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에는 한 중생이 성불에 이르기까지 53명의 스승을 만나 깨달음을 얻는다. 이 스승중에는 선사, 백정, 신선, 창녀, 기생 등 여러종류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런 많은 스승을 거쳐 마지막에 미륵을 만난다. 그는 법문을 일시에 놔 버리고 깨달음에 든다. 대승의 공부는 스승이 곳곳에 널려 있다는 얘기다. 이런 것을 만나면 이런 것을 익히고, 저런 것을 만나면 저런 것을 익히고 갖가지 사람 속에서 높고 낮은 스승을 만났다. (그러나 분별심에 가려 있으니 스승인줄 모른다. 마음이 닫혀 있으니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산과 악, 미와 추 이익과 손해, 그런 것이 먼저 눈에 들어오니 마음을 열수가 없다. )
땅에 의해 넘어진 자는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도를 통한 지인은 항상 심기를 하반신에 충실하게 모은다. 인간은 지극히 불완전한 몸을 가지고 있다. 이 불완전한 몸으로 공부를 하려 들고 있는 사람이 곧 나이다. 우리는 밖의 자연만 보고, 내 몸도 이 자연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산다. 그러나 사람, 몸 또한 자연이다. 공자는 중용에서 ‘천명지위성 天命之謂性’이라고 말한다. 불교는 이것을 불성佛性이라 말하고 예수는신성神聖이라고 다른 말로 나타낸다. 불교는 몸과 마음을 놓고 보는 해탈로 나오고, 신선도는 장생으로 공자의 유교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는 오덕으로 나타난다. 예수는 성내지 않고, 이익을 구하지 않고, 어리석음이 없는 지혜로움이 있는 사랑으로 나타내고 있다. 불교 수행자들은 성명쌍수性命雙修를 함께 닦아 온 분들이 많다. 道의 그릇인 몸을 가꾸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릇을 가꾸는 이는 종교마다 다르다.
몸이 살아나야 학문도 살아나고, 종교도 문명도 살아난다. 현대인들은 많은 물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삶에 여유가 없다. 누가 쫓아오지 않아도 쫓김을 당하는 것 같이 살아가고 있다. 이 몸은 道를 담고 있는 그릇이다. 문명이 주는 생활 속에서 잘못 익혀온 삶이 버릇이 이 道의 그릇을 흩뜨려 놓았다. 몸에 있는 道가 어두어진 것이다. 이젠 몸이 짐이다. 맑은 기운도 쉬이 몸의 경락을 따라 흐르지만, 성냄에서 오는 검은 기운도 쉬이 그의 몸에 있는 경락을 따라 흘러 온 몸을 정령해 버린다. 그래서 신선이 산에서 산다. 사람의 목숨은 간단하다. 오래오래 시간을 두고 오는 것이 아니다. 숨을 들이 쉬었다가 못 내쉬면 오는 것이 죽음이다. 이렇게 순간에 온다.
불교는 있는 사물을 바로보고, 말하고,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와 팔정도八正道를 들고 나와 인생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보여준다. 불교는 생멸 生滅을 놓고 보는 지혜의 눈을 갖도록 한다. 몸은 지수화풍地水花風 네가지 요소로 모였다가 인연이 다하면 다시 흩어진다. 마치 빈하늘에 구름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무상無常을 말한다. 유위법은 몸에 집착하든지 마음에 집착한다. 기공 수련자는 몸을 주인으로 삼는다. 내가 숨을 내쉬려고 노력을 안해도 있는 생명에서 온 숨에 나를 밑길 수 있다. 自性에 의지해 쉬는 숨이다. 이 자성은 노력하는 자가 없이 존재한다. 호흡하는 자가 없이 호흡한다. 이것이 무심無心에 든 호흡이다. 사람들이 '유마는 부처를 대신하고 나온 보살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중생속의 부처를 이렇게 잘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깨닫는 이에게는 근심 덩어리인 이 몸이 보살로 나타나고, 깨닫지 못한 이에게는 같은 몸이지만 생로병사 속에 두어 다툼 속에서 시끄러움으로 나타난다.
몸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일찍이 알아야 삶이 귀한 줄 알고, 그래야 사는 것이 하루하루가 소록소록 싱그럽다. 늦게 철든 사람은 무상無常 대신에 허무에 젖어들어 가는 곳마다 싱그러움이 없다. 그러나 몸이 무상 속에 있다고 아는 사람은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곳에서 성인의 눈을 만난다. 인생은 뜬구름이요, 물질은 구름 따라 같이 흘러가는 것으로 본다. 받아나온 몸이 유지되는 곳에는 음식과 호흡이 그 근본을 이루고 있다. 숨쉬는 것에서 온 기운을 양陽이라 하고, 음식에서 온 기운을 음陰이라고 한다. 이 두기운이 조화를 이루고 오장육부로 보내져 몸이 활동하는 기운이 된다. 몸을 작용하게 하지만 눈에 안 보이는 불성을 마음이 만나면, 그 마음은 육바라밀六波羅蜜 ( 보살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 해야 할 여섯 가지의 수행)로 나온다. 그러나 마음이 성품을 등지면 육도 들어 윤화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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