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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煩惱를 끊는 이야기(간화선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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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들이 쓰는 말 생각이 마음을 먼저 하고 생각을 뒤로 쓰면 그 생각은 힘이 있지만, 생각을 마음이라고 믿고 쓰면 그 생각이 되려 혼란을 일으켜 내 마음이 전도몽상에 묻히게 된다. 깨닫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그 시대의 언어를 둘러쓰고 나온다. 그러나 그 언어속에는 반드시 살아있는 하나의 뜻이 있다. 듣는 자가 자기 마음을 가리고 들으면 부처가 설하는 그 불설은 불설이 아닌 중생의 것이 되고 만다. 옛날에는 자동차가 없었다. 나귀에 짐을 싣고 장을 오간다. 큰 짐을 나를 때는 말을 이용하고, 작은 짐은 나귀가 맡아한다. ‘나귀의 일이 가기 전에 말 일이 온다’ 나귀라는 것은 머리에서 일어난 생각이나 헤아리는 마음, 내일 할 일을 오늘로 가져와 미리 걱정하는 마음,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고 돈을 주고 받는 일속에서 일어난 ..
몸은 道가 숨 쉬고 있는 집 우리 몸에는 다섯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오관이 생기기 전에 그 성질이 빈, 눈에 안보이는 道가 있다. 그리고 도 뒤에는 음양陰陽이 자리하고, 그 음양이 인 뒤에 오장이 자리잡고 이 오장五臟은 오덕五德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곧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그것이다. 위장이 약한 사람은 감정이 환경에 따라 자주 변하고, 먹는 음식이 잘 체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中을 얻어 道에 닿으면 감정은 안정을얻고 소화기 또한 건강하게 작용한다. 다른 장부에 있는 오덕인 인의예 지신 또한 도에 닿아 쓰이면 中을 얻으나, 그 쓰는 것이 절도를 벗어나 중을 잃고 떠돌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불안정해져 나온다. 불교에서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할 때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가끔 세상에 보이는 용기가 지나쳐 주체하지 못..
성북동 길상사에서 법정스님이 가시고 난 뒤 '저도 저의 갈 길이 멀지 않다'는 시간 앞에 서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들의 죽음은 서서히 오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옵니다. 숨 한번 들이쉬었다 못 내쉬면 이 몸은 내가 아닙니다. 아직 오지도 않는 미래를 가져와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다. 타성에 젖어 각성없는 출가생활은 또 다른 세속 생활과 별 다르지 않다. 나를 놔두고 하려고만 했던 선원 생활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돌아보는 시간이 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경계가 무너지니 모든 성인속에서 하나의 길을 만난 것이다. 사람 사는 일만 복잡하다. 종교를 놔버리는 곳에서 종교를 바로 알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 속에는 성인의 뜻은 놔두고 종교인들이 만든 헛된 틀이 많다. 남이 다하는 관습의 틀을 털어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
앉아있는 간화선의 오해 (2) 숨을 쉬고 있는 나를 보고 돌아봐, 내가 천명에 닿아있다고 알면, 불성이라는 언어가 나에게 낯설지 않고 가깝다. 佛性은 自性이고 天命인 것이다. 우리 몸은 진리가 존재하고 있는 집이다. 이를 부처가 계신 법당이라고 한다. 예수가 성경에 ‘god is within you'라고 한 것도 그것이다. 모든 중생에게도 잇다. 부처에게도 있다. 그 존재의 성질이 비어있다. 빈 것은 나의 것, 너의 것이 없다. 상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선악도 옳고 그름도 흑백도 아니다. 그러니 中道라 할 수도 있고, 비어있다 할 수도 있고, 형상이 있다 할수도 없다 할수도 있다. 그래서 空이다.) 우리 삶속에서 나와 남이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 또한 누구나 있는 서로 통해 있는 하나인 性에 닿고 싶은 마음이다. 하나님, 부처님, ..
