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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대하여: 저항과 체념사이에

죽음과의 타협

나이가 들어 온갖 종류의 불편함은 더는 그에게 귀여운 반려동물이나 씩씩한 이웃처럼 하루를 살아내게 허락하지 않았다. 죽음과 친숙한 것처럼 보인다. 타인의 죽음이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의 죽음과 가까워진 친숙함이다.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지금 나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의사의 친절한 진단은 아닐지라도, 몇가지 증표로 이미 내리막길에 들어섰음을 깨달았다. 죽음은 극한의 공포를 닮은 공포이다. 나를 짓밟거나 걷어차도 누구도 나의 일그러진 몸에 도움은 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았음을 현재 일처럼 눈앞에 떠올려야만 한다. 

 

피곤해서 길을 걷기 어려울 때 택시를 탄다. 몇장의 지폐만 내놓으면, 이 좋은 서비스를 언제든지 받을수 있다. 그러나 두려움은 나와 함께 있다. 나 자신이 두려움이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일부가 된 두려움을 전혀 모른다. 너무 빠르게 찾아드는 피곤, 가쁜 숨결, 집요한 아픔은 내가 기억하지 않아도 되돌아 보는 순간 현실이 된다. 나는 죽음을 알지 못한다. 살아있는 사람이 죽음을 알까? 결국 끌어다 될 수 있는 것은 살아서 겪은 경험일 뿐이다. 문득 분명하게 깨달은 것은 자유의 갈망이란 시원하게 숨을 쉴 호흡 자유의 간절한 요구라는 사실이다. 어떻게든 숨을 쉬려 안간힘을 쓸게 틀림없다. 그것은 두려움으로 비릇된 천박함이다. 

 

살아서 확인하는 죽음의 모습이란, 늘어가며 알게된 천천히 시들어 감이다. 종양이 골수까지 전이 되어 인간이 아픔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심신을 통털어 아픔 그자체인 경우에야 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 달라는 욕구가 생겨날 수 있다. 의사를 찾아간 우리는 지금 감내하는 고통이 무해한 것이라는 진단을 받으면 안심을 한다. 격심한 너무도 아픈 류머티즘의 고통은, 그러나 죽을 병은 아니라는 것을 환자가 아는 탓에, 처음에는 고통이 없으나 치명적인 순환계질병 혹은 심혈관 질병보다 훨씬 더 잘 이겨낸다. 풍부한 사색을 담은 책 ‘ 행복과 불행’에서 독일 의사이자 현상학자인 저자 헤르베르트 플뤼게는 이른바 45세의 사업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남자는 자신이 왼쪽 어깨에 류머티즘을 앓고 있다고 믿고, 아주 당당한 태도로 이런 사소한 병 때문에 의사에게 수고를 끼쳐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진단 결과는 류머티즘이 아니라 협심증 증세라고 의사가 일러주자 기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몸 상태가 예전보다 더 나쁠게 없는 남자는 갑자기 그 당당함과 역동성을 잃고 말았다. 14일 뒤 찾아온 환자는 폭삭 늙어있었다. 완전히 자신감을 잃었으며 생기 넘치던 옛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두려움, 죽어감의 무서움, 죽음의 공포, 마지막이 될지 모를 숨쉬기의 걱정에 사로 잡혔다. 막연한 두려움, 궁극적인 두려움을 결국 '죽음'이라 부른다. 모든 두려움은 죽음의 두려움이며, 모든 신중한 돌봄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지키려는 노력이고, 건강을 위해 하는 일은 죽음을 막아보려는 시도이다. 우리의 인생 전체는 피할 수 없는 것을 피해 보려는 어처구니 없는 헛수고로 소진된다. '죽어갈수록' 마지막 호흡이 더욱 더 가까이 갈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불안에 사로잡혀 그것을 모면하는게 우리의 이성적 임무인 어떤 것을 상대로 무망(허위를 사실인양 꾸며 남을 속임)한 싸움을 벌인다. 이성적? 우리는 이성이 끝장을 맞는 영역에 들어선다. 죽음의 영역 이곳에서 이성은 오로지 절대적인 반反이성 이다. 죽음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허위적이며, 우리에게 유일하게 완전히 확실한 것이라는 점에서 진리다.

 

노년에 이르기까지 아무 걱정없이 사는 사람도 있지 않던가, 그런 사람은 균형감각을 잃지 않으며 죽어감과 죽음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행세한다. 명랑한 기분으로 종말을 맞이하는 쾌활한 사람의 이야기도 있다. 반면, 종말의 첫 전조를 맞이하기가 무섭게, 공포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비명을 질러대는 나머지 사랑하는 사람조차 짜증을 견딜 수 없어 등을 돌려버리고, 죽음의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죽음이 불평을 일삼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상대방을 구원한다. 죽어간다는게 일반의 객관적인 사실에서 바로 자신의 문제가 되는 늙어가는 사람은 통계와 의학 진단으로 그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고결한 순간, 마침내 자신의 끝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순간을 매일 비합리적이 되어가면서도, 자신도 믿지 못하는 신뢰로 어떻게든 중화 시키려 애를 쓴다핀란드에서 저녁에 이런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주여 당신이 부르시면 저는 기꺼이 따르겠나이다. 다만 그게 오늘 밤이 아니길 빕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은 자신이 이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한사코 부정하며 자기기만의 희생자가 된다. 결국 언젠가는 그것도 아주 빠른 시간에 판결이 법적 효력을 얻어 집행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늙어가는 사람은 매순간마다 그 정황이 요구하는 시간 감각에 자신을 맞출줄 아는 놀라운 능력으로 균형 감각을 빚어내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세계와 공간은 그에게 갈수록 멀어진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시간이라는 말은 허락될 수 없다.  죽음이라는 말은 미래라는 개념의 의미는 폐기된다. 미래, 우리에게 다가올 것은 살아가는 현실에서의 공간이라고 우리는 말했다. 그러니까 늙어가는 사람은 공간과 더불어 미래를 잃어버린다. 늙어가는 사람이 미래와 맞바꾸는 것은 시간을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불분명한, 말할 수 없이 소홀한 감정이다.

 

늙어가는 사람은 과거를 끝없이 변화하는 계절과 인생단계로 되돌아본다. 기억으로 떠올리는 인생단계들은 그 소중함의 정도가 끊임없이 바뀐다. 이제는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 고작 몇년으로 가늠되는 탓에 늙어가는 사람은 하느님에게 매달려 '이 몇 년이라는 시간을 무한히 늘려달라' 빌고픈 간절한 심정을 억누를 수가 없다. 4년전 그는 어떤 도시를 찾아가 휴가를 즐겼다. 그게 어제 일만  같다. 1년 뒤에는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리라. 늙어가는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벗어날수 없음을 잘알면서도 자신과 거짓말 타협을 하며 살아간다. 그는 멸시를 받아 마땅한 거짓말쟁이는 아니다. 사기꾼처럼 악의를 품고 한 거짓말이 아니다. 다만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