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늙어감에 대하여: 저항과 체념사이에

소유나 존재냐

젊어서는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용기를 가지고 거듭 가능한 것을 향해 나아가도록 시도했다. 사회가 아직 가능하다고 인정해 주는, 바로 그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어 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러 그 나이는 곧 현실이다.  나이, 곧 사회적 연령은 기억에 저장된 시간층이나 압박과 고통으로 손상된 몸을 세계의 상실로 경험한 바로 그 기억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에게 매겨지는 몸값 역시 시장가격이다.  우리의 고향은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소유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존재는 가진게 얼마나 되느냐는 소유의 문제를 밝힘으로써 비로소 주어질 뿐이다. 어떤 사람이 누구이며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그가 무엇을 가졌느냐에 따라 정해진다. 일반의 질서는 인간에게 가지라고 요구한다.

 

태어나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벌인게 없다면, 무명씨에 지나지 않는다. 소유의 사회는 개인의 자율성을 무력하게 만든다. 소유해야만 한다는 요구의 압력 아래 개인은 타인의 시선 앞에서 자신의 뜻을 펼쳐나가는 자기만의 전망을 추구하는 인격체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 소유의 운명은 아주 일찌감치 곧 요람에서 시작된다.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을 상속자로 태어났거나, 아버지의 공장 혹은 법무법인이 소유의 솜씨를 발휘해 달라고 기대하는 식이다. 물론 당사자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자각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런 요구를 받는다. 다른 이에게 이 소유 과정은 중고등학교에서 시작된다. 수학에 뛰어난 재능이 발견되어 물리학자나 엔지니어라는 인생궤적을 살아가도록 부추겨진다. 물론 이는 시장가치를 확신한 선택이다.

 

소유의 세계는 나날이 자신을 새롭게 기획해 보는 아웃사이더를, 갈수록 더는 허락하지 않는다. 어떤 개인의 소유 혹은 시장가치는, 그 만큼 이 개인을 더 순종하게 만든다. 마치 개목걸이를 걸어놓은 것처럼 자유자재로 부린다. 그럼에도 개인은 무슨 보석목걸이라도 한 양 편안해 한다.  A는 마흔살의 기자로 주문에 맞춰 기사를 써 준다. 그의 솜씨, 고객이 인정해 준다는 투로, 부르는 민첩한 펜은 기사라는 그의 상품에 특정한 거래가격을 확보해 준다. 그는 살아있다.  럭셔리로 안녕을 누리는 삶은 아닐지라도 절박하지는 않으며, 암울한 빈곤을 두려워 하지 않는 그럭저럭 편안한 삶이다. 존재가 어떤 소유이지 않은 사회체계, 지식소유가 아닌 사회체계를 생각할 수는 없을까? 그래서 존재가 변화와 성장의 존재로 남을 수 있는 사회?  타인의 눈길이 그를 제압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거듭 다시금 제로 상태로 돌아가, 이 원점으로 부터 자신을 새롭게 구축하는 사회는 타인과 더불어 존재하며, 변화해 가는 사회리라.

 

무수히 많은 타인이 감당한 같은 운명과 마찬가지로, A는 그처럼 편안하고 기분좋게 느껴졌던 목걸이를 잃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파괴된 실존이라는 보석목걸이일 뿐이다. 이 파괴된 실존에서 그의 인간다움은 사회적으로 자신을 구축하는 일에만 몰두하느라 황폐해 지고 말았다. 그는 늙었다.  그 자신이 감당해야만 하는 죄과는 사회가 그에게 요구한 것에 자신을 맞춘 정도에 국한될 따름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사회에 자신을 생산자이자 소비자로 선보이면서,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게 만드는 시점을 경험했다. 이들은 언젠가는 재산을 방어하고, 지식소유를 자랑하며, 배우자와 자녀를 돌보아야만 했다.  재산을 지키거나 늘리려는 노력은 이들의 인간다움이 소진 되게 만들었으며, 노심초사를 거듭한 끝에 어느 날엔가 인생의 전환점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이제 늙은 사람이 되었다. 문은 더는 열리지 않는다. 사회는 이제 이렇게 이야기한다. ' 당신이 어제와 그제 했던 것을 해보라. 당신자신의 력을 증명해 보라.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

 

은퇴를 하고 나면 ‘누려 마땅한 은퇴생활’이라 부르는게 찾아온다. 어떤 이에게는 두둑한 공무원 연금이 다른 이에게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연금이 주어진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역사를 써나가는 현실, 늘 새로운 형세와 국면으로 변화하는 역동적 현실로 부터의 추방을 뜻할 뿐이다. 도대체 나는 언제 진짜 사는 것처럼 살까? 사회가 체념하도록 은근히 몰아붙이는 실존적 죽음은, 몸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그런데로 익숙해진다. 의미로 충만한 인생과 살아볼 가치를 가지는 노년은 앞으로 기대수명이 높아지는 대로 무명씨에게도 보장 되거나 최소한 가능해지리라. 어떤 기업의 명목상 회장은 그 실질적인 지배권력을 이미 젊은 직원 그룹에게 넘겨주었다. 저명한 교수는 지적인 능력에서 이미 오래 전에 서른살의 조교에게 추월 당했으며, 오로지 그동안 채집한 상과 명예박사 학위를 자랑할 따름이다. 이들은 정확히 이미 주어진 역할을 연기할 뿐이다. 이들은 과거의 포로에 지나지 않는다.

 

은퇴한 후, 사회복지라는 방법으로 그를 돌보거나, 반나절 일자리 창출로 도와주기는 할 것이다. 그는 그저 사회의 짐이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식충이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연금에만 내버려 두는 것보다 낫기는 하다. 그저 보살핌이라는 게 그렇게 오만한 울림만 주지 않는다면, 보살핌을 받는게 사회에 빌붙어 사는 뻔뻔함이라는 거슬리는 냄새만 풍기지만 않는다면.  그러나 다시금 그의 비참한과 사회적 고립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이 이겨내야 할 불행' 이라고 입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꼭 있다. 늙어감과 노년의 살아감을 이윤추구라는 시장경제의 사회적 구조가 가지는 몇몇 근본 문제에만 초점을 맞춰, 타인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일은 더더욱 허락될 수 없다. 늙어가는 사람은 어쨋거나 사소하기는 할지라도, 더는 되돌릴 수 없는 몸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이제는 아름다울 수 없으며, 예전처럼 민첩하지 못하고, 기민하고 똑똑하게 반응하기 힘들어진다.

 

늙은이는 추해진다. 추하다는 것은 우리가 추잡하다며 미워하는 것일 뿐이다. 노인은 허약해진다. 사람들은 노인을 보면 안타깝다는 투로, 또는 얕잡아보는 의미로 허약하다고 말한다. 늙어가는 사람과 노인에게 붙이는 무수한 부정적 형용사를 생각해보라. 신체활동을 하기에 무기력하며 서투르고, 이러저러한 일을 해낼 수 없으며, 더는 배울 능력이 없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달갑지 않고, 건강하지 않다. 한마디로 더는 젊지 않다. 감정의 깊은 샘에서 솟아오르는 이런 부정적인 표현은, 사회가 수행하는 늙어가는 사람의 파괴, 혹은 '없애버림'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님'의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메시지는 몸의 쇠락이다. 젊은이가 노인을 바라보는 부정할 수 없는 반감, 존경으로 위장된 반감은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는 빛바랜 인습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