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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대하여: 저항과 체념사이에

위로가 아닌 진실을

젊어서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은 늙을 수 밖에 도리가 앖다. 누구도 젊어서 죽고 싶지 않으며, 아무도 늙어려 하지 않는다. 참으로 하나마나한 진부한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가 어쩔수 없이 받아들인 허망함, 그 깊이를 알수 없는 헛헛함, 자기자신을 갉아먹어 들어가는 우리 존재의 심오한 차원이 곁들여지면서 더할 수 없이 선명한 진리로 울림을 남긴다. 명백한 진리인 탓에 그 어떤 이성적 위로도 발가벗겨지고 마는 황량한 삶의 지대가 늙음이다. 그 무엇도 계획하지 말아야 한다. 늙어가며 우리의 세계가 사라지고 오로지 시간만 남는다. 나이를 먹으면 우리는 우리의 몸이 낯설어짐과 동시에, 그 둔종한 덩어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가깝게 느껴진다. 인생의 정점을 넘겨버린 우리에게 사회는 스스로 그 어떤 일도 계확하지 못하게 한다. 문화는 도대체 그게 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문화로 탈바꿈한다. 오히려 문화는 우리가 정신의 낡은 고물로, 시대의 쓰레기장에 버려져야 마땅하다고 윽박 지른다.

 

나이를 먹어가며 우리는 결국 죽어감과 더불어 살아야만 한다. 감당하기 힘든 부조리한 요구다. 우리는 그저 겸손을 강요받는 굴종으로 늙어, 죽어가는 자신을 바라볼 뿐이다. 치유가 불가능한 병의 모든 증상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감연된 '죽음'이라는 이름의 바이러스가 벌이는 알 수 없는 작용탓으로 빚어진다, 그런 바이러스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보였다. 이제 나이를 먹어가며 죽음이라는 이름의 바이러스는 잠복해 있던 은신처에서 빠져나온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죽고나면 모든게 무일지라도,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일, 오로지 우리만의 문제일 따름이다.

 

한스 차임 마이어는 온몸이 부서져라 나치에 저항해 싸웠다. 세상은 타일렀다. '무모한 싸움'이라고 참고 살면 될 걸 왜 맞서 싸우냐,고. '우리도 다 그렇게 살고 있다'고 달래었다. 세상은 그를 밀고했다. 나치 수용소를 전전해야만 했다. 자신의 글과 작품이 독일에서 출간되는 것을 거부했다. 독일의 젊은 작가 헬무트 하이센뷔텔이 눈물로 용서를 구했다. 마이어는 말했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존재'라고. '나는 내 소중한 인생을 위해 싸운 것이라고!'  1978년 마이어는 예순여섯 살이라는 나이로 수면제를 먹고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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