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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煩惱를 끊는 이야기(간화선의 길

암자에 혼자 앉아(1)

사실 화두공부는 흉내만 내도 좋은 것이다.  잘 할 필요도 없고 그냥 옆에 가기만 가도 좋으니 말이다. 화두는 모든 번거로움을 일시에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일반 사람이 말하는 도는 모른다. 그러나 도를 깨달은 이가 말하는 도는 그냥 알아본다. 조금이라도 경험을 하면 아는 생각이 일어난다. 여기에서 머물면 아만我慢이 생긴다. 자기 경험만을 지키고 사는 문지기가 된다. (나는 깨닫지 못하고 아는 대로 맞춰가니 어렵고 마음이 시끄럽다) 법문은 듣는게 중요하다.  듣다가 순간적으로 자기와 계합(부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각이 오고 나는 변한다. 

 

나는 하나이다. 일어난 번뇌도 번뇌, 없에려는 생각도 번뇌다. 하나인 나에게서 두 생각이 나니 충돌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번뇌를 없애려 하지 말고 번뇌와 같이 살 줄 알아야 한다. 틀리면 빨리 다시 시작해야 용기 있는 사람이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공부를 성취한다.  (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으면 된다. 틀리면 다시 하면 된다. 삶은 이처럼 간단하다.) 법문을 듣다가 마음이 바뀌는 것은 순간이 있다. (믿음은 알아야 오는 것 아닌가? 모르는데 믿을 수 있는가?) 자기 마음의 말을 듣게 되면, 세상의 상식이나 도덕에 사로잡히지 않아 한가롭다. 선문답이나 게송을 기억하는 것은 자기와 남을 속이는 일이 되기 쉽다. 종교, 종교하는데, 깊은 차원에서

보면 종교는 없고 사람만 있다.

 

미워하는 사람이 옆에 있을 때는 미워할 수 있다.  하지만 미워하는 사람이 옆에 없는데도 미운 생각이 떠나지 않으면 그것은 미운 생각이 망상으로 남아있어 그렇다. 그러므로 망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있지도 않은데 혼자 만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망상 아니겠는가! 번뇌망상은 내 마음을 대상에 빼앗겨 돌아올 줄 모르는데서 온다. 불교는 이 사실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된다. 공부로 경험으로 사람들은 환상을 지어놓고 그 속에 산다. 그 환상을 허무는 것 또한 공부다. 환상은 분별이 없어지면, 탐욕이 사라지면 사라진다. 살아있으니까 걱정도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면 여유가 생긴다.  기운이 내려가고 차분해진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바로 풀려 하지 말고 그것을 대하는 나를 보아야 한다. 걱정도 삶의 한 부분이다. 이렇게 알고 받아들이면 걱정이 저절로 쉰다.

 

자아가 空이 되면 외부의 色도 공이 된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내쪽이 먼저 비우는 것이다. 비우는 곳에 부딪칠 일이 없기 때문이다. ( 내가 있으면 상대가 있고,  내가 없으면 상대도 없고, 상대가 없으면 나도 없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구속되지 않고 내 삶이 주인공으로 사는 것이다.)  내가 어디 붙들려 있나 잘 살펴보라. 그것을 깨닫자는 것이 공부다. 自性의 성질을 설명하는 것이 불경이다. 원래 佛性이란 말을 육조가 自性으로 바꿨다. 참선으로 자성을 체득하고 불경을 보면 모두 다 ‘내 소리 구나’하게 된다.  번뇌 망상에 손대지 마라. 원래 뿌리가 없어서 그냥 두면 사라진다. 만지면 덧난다.  (나는 내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내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외부의 힘으로 살아가면 뿌리가 없어 불안하다. 그것이 번뇌망상이다) 그 무엇에 믿음이 생기면 하찮은 말이라도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 (믿음은 나를 비움으로써 온다. 나를 비우는 것이 우선이다. 내 속에 있는 아상, 집착, 탐욕을 비워야 한다)  사람들은 진리를 지나치게 상상으로 대하고 있다. 실제 생활의 순간에 마음 바꿔 나오면 진리가 그러난다. 결코 무슨 신통이 아니다.  물질에 숨 막히니 현대인들은 그 속에서 외로움에 시달린다. 스스로 귀한 존재임을 확인하고 삶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한다.  실수를 경험으로 하나하나를 성장시켜 나가야 한다.  실수하고 후회 속에 있으면 어둠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