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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煩惱를 끊는 이야기(간화선의 길

앉아있는 간화선의 오해 (2)

숨을 쉬고 있는 나를 보고 돌아봐, 내가 천명에 닿아있다고 알면, 불성이라는 언어가 나에게 낯설지 않고 가깝다. 佛性은 自性이고 天命인 것이다. 우리 몸은 진리가 존재하고 있는 집이다. 이를 부처가 계신 법당이라고 한다.  예수가 성경에 ‘god is within you'라고 한 것도 그것이다. 모든 중생에게도 잇다. 부처에게도 있다. 그 존재의 성질이 비어있다. 빈 것은 나의 것, 너의 것이 없다.  상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선악도 옳고 그름도 흑백도 아니다. 그러니 中道라 할 수도 있고, 비어있다 할 수도 있고, 형상이 있다 할수도 없다 할수도 있다. 그래서 空이다.) 우리 삶속에서 나와 남이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 또한 누구나 있는 서로 통해 있는 하나인 性에 닿고 싶은 마음이다. 

 

하나님, 부처님, 천명지위성은 이름만 달리하고 있는 언어이다. 뜻을 얻는 자는 여럿속에서 하나를 본다. 그 사람은 칸막이를 두지 않는다. 사람만 오고가고 형상은 놔둔다. 사람속에서 부처를 만나고 예수를 본다. 빈 곳을 가린 것은 인간에게 있는 三毒心 탐貪,진嗔,치痴다. 곧 성경에서 말하는 '이익을 구하지 않아야 하고, 성내지 않아야 하고 , 지혜로워야 한다. 승僧이 조주에게 묻는다.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는 無 '없다'고 말한다. 묻는 사람은 '있다, 없다' 에만 생각이 붙어있다. 그러나 조주는 그와는 다르다. 조주의 눈은 네가 있다고 해도 있고, 없다고 해도 있는데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우린 있고 없음에 눈이 붙어 안 떨어진다. 있다, 없다에만 더 익숙해 있다. 덮힌 것이 걷히면, 살아있는 눈이 드러난다. 본성을 덮어놓고 그 위에 이것이다, 저것이다에만 마음이 가 있다. 우리는 아는 것으로 덮고, 모르는 것으로 덮어 놓고 있다. 우리에게는 그 무엇을 알기 전에 그 자신을 믿는 것이 먼저다. 불성의 성질은 내가 몰라도 있고 알아도 있다. 알고 모르는 것하고는 상관이 없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스스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사람이 앉고 서는데 노력이 필요한가? 삶속에 살아있는 우리는 이 생각 저 생각 만들고, 저 생각이 이 생각을 만든다. 그것이 生이다.  生이 있는 곳이 그렇다.

 

내가 나를 믿는 것이 먼저다. 믿으려고 하나 망상이 나를 덮고 있다.  그래서 스승을 찾는 것이다. 사실은 일고 꺼지는 마음이 있는 곳에 無가 있다. 그러나 마음이 쉬어지지 않으면 일고 꺼지는 마음에 내가 집착한다. (마음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항상 바쁘다) 구하는 것을 그칠 때 궁구窮究가 있다. 비로소 구할 수 있다.  물어서 얻으려고 하면 더 어리석어지고 만다.  (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 이 같음과 다름을 인정하고 믿고 들어가야 한다. 이 다름은 같은 것 속에 붙어 같이 있다. 다만 믿고들면 다른 것이 그 믿음속에서 보인다.  불교 공부는 나를 깨닫는 공부인데 말을 따라 들어가면 가장 어렵고, 뜻을 품고 있는 화두 하나만 잘 붙들면 가장 간단하고 쉽다.  하나의 뜻이 풀리면 팔만대장경이 다 살아나지만,  팔만대장경을 다 알아도 한 가지 뜻에 통달하지 못하면, 만가지가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만다.

