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이 가시고 난 뒤 '저도 저의 갈 길이 멀지 않다'는 시간 앞에 서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들의 죽음은 서서히 오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옵니다. 숨 한번 들이쉬었다 못 내쉬면 이 몸은 내가 아닙니다. 아직 오지도 않는 미래를 가져와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다. 타성에 젖어 각성없는 출가생활은 또 다른 세속 생활과 별 다르지 않다. 나를 놔두고 하려고만 했던 선원 생활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돌아보는 시간이 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경계가 무너지니 모든 성인속에서 하나의 길을 만난 것이다. 사람 사는 일만 복잡하다. 종교를 놔버리는 곳에서 종교를 바로 알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 속에는 성인의 뜻은 놔두고 종교인들이 만든 헛된 틀이 많다. 남이 다하는 관습의 틀을 털어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날 혼란스럽게 했구나!' 하고 돌아보게 된다. 종교는 부처의 말을 중생이 아는 좁은 눈으로 덮어놓고, 성인의 길을 대신 하고 있다.
사람들이 만든 종교란 것에 붙들려 있는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좁고 어두운가? 종교적인 경젼이나 어록을 내전이라고 한다. 그리고 논어 성경, 중요, 도덕경을 외전이라고 한다. 외전으로 나는 더 폭넓은 큰 불교를 만난 것이다. 예수, 공자, 석가, 노자 등 그들이 경험한 것을 우리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가신 분들이다. 다른 것은 믿을 것이 없다. 나를 믿는 법을 그들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내가 열리면 경전 속에서 그들을 본다. 그 뜻이 우리들 안에 있다. 종교에서 말하는 원력이 여기에서 나온다.
성품은 몸은 아니다.
그렇다고 마음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 둘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형상을 통해서 작용으로 보여준다.
그 성질을 잡으려고 하면 멀어지고 보려고 하면 더 어두워진다.
육조는 이것을 한물건이라고 했다.
내가 불교를 알기 전에 이미 있는 마음이다. 그것이 부처 성품, 마음이다. 이는 내가 알고 모르고 상관 없이 있다. 다만 믿어서 깨닫지 못하여 자각되어 있지 않는 것뿐이다. 스스로 고요하고 밝아 마치 거울 같아서 物이 오면 비추어주지만, 그 비친 물건을 갖고 있지 않다. 스스로 비어 있다. 마음을 떠난 공부는 오래 앉아 있어도 아무 이익이 없다. 애를 쓰지만, 일고 꺼지는 망상속에서 세월만 지나가 버린다. 젊을 때는 그 젊음이 뒷받침해 주니 잘 모르다가 늦은 나이에 몸도 부실해지고, 집도 절도 없어지면 그때서야 안다. 선방 생활은 마치 정처가 없이 사는 보기 좋은 히피 생활처럼 되고 만다. 참선을 하려고 할 때 지나치게 애를 쓴다. 애를 쓰다보니 그것이 지혜의 길을 막고 있는 것이 되어버린다. 마음이 묻어 나오는 언어가 있어야 한다. 생명이 없는 말은 지식이다. 지식은 마음을 대신하지 못한다. 가끔은 말은 사람을 속인다. 우리는 아는 것에 취하고 듣는 것에 취해 있다.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은 머물지 않음의 다른 말이다. 번갯불은 반짝 하곤 머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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