것이다. 은 이 변하고 있는 가운데 있돼, 찰나를 두지 않는 공부다. ,그러므로 이를 이렇다고 아해하는 자가 있다면 그 또한 망상이다. 삶이 순간에 머물지 않고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 지나가 버리는 성질을 어찌 선에 묶어 놓고 도에 묶어 놓는다는 말인가? 오매일여寤寐一如!  매寐하는 줄 알면 오窹하고, 오하다고 아는 즉시 매해진다. 는 글에 있지 않고, 그 뜻에 있다.  뜻을 알아버리면 언어는 단순한 표현이다.  언어에 이러쿵 저러쿵하는 것은 와는 멀다. 내게 있으면서도 눈에 안보이는 내 마음이 부처이고 하나님이다. 이치와 도는 어떻게 다른가? 이치는 도를 설명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는 이치를 드러내 놓고는 숨어 버린다. 

 

현재에 있는 사람은 과거, 미래를 떠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현재에도 마음이 없는 사람은 과거, 현재, 미래에 마음을 써도 구애 받을 일이 아무 데도 없다. 불교를 알아 그 아는 것이 몸에 배면 그것이 자기 것이 된 듯하다. 수행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빈 허공이란 개념에 마음이 묶이지 않기를 노력해야 한다. 입을 열면 이미 빈 마음이 아니다. 수행은 자기 마음을 모르면 할 수 없다. 윤회는 스스로 돌아가는 것인줄 알고 놓아두면 된다.  돌아가고 있는 것인줄을 모르고 착각으로 인하여 돌아가고 있는 것이 고정되어 있다고 붙들고 있는 것이 문제다. 마땅히 이렇게 윤회를 대할줄 알면 쉬어지고 편안해진다. 그렇지 못하면 공연히 마음만 오락가락 한다.  쉬고 편안한 마음까지도 그치는 자는 마침내 윤회의 발자취를 따라가지 않는다. 이 세상이 저절로 한가해져 버린다.  세상에 대하여 불평할 일도 없어져 버린다. 과거가 어떻고 미래가 어떻고 삼세를 눈앞에 두지를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