 

부모가 낳아준 뒤로 생긴 이 몸은 형상이 있다. 그러나 보이지는 않지만 이 형상을 끌고 다니는 놈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내가 알고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있다. 이 알 수 없는 실상이 곧 화두의 의심이다. 우리는 안이비설신의 眼耳鼻舌身意 (몸의 여섯 가지 감각 기관)가 붙어있는 이 몸을 가지고 다. 이 몸에 붙은 육식六識이 밖을 나가 익혀 오욕 속에 묻혀 있다. 화두가 품고 있는 뜻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지만, 익힌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멀고 가까움이 생긴다. (말과 글로 배운 것이 많다면 깊은 생각으로 익혀야 한다. 그래서 지식이 마음에 닿아야 한다.) 옛사람 성품이 지금 나에게도 있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에 끌려다니고 있다. 그리고 지금 사는 것에 급급하다. (내가 처한 환경이 중요한 이유다. 인간은 미래를 계획하지만 항상 먹고 사는 일, 눈 앞의 일이 우선이다. )

 

천명이 다른 것이 아니다. 지구는 자전하고, 달이 뜨고 지고, 풀잎이 스스로 자라고 하는 것들이 모두 천명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 이 몸도 물을 마시면 오줌으로 나오고, 피가 돌고, 보고 듣고 하는 것이 다 천명을 안 떠나 있는 것을 본다. 다만 내가 그곳에 닿아 있지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하나를 바로 하면 모든 질서없이 익힌 것들이 놓아져 실타래 풀리듯 질서가 나에게 다시 찾아든다.  道에서 하늘, 땅이 생기고 그것이 음양陰陽이다. 이 음양이 생긴 뒤에 오행五行이 나오는 것이다.  마치 콩 한 알을 땅에 묻어두면 두 떡잎이 나온 뒤 다섯 잎이 나오는 것과 같다. 나는 부모라는 인연을 지나 나왔지만 내 생명의 존재는 그들에게 예속된 것이 아닌 천명에 닿아 있는 것이다. 스스로 자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몸은 스스로 있는 도가 바탕하고 있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몸은 육식이 밖을 나가 질서 없이 보고 듣고 익힌 것으로 인因을 짓고, 과果를 받아 윤회속에 있는 몸이다.

 

화두는 살아있는 의심이다. 이 의심이 있는 곳에 이 몸은 道를 따른다.  그리고 내 안의 능력의 눈을 뜬다. 내가 도를 떠나면 가는 곳마다 부딪침을 만나고, 반복된 윤회의 苦를 받는다. 한 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줄기가 있고 가지에 잎이 붙어있다. 바람이 볼 때마다 잎이 흔들린다. 보고 듣는 것에 마음이 가 돌아오지 못하면 바깥 환경에 따라 흔들린다. 나는 불안하다. 인간이 이렇게 해서는 안되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지. 그래서 잘못 익힌 버릇을 자각속에서 놔둔다. 모든 덕이 살아난다. 그러나 화두가 없이 몸에만 나를 맡겨두고 사는 사람은 덕이 일었다 그쳤다 한다. 돈이 있으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다가 스스로 천해지고, 없으면 그것이 없는 것 때문에 스스로 천해진다. 앉고 서고 보고 듣고, 걸어나 서 있으나, 도가 붙어있는 나의 존재는 스스로 묘하다.

 

내가 나를 먼저 덮는다. 그리고 남이 잘 사는 것에만 눈이 간다. 항상 가난하고 만족을 모른다.  빈천 貧賤은 이런 데서 온다. 삶의 불만족은 이런 곳에 있다. 세상살이나 도를 닦는 것이나 둘이 아니다. 작은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 되레 빠르다. 작은 것을 바로 하면 그 작은 것이 큰 것에 닿아 있다그러나 작은 것에서 시작할줄 모르는 이는 큰 것을 이룰 수가 없다. 부처의 경을 보는 것도 내 불성을 가려놓고 접근하면 검은 글자 뿐이다.  내가 어두워서 그렇다.  부처님은 우리 속에 있는 부처를 보고 내가 가린 것을 걷어내도록 길을 인도해준 분이다. 우선 그런 나를 봐야 한다.  이 구하는 것이 허물이다,  알면 놓는다. 공부가 시작된다우리는 있다 없다 하는 습習이 나를 가리고 있다. '이 뭣고?'  화두 또한 이 습을 못 그치면 공부가 시작되지 않는다. '착의끽반着衣喫飯, 옷 입고 밥먹고, 대인접화對人接話 사람하고 만나서 대화하면서, 앉고 서고 보고 듣는 이 놈은 뭣고?' 또한 그것이다. 세상은 한가롭다. 내가 한가로우면 밖도 한가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