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에는 다섯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오관이 생기기 전에 그 성질이 빈, 눈에 안보이는 道가 있다. 그리고 도 뒤에는 음양陰陽이 자리하고, 그 음양이 인 뒤에 오장이 자리잡고 이 오장五臟은 오덕五德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곧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그것이다.
위장이 약한 사람은 감정이 환경에 따라 자주 변하고, 먹는 음식이 잘 체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中을 얻어 道에 닿으면 감정은 안정을얻고 소화기 또한 건강하게 작용한다. 다른 장부에 있는 오덕인 인의예 지신 또한 도에 닿아 쓰이면 中을 얻으나, 그 쓰는 것이 절도를 벗어나 중을 잃고 떠돌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불안정해져 나온다. 불교에서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할 때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가끔 세상에 보이는 용기가 지나쳐 주체하지 못하면 성정이 거칠어 깡패가 되기도 한다. 이 용기가 중심을 얻는 데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는 그 둘 사이를 조절하여 역시 中을 얻게 한다.
공자는 우리의 종묘제례와 같은 행사를 위해 禮를 행할 때 주변사람들에게 예를 묻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예를 가르치시는 스승도 예를 물어서 합니까?' 공자는 말한다. '모르면 물어서 하는 것이 禮다' 공자에게 모르는 것은 허물이 아니다. 그는 모르면 물어서 할 줄 아는 도의 귀한 눈을 가지고 잇다. 대개의 우리는 거꾸로 아는 것을 道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묻는 것을 뒤로 하고 만저 아는 것을 귀히 여기고, 아는 대로 하려고 한다. 내 안에 스스로 갖추어진 도는 물어서 알아가는 성능을 품고 있다. 이것이 도에 속하는 지혜다. 이 지혜는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필요하면 물어서 쓰는 마치 거울 같은 것이다. 지혜는 빈 곳 곧 無心에서 온다. 이 빈 곳에는 무거운짐이 없다. 그래서 성인은 짐이 없는 사람이다. 마음이 가난한 예수는 '무거운 짐 진자 내게 와서 쉬라'고 한다. 불교 또한 '나를 내려놓는 공부'가 먼저다. 그것이 무아상無我相이다. 우리는 미리 아는 것으로 中을 가려, 치우치고 산다. 어리석음인 치심痴心속에서 아는 것을 먼저 보배로 삼는다. 이 어리석음에서 탐심貪心이 생기고 진심嗔心이 생긴다. 예는 아는 것이 아니다. 도에 의지해 쓰는 질서의 미덕이다.
그렇지만 이 禮가 도를 잃으면 형식으로 사람을 얽어맨다. 예가 곧 짐이다. 中道는 내가 비어져 드러난 것이지, 만든 것이 아니다. 공자의 禮 또한 그렇다. 예는 지키는 것이 아니고 갖는 것이다. 부처는 내세울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내안에 형상이 없이 홀로 존재하지만, 나를 움직이고 앉고 서게 할 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를 앉고 서게 한다. 마음에 가린 것이 없는 사람은 이름을 따라 다니지 않는다. 뜻을 취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땅 아래나 땅 위에서나 무엇을 두어 섬기는 것을 꾸짖는다. 밖을 추구하는 것이 우상 偶像이다. 미혹속에 있는 사람이 만든 상이 우상이다. 예수는 神은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한다. 사람안에 있는 신은 형상이 없다. 그것이 神의 성질이고 自性이다. 이것은 몸을 통해 내가 살고 있는 생활속에 보여주고 있다. 선문답은 말로 안되는 것을 문답을 통해 서로 알아보는 것이다. 그게 탁마琢磨속 에서 道를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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