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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대하여: 저항과 체념사이에

죽음의 기이한 불가사의

병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주치의의 얼굴은 언제부터인가 전문가의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같은 해에 태어난 친구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다. 늙어가는 이는 죽음을 생각한다. 처음에 떠올리는 죽음은 객관적인 사건이다. 아직은 생존자로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죽음이다. 가족은 형편이 허락하는 한 이런저런 근심에 사로잡힌다. 무엇보다 막상 일이 닥치면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좋을지 몰라 걱정한다. 바로 그래서 고인으로 예정된 노인은 마지막 유지를 글로 남겨둔다. 죽음을 두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없다.죽음은 아무것도 아닌 없는 것, 그 어떤 것도 아닌 없음, 말 그대로 무無이다. 죽음은 마치 등급을 높여가듯, 갈수록 심해지는 신체적 고통을 주어 두렵기만 하다. 죽어감이라는 것도 인생이다. 삶이 영원한 죽어감이듯. 사회적으로 홀대 받지 않으려 한편으로는 몸을 깔끔하게 가꾸는 일에 더욱 신경 쓰며, 다른 한편으로는 짐짓 힘찬 모습을 꾸민다.

 

병원에서 냉담한 간호사가 거의 신경을 써주지 않은 채, 불쌍한 가난뱅이로 죽어가는 것과 사치가 극에 달한 병원에서 부자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결코 같을 수 없다. 부자는 죽어가는 순간 조차 잘 사는 인생을 가능하게 해준다. 우리는 모든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고 하지만 죽어가는 과정에서조차 평등하지 않다. 인간이 사회적으로 죽어간다는 주체는, 존재론적 고찰 아래 묻어둘수 없으며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격렬한 몸의 아픔, 죽음에 앞서 진행되는 학대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무슨 마법 주문이라도 외우듯 지워버릴 수 없다. 물론 일상경험이라는 장을 넘을 수는 없다할지라도 죽어감이라는게 무엇인지는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죽어간다는 말이 개념으로 자리 잡은 것은 오로지 이미 들어선 죽음으로, 그 말이 논리적 타당성을 얻을 때 뿐이다. 죽음이라는 무는 모든 논리 법칙을 무력하게 만든다. 죽음이 찾아왔다면,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고대로부터 익히 아는 사실이며, 이런 지식은 누구에게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한마디로 나는 없다. 나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나안에 머물러 나의 자아를 오로지 나 자신에게 의미를 가지는 것, 곧 존재자로 바라보는 한 나는 존재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죽은 나는 없다인간이 사회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할지라도, 한 인간의 삶은 오로지 그 개인의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가 사라진 세상을 또올려 볼 수는 있어도 자신의 없음이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할 수는 없다. 인간에게 자신의 실존은 결정적 순간에 세계의 의미 그 자체다. 살아있는 생명체가 가지는 수십억 개의 세포가 궁극적으로 파괴되는게 죽음이지 않은가?  누군가 존재했었으며 더는 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타인의 죽음으로 만  경험한다. 타인의 죽음은 우리를 슬픔에 젖어 베일을 뒤집어 씌고, 병원과 장의사와 묘지를 찾아가는 고객으로 만든다.  망가진어떤 물건은 물리적 성질이 다르다할지라도 대체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영원히 사라진다.

 

당신의 연인은 그저 없을 따름이다. 시신을 화장해 나무로 짠 관에 누이는 장례 준비과정의 잔혹함일 뿐이다. 관속의 평안? 그것은 평안이 아니다. 평안이라는 개념은 인생을 살며 겪는 불안에 대비된 것이기에 살아있는 동안에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장례에 적용되는 평안이란 살아남은 자의 편의에 맞춰 필요한 수정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이는 평안하지도 불편하지도 않다. 그는 평안히 쉬지 않으며, 잠자지 않는다. 평안뒤에는 불편함이, 잠 뒤에는 깨어남이 와야만 하지 않은가?  없음은 그저 없음이다. 아름다운 말마저도 하나의 요란한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이 고단한 인생끝에 마침내 얻은 영원한 평화, 모든 인생이 그렇듯 고단하고 힘들었던 삶을 마감하고, 얻은 평온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죽음의 평안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삶의 불안함을 떨쳐버렸다는 뜻이다. 정확한 표현은 어떤 이가 죽었으므로, 그는 이제 없다는 무가 되었다는 말이다.

 

프로이드가 ‘무의식에서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불멸의 생명을 자랑한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 말은 틀림없이 맞다. 이런 확신의 바탕은 흔히 생각하듯 생물 특유의 생명집착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수 없음일 따름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 확신은 신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자신은 영생할 것이라고 믿는 만큼이나 허약하고 가날프다. 영생, 신의 은총, 참으로 알 수 없는 말이다. 누구도 자신의 임종이 임박한 순간에 저승에 희망을 걸지 않았다. 누구나 언젠가는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생각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죽음의 상념을 품기 시작하는 지점, 그래서 '아, 이제는 늙었구나 !'하고 말하는 지점이 있다. 어쨋거나 젊은이는 기쁜 마음은 아닐지라도 죽음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으며, 전쟁터로 간다. 고속도로를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심한 병에 결려도 '곧, 털고 일어나겠지' 하며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이런 것은 저항능력을 확신하는 몸의 지혜일까? 우리가 늙어가며 깨달았다고 믿는 것은 두가지다. 우선, 죽음의 두려움 혹은 죽음 상념의 절박함은 죽음이 밖으로부터 이를테면 사고나 적의 손으로 일어나느냐 아니면, 안으로부터 빚어지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강도를 보인다는게 그 하나이다. 다른 한편, 이 안으로 부터의 죽음일지라도 젊은이에게는 비록 그가 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할지라도 현실적이라는 느낌을 별로 주지 않는다는게 또 하나의 깨달음이다. 죽음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객관적인 사실에서 바로 자신의 일로 여겨지기에 이르려면, 몸의 몰락이라는 더욱 진행되는 경험 이를테면, 힘이 예전만 못하다거나 깜빡거리는 기억력, 어떤 종류의 질환 따위의 경험이 필요하다. 몸의 상실, 사회로부터 소원해짐, 문화적 감각의 손실은 예전에 그가 그저 이론적 진리로만 무심하게 여겨왔던 사실을 확신하게 만든다. '나는 죽어가고 있구나'  모든 것을 체념하게 하는 죽어감의 상념 저편에 드디어 죽음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