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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대하여: 저항과 체념사이에

저항과 체념의 모순에 직면하기

대중에게 부정되어 거리에서 투명인간으로 취급받았던 시골변호사 A. 투명한 물질을 보듯, 그를 꿰뚫어 지나가는 타인의 시선이 A를 부정했다. 없는 사람으로 취급당한다는 것은 참아내기 힘든 일이다. 인간은 타인에게 존재를 드러내기를 추구한다. 이게 전부다. 인구 통계적인 연령대 피라미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든 간에, 사회가 젊은이들의 파괴적인 판결을 받아들인다는 점은 늙어가는 사람이 분명히 인식해 두는게 좋다. 사적이든 공적이든 노인에게 보이는 존경심이라는게 거기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노인은 청년에게만 늙은이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그들의 눈에도 피하고픈 늙은이일 뿐이다. 운명을 같이하는 늙은이에게는 동지의식을 표시하길 거부하며, 늙은이의 몰골에서 읽히는 존재부정의 표시에 거리를 두려 안간힘을 쓴다. 과거 왕성한 활동으로 명성을쌓았으나, 현재는 초라히가만 한 노인에게 보내는 경의가 어떻게 경멸로 변하는지 이해하려면, 대학생들은 그 자신이 늙어야만 하리라.

 

사회는 우리에게 사회적 연령을 지정해줬다. 사회는 우리를 파괴 한다. 이제 겨우 절정에 오른 우리를. 우리가 무엇을 만들어냈고 무엇을 못했는지 결산하며, 일종의 불문율, 매일처럼 새로워지는 젊음의 칙에 따라 우리를 파괴한다. 사회가 주목하는 것은 변화와 발전의 기회, 곧 미래를 가지는 젊음일 뿐이다. 노년에 이른 우리의 사회적 해체는 이미 결정된 사안이다. 우리가 그 누구든 상관없이 늙었다는 사실 하나로 우리는 해체 당한다. 우리 사회적 자아는 그저 주어졌을 뿐이다. 긍정적 태도, 품위있고 불평하지 않는 노년은 두 측면을 가진다. 변화와 발전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젊음과 더불어 '젊게 살자' 외쳐 되는게 그 하나이며, 화려하게 꾸며 젊게  남으려고 안간힘을 쓴 늙은이라고 해서 사회가 받아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경제적으로 그럴싸한 외양을 꾸미는데 이용할 뿐이다. 노년을 소비하라고 요구할 뿐이다. 늙음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태도는, 노인이 전원으로 돌아가 은퇴생활을 즐긴다고 말한다. 노인은 평화를 허락해준 사회에 만족한다. 사회가 그에게 더는 기대하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자신의 삶을 이제 수확한다고 말한다.

 

햇살이 잘드는 창가에 앉아 세계를 구경한다. 저 멀리 떨어져 보이는 세상은 자신과 어무 상관없다고 말한다. 게임은 끝났다. 이제 더 이상 게임에 낄 필요가 없다. 아무런 질투를 느끼지 않으며, 자신을 소진하기에 바쁜 사람들을 구경할 뿐이다. 노인은 사회가 요구한 바로 그대로이다. 노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할 때에만 누군가다. 노인은 타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안에 녹아 있는 부정이 자기 문제임을 알아 차리고, 그에 저항하려 몸을 일으킨다. 아마도 이게 노인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 진정 품위있게 늙어갈 유일한 가능성이리라. 유행, 속물근성, 각종 주의들, 아는 척 하는 행위 따위를 거부하면서도, 그저 어깨만 으쓱하며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이는 게, 문화적 늙어가는 사람의 태도이다. 새로운 것, 익숙하지 않은 것을 바라보는 막연한 저항감, 다분히 통속적인 저항감은 정신사를 잘 아는 교양인에게 익히 알려진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현상이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것을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마뜩잖게 여기는 늙어가는 이의 고집 센 태도가 곧장 문화적 소외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적으로 소외된 노인은 잘 알지 못하는 표시체계, 곧 전혀 새로운 신호로 가득한 상황에서 길을 찾느라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이를테면, 처음 영국을 여행하는 자동차 운전자는 교통표지판이 대륙과 다른 경우가 많아 자신감을 잃고 중압감에 사로잡혀 천천히 몬다. 시대의 문화적 표시로 혼란을 겪는 늙어가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표시는 다른 것과의 관계로, 그 의미를 부여 받는다. 늙어가는 사람은 현재의 문화적 현상을 자신의 시대 였던 과거라는 관계지점에 따라 해석하려 시도하는 그만큼, 현재로부터 소외된다. 그에게 미래이자 세계와 공간을 약속해 주었던 그의 과거는,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소외로 비롯된 낯설음의 정체는 무기력한 거부와 불쾌감으로 표현되는 불안함이다.

 

자신이 젊은 시절을 보낸 도시의 풍경이 달이 갈수록, 해를 거듭하면서, 그 풍경이 바뀌어 길을 잃고 헤매는 노인의 처지 그대로이다.  이제 그가 가진 세계 지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더는 세상을 알수가 없어 헤매는 늙어가는 사람은 인내심으로 상대해 주어야만 한다. 개인의 중심은 더는 시대정신이 아니며, 이런저런 이론도 아니고, 그 구체적인 인격체를 가지는 개인 자신일 따름이다. 개인이 자랑하는 근거는 그 심리적 사실이며, 말 그대로 감정으로 채색되어 실존적 농밀함을 자랑한다. 어떤 특정 표시체계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개인이기 때문에, 개인의 존재 없이는 체계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늙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눈앞에서 생겨나지만, 갈수록 자신의 영향력으로 부터 멀어지는 시대의 표시를 이해하기가 아주 어려워진다.

 

체계의 핵심, 그 체계에 힘을 불어 넣어주며 질서를 만들어 주는 중심은 개인의 자아이다. 이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는 자아가 맺는 모든 관계이다.  늙어가는 인간의 소외는 전면적으로 이뤄지는 총체적 소외다. 늙어가는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체계에 간결한 거부로 대답한다면, 그는 시대로부터 빠져나와 세계의 이방인, 속내를 알 수 없는 괴짜가 될 뿐이다.  오늘날 철학이라 불리는 모든 게, 그저 아무 위로도 주지 못하는 헛소리 장광설에 지나지 않았구나. 새로운 체계를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그댓가로 자신의 개인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감수해야만 한다. 결국 늙어가는 인간은 누구도 자신을 올바로 이해해 주지 않음을 알고, 가슴을 치며 괴로워한다. 이게 그가 처한 상황의 실상이다. 사회의 각종 표시는 그것을 창조한 사람만 알수 있다. 알지 못하는 교통 표지판 사이에서 헤매는 자동차 운전자처럼, 옛날만 기억하는 낯선 손님은 곤욕을 치러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