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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煩惱를 끊는 이야기(간화선의 길

동서양 고전 속에서 본 부처의 성품 (2)

내 성격에 맞춰서 내 마음 들면 믿고 내 마음에 안들면 안 믿는다. 성안들은 사람에게 있는 진리를 먼저 보고 간 사람들이다. 經은 그들 경험을 말해 놓고 갔구나하고 이제 알게 된다.  종교가 품고 있는 그들의 말뜻을 다시 알아가게 된다. 지금까지 보고 듣고 익힌 성인들의 말이 하나하나가 새로워져 간다. 모든 것을 다시 배워 간다. 공부를 하고 싶어서 좋아서 하니 쉽고 즐겁다. 이제는 성경, 사서삼경, 불경도 선의 눈으로 다시 봐진다. 내게 있는 것을 알고 믿으니 그들이 보는 생명을 가진 것들이 다 진리가 안 떠나 있다. 예수와 석가모니는 나와 먼 사람이 아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그들의 말이 나를 두고 한 것임이 확실해진다. 석가모니가 말하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하늘과 땅 사이에 내가 있다는 말은 석가모니 혼자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고 누구나 하늘과 땅 사이에 숨쉬고 존재한다는 그런 말이었다. 그리고 공자가 말하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그것이다.

 

성인들만 다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종교, 철학, 과학, 예술 각 분야마다 역사 속에 있는 흔적을 보고도 옛사람이 다시 보이고, 초등학교 교과서까지도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사람이 놓고 간 것들이 다시 보이는 것은 사람속에 바탕하고 있는 성을 그것들이 안떠나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도 모르고 익힌 교육이 가끔 나에게는 사람을 교활하게 만들고 꾀로 살아가게 하는 같았다. 철학자도 아닌데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톨스토이 자서전을 본 나는 고독에 찌들어 열차 하역장에서 죽어가는 모습이 기억에 떠올랐다. 왜 우리는 저렇게 불행한 삶을 살다간 사람을 존경하고 부러워해야 하는가?  미쳐서 죽은 니체에 대한 강의를 듣는 것도 이상했다. 왜 미친 사람의 공부를 우리가 하고 있어야 하는가? 교육이 자꾸 낯설어져만 간 것이다. 삶에 방향을 못주는 교육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이었다.  성인은 있는 사실을 말하여 가르치고, 학교 교육은 지식을 얻어 삶을 배우게 한다는 것을 뒤늦게 안 것이다.

 

스님들이 보여주는 아침식사 공양법은 부처가 살다간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였다.  말이 없는 부처의 가르침을 접한 것이다. 공양은 모두 평등하게 나눠 먹는다. 어른 밥그릇도 밑의 사람이 씻는 게 아니라 큰 스님도 자기 밥그릇을 자기가 씻고, 작은스님도 자기 밥그릇을 자기가 씻었다.  이렇게 평등한 곳이 있는가. 세속에서 익힌 습이 저절로 놓아지니 내 몸이 저절로 불법에 젖어든 것이다. 우리는 나에게 진리가 있는지, 하나님이 있는지, 부처가 있는지도 모르고, 밖에서 찾으며 차별세계 속에 나를 놓아두고 헤맨다. 한끼 얻어먹고, 저녁이 오면 얻어자고, 아무것도 안하고 발걸음 닿는대로 다닌다. 이 걸식은 나를 포기하고 거지로 돌아가 살고 있는 행각이다.

 

산 좋고 물 좋은 곳, 큰 기와집 아래서 공부할 때보다 저잣거리가 더 편안한 경험으로 온 것이다.  백번 듣는 것보다 경험에서 온 것이 더 귀함을 사실로 확인한 날들이었다 . 선방에 앉아 있는 것보다 이 행각에서 (속세에서) 나를 다 놓는 것이 쉬웠다. 스승의 한마디에 내가 붙들고 있는 선禪을 놔버리니 그때서야 마음을 알고 구하는 마음이 그쳐버렸다. 그 먼 방황이 그치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 처음은 편안하고 좋았다. 사람에게 부처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기 시작한다. 이 믿음이 오기전에는 구하여 얻어보려는 마음만 온통 둘러싸 나를 감고 있었던 것이다. 한 구절에 놓아지니 찰나에 모든 것이 놓아져 버렸다.  (말 한구절에 모든 것을 놓고 깨닫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습이 있어 이곳 저곳을 오락가락 한다) 중국 임제선사가 ‘사람 떠나 불법이 따로 있다면 그 사람은 외도의 길에 든 사람이다’라고 꾸짖음이 내게서도 살아난다.  평등성은 이 생명이다. 누구나 갖고 있는 생명, 평등성에는 부처와 중생이 둘이 없다. 시끄러운 차별이 놓아져 다툼이 그치니 우선 내가 편안하다.

 

내가 편안하니 남도 편안하게 보인다. ( 누구나 갖고 있는 생명이 불성이고, 그러한 마음이 평등이다. 불성은 평등을 아는 것이 기본이다)  내가 공부하고 싶다고 해서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지혜로워지고 싶다고 지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내가 내 생명 바탕에 닿는 날 지혜가 나온다. ‘예수가 말하는 ’나는 빛이요. 나는 길이다‘ 사람마다 생명을 보고 나는 생명이다하는 것 또한 그것이다. 뜻을 못 얻으면 언어는 나를 한 번 더 어둡게 한다. 나를 놔두고 무슨 부처가 따로 있겠는가? 오랜 수행끝에 다른 특별한 것을 아는 것이 아니다. 가려져 있는 나를 다시 보기 시작한 것 뿐이다. 이제 잘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어져 버렸다. 잘못알고 있는 것을 고쳐 다시 믿으니 저절로 편안해져 온다. 고치는 것 또한 억지 노력을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