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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煩惱를 끊는 이야기(간화선의 길

앉아있는 간화선의 오해 (1)

부처님은 명령하는 분이 아니다. 스스로 행하는 분이고, 행하니까 사람이 저절로 따랐다. 부처님은 항상 자기가 먼저 행하고 대중에게 전한다. 요즘 불교는 아는 이는 많고, 믿는 이는 드물다. 부처님 법복을 입은승 僧은 많으나 그들의 마음에 불법은 없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서로 지켜야 나와 남과 중생과 부처를 통해 있는 것이 살아난다.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이 목적이지 알고도 지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중생심을 그치면 자기안에 있는 부처의 눈을 뜨고 나온다. 간화선의 간看은 글 생김새로 봐서 손 아래 눈이 있는 꼴을 하고 나온 글자이다.  밝은 태양 아래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려고 하는데 그 햇빛이 장애가 된다. 손을 눈위에 얹고 빛을 가리면 그 사람의 얼굴이 더 또렷하다. 마음은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이 간화선이다.  상相을 의지해 그 아래에 있는상 아닌 것을 본다. 깨닫는 자의 눈에는 사람이 본시 부처이다. 망상이 가린 눈에 보이는 것은 상이다. 그 상은 마음이 일어나는데 따라 변한다. 마음이 시끄럽다.

 

마음에 다툼이 끊어져 성품 바탕이 드러난 뒤에 오는 이 고요는 산과 도시에서도 고요하다.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은 항상 움직인다. 언제든지 환경에 따라 고요가 오기도 하고, 시끄러움이 오기도 한다. 스스로 있는 自性을 믿지 않고 옛사람의 언구로부터 마음을 놓지 못한다. 그것이 본디 있는 그들 마음을 덮고 있다. 생각이 일어난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번뇌는 살아있는 자에게서 일어난다. 번뇌를 피하려 들면 더 일어난다. 번뇌를 가까이 할수록 번뇌는 가벼워진다.  왜냐하면 마음에 가까워져 있기 때문이다. 간화선은 이미 자기에게 있는 성품을 빋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그 첫 문이다. 내가 만든 상념들만 그치면 본래 마음속에 존재하는 본성은 저절로 드러난다.  사람이 보고 듣는 것에 마음을 두어 본성을 떠나 있을 뿐, 근본 性은 몇천년이 되어도 항상 다르지 않는 그 성이다. 우리는불교를 알기도 전에 이미 부처를 깔고 있다.  그것이 자성自性이고 불성佛性이다.  내가 찾아나서면 어려워져 버린다. (올 때가 되면 스스로 온다.)  

 

불성의 성질은 중도中道이다.  이것이 작용하는 가운데 있으면서 앉고 서고, 보고 듣고 하는 것이다. 중도는 내 안에서 지나친 것을 잡아주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보는 자가 외형에 마음을 빼앗기면 그 아름다움이 색이 되어 보는 자의 눈이 흐트러진다. 부자가 중에 있으면 그부가 오래 가고 영화롭다.  그러나 중을 멀리하면 사회도덕을 무너뜨린다.  돈을 잘못믿고, 그들의 마음에 있으면서 도덕이 살고 있는 중을 가린 것이다. 그들을 방일放逸하게 한 것이다.  행패로 나타난 그들의 몸은 아두운 업業의 창고가 되어 감옥으로 오고 가고 한다. 中은 가난과 부를 가리지 않고, 그가 하는데 따라 선과 악의 열매를 맺는다돈과 재주가 문제가 아니다. 그들 안에 있는 中을 나중으로 하고, 물질을 먼저 하는 과보가 뒤늦게 몸에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불교를 배우려고 하지 말고, 내 몸의 중이 있는 곳으로 마음이 가야 한다. 불교는 이 中에서 시작된다. 사람의 정신이 중을 만나면 부처의 지혜로 나온다. 그러면 헛생각을 안하게 되고 남과의비교에서 오는 열등감 같은 것이 없다. 그러나 중을 잃어버리면 내 것을 놔두고 상대를 지어 부러워 한다. 이 중은 사사로움이 없다. 하늘은 스스로 사사로움이 없다가 그것이다. 성인 사람속에 있는 성을 본다. 그리고 性에서 中의 작용을 보고 평등을 말한다.