앉아있는 간화선의 오해 (1) 부처님은 명령하는 분이 아니다. 스스로 행하는 분이고, 행하니까 사람이 저절로 따랐다. 부처님은 항상 자기가 먼저 행하고 대중에게 전한다. 요즘 불교는 아는 이는 많고, 믿는 이는 드물다. 부처님 법복을 입은승 僧은 많으나 그들의 마음에 불법은 없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서로 지켜야 나와 남과 중생과 부처를 통해 있는 것이 살아난다.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이 목적이지 알고도 지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중생심을 그치면 자기안에 있는 부처의 눈을 뜨고 나온다. 간화선의 간看은 글 생김새로 봐서 손 아래 눈이 있는 꼴을 하고 나온 글자이다. 밝은 태양 아래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려고 하는데 그 햇빛이 장애가 된다. 손을 눈위에 얹고 빛을 가리면 그 사람의 얼굴이 더 또렷하다. 마음은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
선禪과 양생養生, 그 시작 되는 곳은 하나 화엄경에는 한 중생이 성불에 이르기까지 53명의 스승을 만나 깨달음을 얻는다. 이 스승중에는 선사, 백정, 신선, 창녀, 기생 등 여러종류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런 많은 스승을 거쳐 마지막에 미륵을 만난다. 그는 법문을 일시에 놔 버리고 깨달음에 든다. 대승의 공부는 스승이 곳곳에 널려 있다는 얘기다. 이런 것을 만나면 이런 것을 익히고, 저런 것을 만나면 저런 것을 익히고 갖가지 사람 속에서 높고 낮은 스승을 만났다. (그러나 분별심에 가려 있으니 스승인줄 모른다. 마음이 닫혀 있으니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산과 악, 미와 추 이익과 손해, 그런 것이 먼저 눈에 들어오니 마음을 열수가 없다. ) 땅에 의해 넘어진 자는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도를 통한 지인은 항상 심기를 하반신에 충실하게 모은다...
동서양 고전 속에서 본 부처의 성품 (2) 내 성격에 맞춰서 내 마음 들면 믿고 내 마음에 안들면 안 믿는다. 성안들은 사람에게 있는 진리를 먼저 보고 간 사람들이다. 經은 그들 경험을 말해 놓고 갔구나하고 이제 알게 된다. 종교가 품고 있는 그들의 말뜻을 다시 알아가게 된다. 지금까지 보고 듣고 익힌 성인들의 말이 하나하나가 새로워져 간다. 모든 것을 다시 배워 간다. 공부를 하고 싶어서 좋아서 하니 쉽고 즐겁다. 이제는 성경, 사서삼경, 불경도 선의 눈으로 다시 봐진다. 내게 있는 것을 알고 믿으니 그들이 보는 생명을 가진 것들이 다 진리가 안 떠나 있다. 예수와 석가모니는 나와 먼 사람이 아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그들의 말이 나를 두고 한 것임이 확실해진다. 석가모니가 말하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하늘과 땅 사이에 내가 있다는 말..
동서양 고전 속에서 본 부처의 성품 (1) 성인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그 말애 수긍하여 그를 가까이 하게 된다. 이렇게 믿음이 일어나 그들이 만든 종교에 발을 딛는다. 고전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지금 다시 들어도 우리에게 안온함을 준다. 사람 마음 바탕에 우리는 누구나 이런 덕성과 지혜가 있지만, 현대 문명 속에 묻혀 사느라 우리는 들어도 가물가물하다. 대부분의 종교는 성인들의 그림자만 지키고, 지키고 있는 것은 현금의 종교다. 성직자가 그 종교의 성인의 얼굴을 대신하고 있지만, 요즘음 그들을 통해 성인의 그것을 만나는 것은 거의 꺼져가는 등불이다. 파우스트의 마왕은 인간의 마음이 진리의 본성을 떠나면 옳은 것을 가장하기도 하고, 좋은 짓을 하면서도 악을 짓는다. 마魔는 한 인간안에서 가자가지 세상 사람이 바라보는 욕망의 형태를 가장하고, 작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