 

삶의 모든 장애는 性에서 오는 中을 가린 데서 온다.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命, 곧 천명을 등지는 데서 온다. 자랑하면 그 자랑하는 것이 그 사람의 중을 가린다. 건방지면 건방진 것이 가린다. 돈이 중을 가리면 돈을 가려진 눈으로 쓴다. 천민자본주의다. 또 돈이 없으면 그 없는 것이 중을 가린다. 그들은 꼬인 것으로 중이 나온다. 그것이 열등감이다.  믿고 깨달으면 가린 것이 벗겨진다.  물질이 많은 것 속의 천한 것이 그런 것들이다. 현대 문명인은 물질속에서 정신이 없다. 이것이 요즈음 현실이다.  특히 현대 사회에는 컴퓨터나 스마트폰 발달로 지혜가 나오는 中을 덮고들 산다.  인성을 어지럽게 만들어 놓고 사는 사회는 사람이 사람 스스로를 외롭게 만든다. 사람 또한 오관이 바깥 사물을 만나 변하고 있는 것 따라 움직이면, 감각의 조용함은 오지 않는다. 바람을 따라 움직이는 나무의 잎사귀 같다. 사람들은 스마트 폰을 쓰고 있는 동안 삶의 본성이 命에 닿아 있는 것을 놓치고 산다. 밖을 향하여 허둥대며 살고 있다. 이것이 깊어지면 인성이 메마르고 덕성을 잃어버린다.

 

불교의 배움은 바른 믿음(인과법 같은)에서 시작이 된다.  알고 믿으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돌아보게 된다. 참회가 온다. 이 돌아봄 없이 잘하려고만 들면 그것이 되레 길을 막는다.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장애는 물러 나간다.  이것이 공부 시작의 첫걸음이다.  우리는 미리 아는 것으로 마음을 가리고 불교를 배우려고 든다. 아는 것이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마음을 모르고 하려고만 드는 것이 공부에 가장 장애가 된다. 안배워도 나에게 불성이 있다는 믿음이 근본하고 있어야 한다.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으로 돌아가야 시작이 바르다. 잘하려고 하는 것들은 곧 지나친 것이다. 만든 생각은 조작이다. 중을 벗어난 것이다. 사람안에 있는 모든 능력인 지혜와 덕이 숨을 못쉬고 시든다. 불교는 본시 나를 가려놓고 사는 나를 다시 열어주는 종교이다.

 

지구가 스스로 돌고 있지만 그 돌게 하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나 또한 스스로 숨이 들고 나고, 피가 안에서 돌고 있다. 그리고 앉고 서고 걷기도 한다. 이 스스로 하고 있는 것이 내 안에 있는 性이다. 우주의 性을 天命이라 하고 내 안에 있는 것을 自性이라고 한다.  공자는 이를 중용 첫줄에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이라는 말로 붙이고 있다. 나의 성이 천명에 닿아있다는 말이다. 잘 알고 보면 우리가 앉고 서고 하는 것은 익힌 것이 아닌, 스스로 성에 맡겨진데서 스스로 일어난 일들이다. 이 존재는 있지만 형상이 없이 있으며 움직이는 것을 떠나지 않고 있다. 눈에는 뵈지 않는다. 이 눈에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을 禪에서는 性 혹은 불성이라고 한다. 이 성이나 천명은 우리가 알고 모르고를 관계하지 않고 움직이는 가운데 있다. 내가 이 성을 따를 수는 있지만 마음대로 바꿔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성은 길가에 널려 있는 작은 풀잎에도 있다.

 

이 풀잎 또한 성에 의해 푸르고 자라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만들어 내지 못한다.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달해 있어도 사람이 이 작은 풀잎하나를 만들 수 없고, 호박씨 하나를 만들어 낼 수가 없다. 겨울이 지나면 땅에서 봄이 오고, 가을에는 낙엽이 진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神만이 아는 일이라고 한다. 살아있는 사람 몸에 道가 떠나지 않고 있다. 노자는 이것을 보고 사람은 道를 떠나려고 해도 떠날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성은 모든 마음이 살고 있는 보고이다. 언어가 이 성을 만나면 밝은 빛으로 살아나온다. 그것이 지혜다. 유가는 날뛰는 사람의 마음이 천명에 닿아있다는 것을 알게 함으로써, 사람을 스스로 근신하고 삼가게 한다. 그리고 中을 얻어 나와 그 눈으로 세상의 이치를 바로 보고 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